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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rdian of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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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rdian of Heritage 2021 AUTUMN 187

정직한 돌을 쪼는 우직한 석공 이재순(Lee Jae-sun 李在珣) 씨의 지난 반세기는 화강암과의 씨름이었다. 단단하고 결이 치밀해 석공에게는 큰 도전이지만, 한국의 석조 문화재는 대부분 이 돌로 만들어졌다.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석장 부문의 최초 명장인 그의 손끝에서 많은 문화재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현대식 기계와 장비가 도입되면서 전통 석조물 제작 기법이 차츰 사라져가고 있는 요즘, 이재순(Lee Jae-sun 李在珣) 씨는 여전히 망치와 정으로 돌을 쪼아 작품을 만든다. 그는 2007년 신설된 국가무형문화재 석장 분야에서 최초의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재순 석장의 경기도 구리시 작업장엔 돌조각들이 가득했다. 입구에는 높이 10m가 넘는 미륵상이 우뚝 서 있었고, 주변에 부처상과 사자상 등 수많은 석상들이 자리를 차지하며 각기 명장의 솜씨를 드러내고 있었다.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난 이 석장이 돌을 처음 손에 잡았던 것은 그의 나이 불과 13세 때였다. 석공 일을 하던 외삼촌과 형의 일손을 도우면서부터였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와 일머리가 좋아 썰매나 팽이를 직접 만들었던 그는 석공 일도 남들보다 빨리 배웠다. 외삼촌을 따라 문화재 공사 현장을 다니며 돌 다루는 기초 기술을 익혔다. 좋은 스승 그는 타고난 솜씨뿐만 아니라 좋은 스승을 만나는 행운도 누렸다. 1970년엔 서울의 유명한 석공 김부관(金富宽) 선생을 찾아가 일을 배웠고, 2년 뒤에는 당대 석조각의 대가 김진영(金璡榮) 선생의 문하에서 본격적인 석공예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스승 밑에서 돌을 다루는 기술과 더불어 장인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와 작품을 보는 안목까지 기를 수 있었다. 하지만 젊은 시절 잠시 방황했던 시간도 있었다. 사소한 실수가 빌미가 돼 작업장에서 쫓겨난 뒤 갈 곳 없던 그는 무작정 경주 석굴암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의 깨달음이 인생을 바꿔 놓았다. “석굴암의 조형미에 압도되었어요. 사람의 손으로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니, 죽기 전에 한번 그런 작품을 꼭 만들고 싶었어요.”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간 그는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일을 배웠다. 그는 “선생님은 건축, 종교, 미술사, 실내 장식 분야 교수들과 자주 어울리셨는데 그런 자리에 늘 저를 데리고 가셨어요.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와 불교 미술 전반에 대한 견문을 넓혀갔어요”라며 당시를 돌아보았다. 그는 21세의 나이로 1977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국제기능올림픽 석공 부문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이후 국내 각종 공모전에서 연이어 수상하며 명성을 얻었고, 1989년 석공예 명장, 2005년 경기도무형문화재 석장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2007년 신설된 국가무형문화재 석장 분야 최초의 보유자로 지정받은 것은 그가 이 분야 최고의 자리에 올랐음을 의미한다. . 화강암. 82 × 27 × 98 ㎝. (WDH) 가운데 안상 안에 봉황 한 쌍을 구름 문양과 함께 새기고 네 귀퉁이와 기단부는 당초문으로 장식해 화려함을 더한 작품이다. 성인이 출현해 천하가 태평하면 나타난다는 상상의 새 봉황은 성스러운 동물로 여겨져 주로 궁궐 장식에 이용되었고, 왕족 여인들의 예복이나 장신구 무늬로도 활용되었다. ⓒ 서헌강(Seo Heun-kang 徐憲康) . 화강암. 23 × 20 × 50 ㎝. (WDH) 어린 소녀의 모습을 통해 불교의 청정한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머리를 양쪽으로 틀어올린 쌍계(雙髻)는 길게 땋은 머리와 함께 동자상의 가장 보편적인 머리 모양이다. ⓒ 서헌강(Seo Heun-kang 徐憲康) 지광국사탑이 복원 전 서울 경복궁에 놓여 있을 때의 모습이다. 고려 시대 국사(國師) 해린(海麟 984~1067)의 사리를 봉안한 이 탑은 원래 강원도 원주 법천사지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반환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한국전쟁 시 폭격으로 심하게 손상되어 1957년 재건 보수 공사가 시행되었지만, 다시 보존 처리가 필요한 상황이 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진 후 2016년 전면 해체하고 보수를 시작하여 올해 복원이 완료되었다. 독특한 구조와 화려한 조각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승탑이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 돌의 매력 이 석장은 화강암을 주로 쓴다. 한반도에 가장 많이 분포된 이 암석은 강도가 높고 광택이 뛰어난 장점이 있지만, 흡수성이 적고 결이 치밀해 조각하기가 매우 어렵다. 불상, 석탑, 석교 등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의 고대 석조 기술은 4세기 이후 삼국 시대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잦은 전란에도 불구하고 화재를 이겨내어 수많은 석조 문화재가 전해 내려온다. 또한 석재는 사찰과 궁궐 건축의 주요 자재일 뿐 아니라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돌로 쌓는 성의 축조 또한 활발했다. 그 동안 수많은 문화재 복원과 재현 작업에 참여해 온 이 석장은 가장 힘들었던 작업을 꼽아달라고 하자, ‘대수술 끝에 올해 초 새로 태어난’ 강원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을 꼽았다. 그는 “이보다 더 어려운 석조 문화재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매우 고단한 작업이었다”고 했다. 지광국사탑은 고려 시대에 국사(國師) 칭호를 받은 해린(海麟 984~1067)의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이전 시대 전통 석탑의 모양에서 벗어난 색다른 구조에 탑 전체를 정교하고 화려한 구름·연꽃·보살·비천상 문양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승탑(僧塔)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경복궁 마당에 옮겨 놓았던 이 탑은 6.25 전쟁 때 폭격을 맞아 수많은 조각으로 부서졌다. 전쟁이 끝나고 1957년 깨어진 조각들을 일일이 붙이고 시멘트로 땜질했는데, 당시는 문화재 복원 기술이 많이 부족했을 뿐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땜질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등 훼손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상태가 가장 안 좋았던 지붕돌의 절반 정도를 새 석재로 복원했는데, 새 돌을 깨고 쪼아서 원래 돌 사이에 끼워 맞추는 작업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요. 기술 이수를 끝낸 제자 두 명하고 셋이서 1년 반을 꼬박 매달렸죠.” . 화강암. 33 × 27 × 55 ㎝. (WDH) 선의 역동성에 중점을 두고 몸의 비늘과 갈기를 표현한 작품이다. 상상의 동물인 천록은 잡귀를 물리치는 성스러운 동물로 인식되어 궁궐의 석조 장식물로 쓰였다. 경복궁 영제교(永齊橋)에서도 볼 수 있다. 이재순 석장이 사용하는 수공구들이다. 돌을 채취하거나 다듬을 때 쓰는 정, 돌을 쳐낼 때 사용하는 메를 비롯해 틈새에 박아 그 사이를 벌어지게 하는 쐐기, 표면을 곱게 쪼아낼 때 쓰는 도드락망치 등 용도에 따라 다양한 공구가 사용된다. 복원과 재현 2008년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 복원,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보수 등 굵직한 문화재 복원 현장마다 그가 있었다. 궁궐과 사찰을 포함한 전국의 석조 문화재 중 그의 손길이 닿은 작품만 2000여 점에 이른다. 또한 그는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과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의 복제품을 만들었고, 북관대첩비는 복원과 재현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함경도 의병들이 왜군을 물리친 것을 기리기 위해 1709년 주민들의 발의로 길주군에 세워진 북관대첩비는 일제가 1905년 자국으로 불법 반출한 뒤 2000년대 초까지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 비석이 일본에 있을 때는 기단과 지붕돌 없이 비신 위에 커다란 자연석만 얹어 놓은 상태였어요. 유홍준(兪弘濬) 당시 문화재청장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이 비석이 환수될 때를 대비해서 지붕돌과 기단을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돌 만지는 장인으로서 이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일본 측에선 “본래 북한 지역에 있던 것이니 북한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환을 미루고 있었다. 일본은 북한이 쉽게 허락할 리가 없다고 본 것이다. “유 청장이 묘안을 내서 서울에 몇 달 둔 다음 북한에 돌려주겠다고 약속했고, 이 제안을 받아들인 북한이 일본에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돌려주게 된 거죠.” 2005년 드디어 한국 땅으로 돌아온 북관대첩비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이어 경복궁에서 전시된 후 이듬해 그가 만든 지붕돌 및 기단과 함께 북한으로 보내졌다.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워진 이 비석은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었고, 현재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 앞뜰에 전시된 복제품은 이 석장이 실물과 같은 크기로 제작한 것이다. “숭례문 복원 공사 때는 현장에 화재의 기운이 남아 있어 피부병도 걸리고 기관지가 안 좋아졌지요. 하지만 큰 재난 후 새로운 역사를 쓴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고, 옛 석공들의 지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서 공부가 많이 됐습니다. 그들이 돌을 다듬으면서 비가 올 때를 대비해 빗물을 흘려보내는 방법까지 치밀하게 계산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구전으로만 듣던 걸 해체 작업을 하면서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거죠.” “돌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무심하게 툭툭 때리면 무심하게 모양이 나오고, 화가 나서 쪼면 화난 모습 그대로 나오거든요. 정직해서 매력적인 것이 바로 돌이지요.” 국내 석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화강암은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암석이기도 하다. 화강암은 강도가 높고 빛깔이 고우며 광택이 뛰어난 장점이 있지만, 결이 치밀해 작업하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한국의 석공예는 섬세한 조각보다 선으로 특징을 잡아 표현하는 조각이 주를 이룬다. 거친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는 돌에 새긴 부드러운 선은 한국 석조 문화의 특징이다. 변함없는 일과 이 석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1995년 타이완 신베이시 시즈구(新北市 汐止區)의 자항기념당(慈航記念堂)에 조성한 아미타불상을 꼽았다. 앉아서 입적한 후 등신불로 모셔진 자항대사를 기리는 공간에 안치할 불상을 제작하기 위해 당시 타이완 신도들이 세계 여러 나라의 석불을 돌아보고 나서 “석굴암 본존불이 최고”란 결론을 내리고는 그에게 의뢰를 한 것이다.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한 부처님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부피가 그것의 1.7배가 넘는 거대한 불상을 만들게 됐지요. 완성된 불상을 배로 옮겨 현장에 안치하던 날, 아미타불이 서쪽을 향해 앉자 구름이 걷히고 빛이 퍼졌다고 들었어요. 나중에 영상을 봤는데 정말 신기하게 석양빛이 불상을 감싸고 있었어요. 많은 분들이 감동했던 모습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우직하다. 눈을 뜨면 바로 작업장으로 향하는 게 변함없는 그의 일과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종일 돌을 깨고 쪼고 나면 온몸이 아프다. 그러나 돌에 대한 그의 사랑과 경외심은 변함이 없다. “돌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무심하게 툭툭 때리면 무심하게 모양이 나오고, 화가 나서 쪼면 화난 모습 그대로 나오거든요. 정직해서 매력적인 것이 바로 돌이지요.” 그의 아들 이백현(李伯鉉) 씨가 아버지의 기술을 전수받아 뒤를 잇고 있다. 그러나 전통 석공 기술의 우수성이 후대로 계속 이어 나가려면 개인의 노력과 함께 사회의 관심과 정부의 지원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 석장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젊은이들이 우리 전통 기술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합니다.”반 세기를 한결같이 돌과 함께 살아온 명장의 말이 느릿느릿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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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rdian of Heritage 2021 SUMMER 589

마음의 실을 이어 하늘의 수를 놓다 자수장 최유현(Choi Yoo-hyeon 崔維玹)은 70여 년 동안 바늘과 실을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아왔다. 그는 불화(佛畫)를 바탕으로 한 대작과 독창적 기법으로 한국 자수의 차원을 한층 높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삼세불도(三世佛圖)⟩ 중 ‘석가모니불도’(부분). 257 × 128 ㎝. 비단에 명주실. 자수장 최유현(Choi Yoo-hyeon 崔維玹)은 1970년대 중반부터 불화를 자수로 표현하는 수불(繡佛)에 도전했다.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를 표현하는 ⟨삼세불도⟩는 완성하는 데 10년이 넘게 걸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서헌강(Seo Heun-kang 徐憲康) 아름답고 섬세한 자수 작품을 대하면 누구나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되지만, 수틀 앞에 앉아 바늘로 한 땀 한 땀 그림을 만들어 나가는 작업은 매우 고되고 지루하여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특히 전통 자수는 현대 자수에 비해 대체적으로 제작 과정이 더 복잡하고 기법 또한 다양한 데다가 그 안에 담긴 정신까지 표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수가 힘들고 지루하기만 했다면 어떻게 평생 이 일을 했겠어요? 재미있고 즐거우니까 했죠.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 자수를 내 손으로 복원하고 싶다는 바람도 컸고요.”고생스럽지 않냐는 질문에, 최유현 자수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본질에 천착하다 “제 나이가 이제 80이 훨씬 넘었어요. 우리 어렸을 땐 바느질이 일상이었어요. 집집마다 옷도 손수 만들어 입고, 혼수에 들어가는 수도 직접 놓았죠. 제가 7남매 중 막내인데, 어머니가 늘 수를 놓고 계시니 저도 자연스레 옆에서 따라 하게 됐어요. 10대 때 학교 숙제로 자수를 해 갔다가 칭찬을 받은 게 재미를 붙이는 계기가 됐고요. 한때는 하루 스무 시간 넘게 수틀 앞을 떠나지 못한 적도 있어요. 밥 먹는 시간, 세수하는 시간까지 아껴 가며 매달렸죠.” 열일곱 살에 당시 자수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던 권수산(権寿山) 선생을 만나 체계적으로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자수를 시작하게 될 무렵, 한국 전통 자수는 암흑기였다. 그 당시 자수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여성들이었고, 이들은 귀국 후 여자대학교 가정과나 양장학교에서 일본풍의 자수나 생활 소품에 치중된 자수를 가르쳤다. 이런 경향은 오랫동안 지속됐다.최 자수장은 1960년대 초반 자수 학원을 열어, 전통 자수의 본질에 천착하고 우리 것을 되찾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베갯모나 방석 같은 생활 소품에 전통 문양을 수놓는 수준이었지만, 점차 소재를 전통 회화로 확대해 나갔다.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옛 미술품들을 재해석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확립해 나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자수는 바늘 다루는 솜씨와 타고난 색감도 중요하지만 디자인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다른 사람의 작품을 따라 하기만 해선 자신만의 독창적 세계를 구축할 수 없어요. 한국 전통 도자기와 산수화, 민화 등을 밑그림으로 삼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1. ⟨연화장세계도(蓮華藏世界圖)⟩. 270 × 300 ㎝. 비단에 명주실. 경상북도 예천 용문사(龍門寺)의 만다라를 자수로 표현한 작품으로 최 자수장에게 1988년 제13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을 안겨 주었다.ⓒ 서헌강(Seo Heun-kang 徐憲康) 도전과 성취 사회 일반적으로 한국 고유의 전통 문화가 경시되었던 시절, 그의 이 같은 노력은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고 전통 자수에 매혹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났다. 특히 그의 작품은 외국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당장의 경제적 이익보다 전통 자수의 발전을 먼저 생각했던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는 작품 판매보다는 전통 자수 연구와 전시 활동에 집중했으며, 불화를 자수로 표현하는 수불(繡佛)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불교 미술이야말로 전통 예술의 총화라는 생각에서였다. 그중 석가모니의 일생을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팔상도(八相圖)⟩와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를 아우르는 ⟨삼세불도(三世佛圖)⟩는 그의 70여 년 자수 인생을 대표하는 화룡점정이라 할 만하다. 전통 기법과 창작 기법이 화려하게 어우러졌을 뿐 아니라, 재료도 명주실은 물론 면사, 양모사, 인견사 등을 활용해 질감을 다양하게 살렸다. 두 작품 모두 완성하는 데 1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스님들이 수행과 정진에 힘쓰듯 참선하는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았어요. 특히 ⟨팔상도⟩는 통도사에서 처음 그림을 접한 후 10년간 ‘이 작품을 내 자수로 짓게 해 달라’고 기원을 드렸습니다. 가까스로 절의 승인을 받아 제작에 착수했는데, 높이 2미터가 넘는 작품 8점을 수놓다 보니 완성하는 데 12년이 걸렸어요. 그나마 제자들과 함께했기에 망정이지 저 혼자였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남다른 열정과 집념은 큰 상의 수상으로 이어졌다. 예천 용문사(龍門寺)의 만다라를 수놓은 ⟨연화장세계도(蓮華藏世界圖)⟩로 1988년 제13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1996년에는 마침내 국가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2. ⟨팔상도(八相圖)⟩ 중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236 × 152 ㎝. 비단에 명주실. 이 작품은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팔상도를 밑그림으로 삼았으며, 자수 표현이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크게 여덟 가지 장면으로 나누어 보여 주는 ⟨팔상도(八相圖)⟩는 한 화면에 여러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효제충신도(孝悌忠信圖)⟩ 8곡 병풍 중 ‘염자도(廉子圖)’(부분). 128 × 51 ㎝. 비단에 명주실. 1960년대, 한국 전통 자수의 본질에 천착하게 된 장인은 문자도를 포함한 민화의 재해석에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보존과 계승 한국 전통 자수의 역사는 삼국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한국 문화에 대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은 고대 부여와 고구려 사람들이 수를 놓은 화려한 옷을 입었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에는 궁궐에 자수 장식을 전담하는 수방(繡房)을 설치해 왕실의 의복과 장식품에 수를 놓았고, 민간에서는 가정마다 가풍에 따라 전승되는 자수 양식이 있었다. 최 자수장의 예술 철학은 ‘심선신침(心線神針)’이라는 한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 2016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전시회의 제목이기도 했던 이 말은 ‘마음의 실을 이어 하늘의 수를 놓는다’는 뜻이다. “작품 한 점 한 점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완성됩니다.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면서 자수로 재현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해 본을 뜨기까지 그 과정도 만만치 않지만, 어떤 질감과 색감의 천과 실을 사용할지, 색 배합은 어떻게 할지, 어떤 기법을 사용할지, 머릿속에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가며 작업해야 해요. 구성과 위치에 따라 실의 굵기를 달리해야 하니 실도 직접 꼬아야 하고, 마음에 드는 기법과 색감을 찾을 때까지 수를 놓았다가 뜯어내 버리는 과정을 숱하게 반복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뭐 하나 대충 넘기는 법이 없다. 언제나 기본을 강조하며 전통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 후대에 제대로 전수하기 위해서다. 이는 그가 부산대학교 한국복식문화연구소 석좌교수로 출강하며 후학 양성에 열과 성을 다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 “전통 자수가 아름답고 좋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선뜻 해 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이들도 부지기수고요. 제대로 교육받았다 해도 부단한 인내로 오랜 수련을 거쳐야만 비로소 작가로 거듭날 수 있어요.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 도전 자체를 꺼리는 거죠.” 그는 자신의 자수 인생을 돌아보는 자서전 『최유현 자수사』의 발간을 앞두고 있다. 생활 소품에서 민화, 다시 불화로 변화를 거듭해 온 그간의 여정을 시기별로 정리한 책이다. 제자들을 위한 교육용 자료 편찬 작업도 서두르고 있다. 이미 100여 점이 넘는 작품에 주석을 달아 정리한 작품집을 여러 권 펴냈고, 자신이 개발한 독창적 기법에 이름을 붙여 상세하게 기록한 책도 조만간 출간할 계획이다. 그런가 하면 대작으로선 마지막 작품으로 예상되는 양산 신흥사(新興寺) 대광전(大光殿) 벽화를 모본으로 하는 ⟨관세음보살도⟩도 완성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색(紫色) 천에 금색 실로만 수를 놓은 이 작품은 그 정교함과 화려함이 가히 극치에 달한 느낌이다. 지난 3년간 작업해 온 역작이다. “앞으로 이처럼 대규모 작품은 더 이상 하기 힘들 것 같아요. 눈도 침침하고 체력도 달려서 2~3시간 작업하는 것도 힘에 부치거든요. 이젠 작품 제작보다 제자들 교육에 집중해야죠.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전수하는 게 제 남은 숙제니까요.”그가 거의 반세기 동안 팔지 않고 보관해 온 자신의 작품과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수백여 점의 전통 및 현대 작품이 문화재청 지원 아래 전주 국립무형유산원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머지않은 날 자수 전문 박물관이 건립돼 이 작품들을 오래도록 보존하고 전시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1. 최 자수장은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명주실, 면사, 양모사, 인견사 등 다양한 소재와 색상의 실을 사용해 질감을 표현하는 한편 전통 및 창작 기법을 두루 활용해 수를 놓는다. 2. 그는 지난 3년 동안 경상남도 양산 신흥사(新興寺) 대광전(大光殿) 벽화를 모본으로 하는 를 작업 중이다. 이 작품은 자색 비단에 금색 명주실로만 수를 놓아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기품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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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rdian of Heritage 2021 SPRING 783

정확함과 아름다움의 균형 기흥성(Kee Heung-sung 奇興聲) 관장은 건축 모형 분야의 대가다. 국내 건축 모형뿐 아니라 중국 당나라 장안성 복원 모형, 파리 에펠탑 모형 등 그의 손을 거친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서도 특히 예술적 감각이 살아 있는 한국 전통 건축 모형이 압권이다.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기흥성뮤지엄(Kee Heung Sung Mseum)에서 그를 만났다. 전시실에 들어서니 소인국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작은 세상을 만든 기흥성 관장은 1938년, 지금은 북한 땅인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났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 남한행을 택했다. 어릴 때부터 만들고 그리는 데 재주를 보였던 그가 모형 제작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1967년부터였다. 무역박람회장 설계를 맡은 업체에서 모형을 제작할 사람을 구했다. 한국 현대 건축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건축가 김수근(金壽根 1931~1986)이 당시 그 회사의 수석부사장이었는데, 그가 만든 모형을 보고 “어디서 귀신 같은 놈이 나타났다”며 탄복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제가 토목 일을 하길 바랐어요. 통일이 되면 토목 공사가 많이 필요하다고. 건축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김수근 선생을 만난 게 제 인생의 큰 행운이었죠.” 기흥성 관장이 신라 시대 최대 호국 사찰이었던 황룡사 9층 목탑을 복원한 높이 4m의 모형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전통 건축물 모형을 제작할 때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와 나무를 결구 방식으로 짜맞춤하는 전통 방식을 그대로 사용한다. 전통 건축 모형 그는 손이 빠르고 정확했다. 남들이 스케치를 하고 있을 때 작품 한 점을 뚝딱 완성하는 속도였다. 김수근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은 그는 서른한 살 이른 나이에 팀장 역할을 맡게 됐고, 산업화가 한창이던 1970년대에는 국가 개발 프로젝트에 필요한 모형 제작을 도맡다시피 했다. 그의 모형들을 보면 한국 경제 발전사를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땐 제가 대통령 브리핑의 마지막 구원 투수 역할을 했어요. 도면만 가지고 설명하기엔 한계가 있는데, 제가 만든 모형을 보면 단박에 이해가 됐으니까요.” 서울에서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 여의도 종합 개발 계획 등의 모형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그는 “당시에는 사무실에 야전 침대를 가져다 놓고 밤을 새우면서 잠깐씩 눈을 붙였을 정도로 몸을 던지며 일했다”고 했다. 현대 건축으로 시작한 그의 작업은 전통 건축물을 재현하며 무르익었다. 국립박물관에서 주문한 황룡사 9층 목탑 모형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신라 시대 최대의 호국 사찰이었던 황룡사는 1238년 몽고 침략으로 9층 목탑과 전각까지 모조리 불에 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기 관장은 실물이 남아 있지 않은 탑을 추정해 높이 4m의 모형으로 재현했다. 그는 “1980년대에 건축•고고학•미술사 등 여러 분야 학자들과 전문가들의 자문을 거쳐서 3년 만에 추정 복원 설계도를 완성하고, 제작에만 5년이 걸렸다”며 “현존하지 않는 탑을 추정 복원하는 작업이라 가장 힘이 들었지만 그만큼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고 했다. 지하 1층 전시관에 그가 복원한 황룡사 9층 목탑이 전시돼 있다. 현재의 작품은 1993년 국립민속박물관 이전(移轉) 개관 기념 특별전 를 위해 제작한 작품이다. 당시 국내외에서 “찬란했던 신라 건축이 되살아났다”며 극찬을 받았다. 서울 롯데월드 민속박물관 내 1200㎡ 규모의 모형촌도 그의 대표작이다. 조선 시대의 법궁(法宮) 경복궁을 비롯해 향교와 사찰 등 각종 전통 건축물이 1/8 축소 크기로 전시되어 있다. 당시의 건축물과 생활상을 한눈에 보여 주는 곳이라 전 세계 귀빈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단골로 찾는 명소다. 2002년 이곳을 방문한 루샤오보(魯曉波) 중국 칭화대 미술학원 부원장은 “전통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되살린 솜씨를 중국에 들여오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목재에 단청을 칠하고 손톱만 한 기와를 구워 가며 꼬박 2년을 매달렸다”며 “그것들을 완성하느라 죽을 뻔했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가슴에 심장박동기를 달고 작업을 이어나갔기 때문에 그로서는 정말 목숨을 건 작업이었다. “한국 고건축에서는 선이 매우 중요해요. 살짝 올라간 처마의 곡선, 일직선이 아니라 약간 들려 있는 그 미묘한 차이를 감각으로 해내야 하거든요. 작업을 할 때마다 우리 선조들의 슬기로운 능력에 탄복합니다. 현대 건축물은 이 멋을 못 따라가죠. 전통 건축이 현대 건축물보다 훨씬 더 재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제자들도 여기 손대려면 최소 5년 이상 경력을 쌓아야 합니다.” 칭화대는 지난 2004년 그를 미술대 객원 교수로 초빙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 박람회를 앞두고 그의 예술적 감각과 기법을 배우고자 한 것이다. 2004년 6월 베이징에서 열린 은 CCTV에서 특별 방송으로 다루어 중국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기 관장은 높이 80미터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진 황룡사 9층 목탑을 1:20의 비율로 축소한 모형으로 복원하기 위해 3년에 걸쳐 추정 복원 설계도를 완성하고 5년 동안 제작했다. 각 층마다 난간의 살을 아(亞) 자 문양으로 짜서 정교하게 둘렀다. “솜씨만 비슷하게 흉내를 내서는 절대 감동을 줄 수 없다. 모형은 정확함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모형 전문 박물관k 기흥성뮤지엄은 기 관장의 모형업 종사 50주년을 맞아 2016년 11월 개관했다. 자신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건축 모형 분야 종사자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은 그의 오랜 꿈이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 박물관에는 그가 만든 모형 작품 10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지하 1층은 한국 전통 건축관으로 입구에서 국보 숭례문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다. 2008년 화재 이전의 모습이 그의 모형으로 남은 것이다. 건물 내부의 기둥과 계단, 지붕 추녀마루 위에 올린 앙증맞은 잡상까지 생생하다. 문 양쪽의 성벽도 실제 돌의 무늬와 길이까지 반영해 정교하게 제작했고, 손톱만 한 암수 기와까지 일일이 짜서 맞췄다. 그는 “숭례문에 불이 났을 때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다”며 “화재 이전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작품이라 실제 복원 작업에도 도움이 됐다고 들었다”고 했다. 2층 전시실은 근현대 건축관이다. 옛 서울역과 지금은 철거된 조선총독부 건물이 원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88 서울올림픽 주경기장, 63빌딩, 종로타워, 월드컵 경기장 등 국내 주요 건축 모형뿐 아니라 백악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등 세계 각국의 유명 건축물 모형까지 볼 수 있다. 그중에는 평양 시가지 모형도 있다. 그를 ‘평양을 서울에 옮겨 온 사나이’로 불리게 한 작품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즈음에 평양 시내 주요 건물들과 자연 경관을 가로•세로 5m 입체 조형물로 만들었다. 순안공항에서부터 주체사상탑, 만수대 의사당, 인민문화궁전, 고려호텔 등이 눈길을 끈다. 숭례문은 조선 시대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화강암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건물을 올렸다. 1398년 지어진 이 목조 건물은 2008년 방화로 소실됐다가 2013년 복원됐다. 기 관장의 숭례문 모형은 화재 이전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기 관장은 지붕 추녀마루 위에 올린 잡상까지 실제 비율을 감안해 세심하게 만들었다. 전통 건축에서 기와지붕의 추녀마루에 놓는 잡상은 장식적 용도뿐 아니라 벽사의 의미도 있다. 완성되지 않은 꿈 기 관장은 2009년 한국이 아랍에미리트연방에서 400억 달러 규모의 원전을 수주하는 데도 일조했다. 그가 만든 1/200 축소 신형 원자력 발전소 모형이 한국의 원자력 발전 기술력을 돋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온라인으로 3D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는 시대에 모형이 왜 필요할까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실제 건축물을 짓기 전 완공 뒤의 모습을 미리 살펴보고 주변 경관과도 잘 어울리는지 등을 예측하기 위해 반드시 모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그는 “설계 의도를 정확히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시공 도면대로 건물 하나를 짓는 과정을 똑같이 거쳐야 한다”고 했다. 전통 건축을 재현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먼저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골격을 만든 뒤 서까래, 지붕, 기와, 창호까지 세밀한 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는 “솜씨만 비슷하게 흉내를 내서는 절대 감동을 줄 수 없다”며 “모형은 정확함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통 건축물 모형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좋은 목재를 구하는 일인데, 모형이 완성된 후에 나무가 갈라지면 안 되니까 실제 한옥 건축에 사용되는 질 좋은 춘양목을 확보해 두었다가 써요. 그리고 접착제를 쓰지 않고 부품을 일일이 맞춰 조립합니다. 전통 건축의 미감을 그대로 살리는 게 중요하거든요.” 박물관 건립을 향한 그의 꿈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보관 중인 작품을 더 많이 전시하기 위해 새 전시관을 열 계획이다. 그는 기흥성뮤지엄 뒤편에 2관을 열고, 고향과 가까운 인천 송도와 덕적도 등지에 대규모 전시관을 세우고 싶다고 했다. “모형 제작은 사라져 가는 문화재를 복원하는 일이자, 미래에 일어날 다양한 문제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작업이기도 하지요. 50년 넘게 오로지 이 한길만 걸어온 제가 마지막까지 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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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rdian of Heritage 2020 WINTER 312

막걸리의 변화를 이끌다 서울 강남 중심가에 위치한 백곰막걸리는 여러모로 이제까지의 전통 주점과 많이 다르다. 수백 종류의 한국 전통주와 양조 시설까지 갖춘 이 주점의 이승훈(Lee Seung-hoon 李承勳) 대표는 막걸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자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승훈 대표는 지방 소도시에 위치한 한 전통주 전문 주점이 최근 문을 닫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며 말문을 열었다. “주인이 손님들한테 여러 번 멱살 잡히다가 결국 가게 문을 닫았다고 해요. 한 통에 2~3천 원이면 마실 수 있는 막걸리를 만 원에 팔았으니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거죠. 막걸리는 서민의 술이라 저렴하다는 인식과 정면으로 부딪친 겁니다.” 지금은 맥주와 소주에 밀려 주류 시장 점유율이 5~6%에 그치지만, 1980년대 중후반까지 막걸리는 가장 대중적인 술이었다. 퇴근길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은 비닐봉지 속 두부 한 모, 막걸리 한 통이 소박한 술상이 되어 하루의 고달픔을 풀어주던 시간들, 삼삼오오 모여 앉은 선술집에서 누런 양은주전자에 담긴 뽀얀 막걸리가 누군가의 근심과 함께 끝없이 차고 비던 시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게 착한 가격과 훈훈한 정서로 대표되는 술이었던 막걸리에 변화가 일고 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지역마다 대표적인 지역 막걸리가 시장을 차지하고 있어 소비자들에겐 선택권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저희 백곰막걸리에서 취급하는 막걸리가 60여 종이고, 가격도 예전보다 훨씬 높아져서 2만 5천 원에서 1만 오천 원 정도입니다. 이런 술들이 최근까지 하루 판매량을 제한해야 할 정도로 잘 팔렸어요.” 강남 압구정동 한복판에 위치한 백곰막걸리 주점은 코로나19가 창궐하던 지난 7월 한여름에도 매출 하락은커녕 신기록을 세웠다. 그의 가게가 무려 300여 종의 술을 갖춘 전국 최대 규모의 전통주 전문 주점이어서뿐만은 아니다. 소비자들의 입맛이 대기업 생산 일반 맥주에서 수제 맥주로 옮겨갔듯, 막걸리 소비에도 다품종 고급화 바람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다품종 고급화 탄산감이 가미된 ‘샴페인 막걸리’, 전통 쌀 막걸리에 과일과 요거트를 조합한 후 솜사탕을 얹은 ‘솜사탕 막걸리’, 양질의 원재료를 강조하는 ‘프리미엄 막걸리’ 등 소비되는 막걸리의 종류가 훨씬 다양해졌다. 또한 서울 메가 상권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고급 전통주 전문 주점이 군, 읍 등 지방으로 번지고 있는 것 역시 의미있는 변화이다. 이 대표는 그 변화의 바람 한가운데서 바람의 힘을 모으고 있는 주인공이다. 그는 “막걸리는 한국 식문화의 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막걸리는 찹쌀, 멥쌀, 보리, 밀가루 등을 찐 후 누룩과 물을 섞어 발효시킨 우리 고유의 곡물주로 보통 멥쌀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숙성된 후에 위로 뜬 맑은 술이 청주고, 술밑을 체에 밭아 버무려 걸러낸 탁한 술이 막걸리다. 중요한 것은 쌀이 주식인 우리에게 집집마다 쌀로 빚어내는 술은 생활을 담아내는 하나의 문화였다는 점이다. 우리 민족에게 막걸리는 술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얘기다. “일본의 사케는 에도시대부터 양조장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어요. 우리에게도 전문 양조장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김치나 장을 담가 먹듯이 집집마다 무언가 조금씩 다른 가양주를 빚어 마셨던 특징이 있죠.”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빚는 이의 솜씨와 가문의 비기에 따라 가정마다 고유의 향과 맛을 가진 술이 태어났다. 쌀과 누룩만으로 빚었지만 신기하게도 꽃이나 과일향 같은 깊은 향취가 나는 술도 적잖았다. 그런 술들이 제례나 혼례 같은 집안 대소사에 쓰였으며 대를 이어 전승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문화는 지속될 수 없었다. 20세기 들어 식민 통치를 거치며 허가받은 술도가만 주세를 내고 술을 빚어 팔 수 있게 되었다. 해방 이후엔 쌀이 많이 부족했던 까닭에 양곡보호령이 선포되어 전통 곡주 생산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1960년대 초반부터 30년 가까이 쌀뿐 아니라 국내에서 생산된 곡물로 술을 빚는 게 금지돼 있었어요. 수입 밀가루나 옥수수 전분 같은 걸로 술을 빚게 된 거죠. 한 세대 동안 우리 재료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가양주 문화와 솜씨가 소멸될 수밖에요.” 이후 쌀 생산량이 늘고 식생활의 변화에 따라 소비량은 줄면서 쌀이 남아돌자 그제야 쌀막걸리 제조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미 옛맛을 찾기는 어려워졌다. 1995년부터 일반 가정에서도 막걸리를 만들 수 있게 됐지만, 가양주 전통은 희미해졌고 몇몇 제조업체가 대량 생산한 막걸리만 유통될 뿐이었다. 수입산 쌀 70~80%에 아스파탐 등의 인공 감미료를 넣고, 누룩 대신 인공 배양 효모를 사용한 저가의 막걸리만 양산되었고 소비자들도 그 맛에 익숙해져 갔다. 그는 저가 막걸리 대여섯 병에 만취하고 끝날 우리들의 저녁을 다르게 바꿔 보고 싶단다. 예를 들어 가벼운 맛 뒤로 꽃향이 일고 화이트 와인의 깔끔함까지 더해지는 약주 한 병의 은근한 풍성함을 천천히 음미하거나, 또는… 전통주의 확산 2000년대 말 즈음에 막걸리 시장에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독과점 브랜드 일색이던 시장에서 지역 막걸리 브랜드들이 점유율을 높이기 시작했고, 일본인 관광객들을 중심으로 ‘막걸리 열풍’도 불었다. 잊혔던 막걸리의 맛과 가치를 재발견하는 분위기가 성숙되자, 크고 작은 가양주 교육 기관에서 막걸리를 직접 빚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퇴직자나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직접 술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중요한 점은 그 사람들이 자신이 집에서 마실 술을 빚고 즐기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가양주를 문화적으로 퍼뜨리게 되었다는 점이죠. 전통적인 양조 방법을 따르면서 사케나 와인과도 경쟁할 가능성이 생긴, 품질이 충분하다고는 볼 수 없어도 유의미한 술이 많이 생겼어요. 또 그 사람들 중 일부가 양조장이나 전통주 주점, 음식점 등을 개업하기도 했고요.” 달아오르던 열기가 폭발한 것이 2016년경이었고, 이 대표도 그해 백곰막걸리를 열었다. 2010년부터 양조장 400여 곳을 찾아다니며 오로지 전통주와 함께했던 시간의 결실이었다. 그는 ‘자신들이 얼마나 좋은 술을 만들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또 ‘그 술을 어떻게 팔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양조장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전국에서 구한 좋은 막걸리를 차에 싣고 다니며 여기저기 모임에 가져가서 소개하고, 다른 사람들의 가게를 빌려서 팝업 행사도 하면서 꿈을 꾸었죠. 양질의 막걸리를 상시 판매할 수 있는 매장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거죠.” 그는 자신의 가게를 기지 삼아 전통주의 확산과 발전에 기여할 방법을 찾고자 했다. 일단 다양한 술을 갖춰 고객들의 선택지를 넓혔다. 직접 빚은 술의 품평을 부탁하며 찾아온 이들과 수없이 마주 앉았고, 시판 예정인 브랜드와 뜻이 맞는 경우 자신의 인적 물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출시와 판매의 길을 터주기도 했다. “제 가게에서 팔 수 있는 술의 양에는 한도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스스로 홍보를 위한 안테나숍 역할을 맡은 거죠.” 그는 자신의 가게를 전통주 인력 양성 장소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곳의 직원들은 국가 대표 전통주 소믈리에 경기 대회에서 메달을 싹쓸이할 정도로 전문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많은 종류의 전통주와 다양한 손님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훈련되는 환경이 키운 실력이기도 하지만,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이 대표의 파격적인 지원 역시 한몫했다. 그는 자원하는 직원들에게 국내 대학과 학점은행제 강의 수강뿐 아니라 일본공인사케소믈리에 자격증 과정 등 해외 전문 코스 교육도 아낌없이 지원한다. 양조, 연구, 소믈리에, 창업 등 모든 단계의 전통주 관련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배출하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의 요구 이쯤에서 그가 꿈꾸는 ‘막걸리 맛’은 어떤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에 닿는 막걸리의 맛을 모조리 감별하고 분석해 봤을 그였지만, 답은 의외로 담백했다. “심오하거나 민감한 맛에 대한 얘기보다는 오히려 주점과 소비자의 접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제 시각보다는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다가설지를 먼저 생각해요. 대중성을 갖춘, 팔릴 수 있는 술인지를 봐야죠. 전문가의 패러독스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그는 고문헌에 나타난 전통주를 재현하는 작업에도 자신만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순전히 전통 방식으로 만들게 되면 지금의 기준에선 들쩍지근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요. 물론 그런 전통의 맛을 그대로 유지하는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우리 시대 시장에서 소비자가 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찾아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CJ프레시웨이에서 수산물, 축산물 MD로 전국 산지를 누비던 전직의 경험을 살려 술과 음식의 페어링에도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 예를 들어 ‘통영 욕지도산 고구마로 만든 소주와 통영 앞바다 명물 딱돔으로 만든 안주’처럼 가장 훌륭한 조합은 지역성을 맞춘 페어링이란 접근처럼 말이다. 최근에는 전통주 도매 유통으로 관심을 넓히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주점에서 이 술을 주력해서 팔면 저 술이 덜 팔리죠. 그런데 도매는 달라요. 내가 홍보하고 다니면서 어떤 술을 이 주점에도 제안해 보고, 한식당이나 양식 레스토랑에도 넣어 보고…. 노력하기에 따라서 살아남아야 할 양조장을 살릴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전국의 양조장들이 최소한 문을 닫지 않게 도울 수만 있어도 보람될 것 같아요.” 그는 저가 막걸리 대여섯 병에 만취하고 끝날 우리들의 저녁을 다르게 바꿔 보고 싶단다. 예를 들어 가벼운 맛 뒤로 꽃향이 일고 화이트 와인의 깔끔함까지 더해지는 약주 한 병의 은근한 풍성함을 천천히 음미하거나, 또는 조선 시대 주막에서 팔았던 막걸리와 가장 흡사할 듯한 간결하고 원시적인 단맛에 젖어 보는 저녁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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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rdian of Heritage 2020 AUTUMN 296

상생을 위한 무술 올해 29세인 박신영(Park Shin-young 朴信暎) 사범은 무려 25년 동안 한국 전통 무술 택견을 연마해 왔다. 그는 무술의 고수에 머물지 않고, 공연을 전문으로 하는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며 세계 곳곳에 택견의 상생 정신을 전파하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이자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이기도 한 택견은 손과 발을 이용해 상대를 타격하거나 넘어뜨리는 한국의 전통 무술이다. 민간에 전승되어 온 여러 문화 현상이 그렇듯 택견 또한 그 기원이 문헌상으로 명확히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고구려(BC 37~AD 668) 무용총에 그려진 벽화의 대련 그림이 비슷한 동작을 묘사하고 있어 유구한 역사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수박희(手搏戱)나 각희(脚戱)처럼 택견의 다른 명칭 중에는 ‘희’자가 붙은 것들이 보이는데, 이 한문 글자는 놀이를 뜻한다. 택견은 많은 사람들이 모인 야외에서 선수들이 서로의 기량을 겨루며 한바탕 즐겁게 노는 특징이 있다. 구한말까지만 하더라도 마을 잔치가 있는 날이면 택견 판이 종종 열리곤 했다. 윗동네와 아랫동네가 대표 선수들을 선발해서 자존심을 건 한판 승부를 벌였는데, 나이가 가장 어린 아이들이 먼저 나섰다. 박신영 사범이 택견의 매력에 푹 빠져 일찌감치 인생의 전부를 걸게 된 계기도 사실 그 아이들과 무관하지 않다. “100년도 더 된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저를 택견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사진이란 서양 선교사가 찍은 택견 놀이 장면이다. 조선 말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진에는 옹기종기 모여 앉은 어린 구경꾼들 앞에서 두 아이가 힘을 겨루고 있다. 이크택견 박신영 대표가 자신의 대표적 발차기 기술인 곁치기를 응용한 시범을 보이고 있다. 그는 이 기술로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 이크택견 춤과 닮은 무술 “부모님께서 유치원을 운영하셨어요. 그런데 어디선가 그 사진을 보시고는 어느 날 갑자기 택견 사범님을 모셔와서 원생들에게 매일같이 가르치신 거예요. 정신 단련과 호신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셨대요. 저도 끼어들어 배웠는데, 저는 무엇을 배운다기보다 그저 신나게 춤을 추며 논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그 시간만 손꼽아 기다렸죠.” 그렇게 시작한 택견 수련이 올해로 25년째다. 어린 나이에 그가 느낀 대로 이 무술은 춤과 닮았다. 곡선의 동작들이 끊임없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단지 그것만이 아니다. 택견이 춤을 연상케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발놀림에 있다. ‘품밟기’라 불리는 이 발동작은 택견을 수련할 때 맨 처음 배우는 기본 동작으로 그 모습이 마치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 같다. 양팔을 허공에 휘휘 젓는 활갯짓까지 곁들이면 영락없다. 품밟기는 단순해서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다. 다리를 앞으로 내밀 때 무릎을 살짝 구부려서 굼실거리고, 그 다리를 뒤로 뺄 때 몸을 뒤로 젖혀서 능청 떨면 그만이다. ‘굼실’은 발질에 속도와 다양성을 부여하고, ‘능청’은 힘을 싣는다. 그런데 품밟기라고 다 같지는 않다. “품밟기 한 가지만 봐도 고수인지 하수인지 알 수 있어요. 하수들은 조급해요. 아주 바쁘게 움직이죠. 반면에 고수들은 확실히 여유가 있어요. 리듬을 탈 때도 무미건조한 3박자가 아니라 강약약, 약약강 등 다채롭게 액센트를 주죠. 그렇게 우아하게 품을 밟다가 상대의 빈틈이 보이는 순간 느닷없이 발로 차거나 손으로 잡아서 내동댕이쳐 버리는 거예요. 그 호흡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속수무책으로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박신영 씨의 남편 이주영(Lee Ju-young 李珠映 왼쪽) 사범과 안형수(Ahn Hyung-soo 安烱秀) 이크택견 부대표가 점프 곁치기 기술 시범을 보여 주고 있다. 택견은 겉으론 춤처럼 부드러워 보이지만, 유술(柔術)과 타격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 매우 전투적이다. 하지만 이 격렬한 무술은 배려와 상생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 박신영 씨의 손동작 시범 장면. 택견은 발동작뿐만 아니라 손으로 가격하는 기술도 다양하고 화려한데,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공격력은 매우 강하다. 양면성 춤 같은 동작과 “이크”, “에크” 하는 추임새 때문에 종종 코미디 소재로 쓰여서 그런지 택견을 우습게 보는 시선이 있지만, 한마디로 오해다. 택견은 그 어떤 무술보다 파괴력이 큰 실전 무술이다. 한쪽 팔을 쭉 뻗은 거리 안에서 승부를 보는 특성 때문에 별다른 예고 동작도 없이 갑자기 모든 종류의 발질이 나온다. 발등으로 정면 위를 차는 제겨차기, 방망이로 후려치듯이 차는 후려차기, 발등으로 곁을 휘어 차는 곁치기,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회전시켜서 두 발로 차는 날치기 등 어떤 발차기가 언제 등장할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이 중에서 박 사범의 특기는 곁치기다. 이 기술로 전국체전을 비롯해 여러 이름 있는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택견은 발동작뿐만 아니라 씨름이나 유도처럼 상대를 넘기고 던지는 기술, 손으로 가격하는 기술도 다양하고 화려하다. 겉으론 춤처럼 부드러워 보이지만, 유술(柔術)과 타격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 매우 전투적이다. 하지만 이 격렬한 무술은 배려와 상생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 택견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무술과의 차이점을 깨닫게 된다. 즉, 필사적으로 기선을 빼앗고, 상대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요량으로 쉴 새 없이 몰아붙여 다시는 덤빌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하는 걸 강하다고 여기는 다른 무술과 딴판이다. 택견은 상대에게도 늘 동등한 기회를 준다. 품밟기를 하면서 상대의 공격 범위 안에 내 한쪽 발을 내주는 행동이 대표적이다. 이 동작을 ‘대접(待接)’이라 부르는데, 귀한 사람을 융숭하게 응대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택견에서 상대는 물리쳐야 할 적이기 이전에 예를 갖춰 대해야 하는 손님이다. 또한 상대를 다치지 않게 제압하는 것을 수련의 중요한 목표로 삼는다. 겨루기를 하다 보면 투쟁심이 솟게 마련이고 자기도 모르게 상대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다. 택견에서는 상대를 다치게 한 사람이 패배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 무술이 추구하는 상생의 가치를 훼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련자는 기술 연마만큼이나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도 노력을 쏟아야 한다. 기술만 있고 평정심은 없는 수련자의 손과 발은 그저 흉기일 뿐이다. “힘을 써서 남을 다치게 하기는 쉬워요. 사람들은 그걸 보고 세다고 말하죠. 하지만 그건 강한 게 아니라 잔인한 거예요. 다치지 않게 제압하는 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이고, 그걸 해낼 수 있어야 진정한 강자라고 할 수 있어요. 내적 수련이 동반되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에요.” 사회적 기업 한동안 그도 강해지고 싶은 욕망에 지배당한 적이 있었다. 배움이라는 이름 뒤에 그 욕망을 숨긴 채 서울에 있는 수련관들을 찾아다니며 고수들을 만났다. 그들의 비기를 모두 흡수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아닌 기술만을 좇는 자신이 보였다 정신이 번쩍 들어 그만두었다. 그리고 대한택견협회에서 시범단 활동을 함께 해 온 이들과 함께 사회적 기업 ‘이크택견’을 만들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전쟁이 완전히 없어지는 날이 올까요? 만약에 세상 사람들 모두가 택견을 수련한다면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요. 오랫동안 수련하다 보면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질 테니까요. 그러자면 택견을 널리 알리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크택견은 사회적 기여뿐만 아니라 제 꿈을 키우는 곳이기도 하죠.” 그 후로 6년이 흘렀다. 세계를 누비며 택견 시범도 하고, 마당극이나 뮤지컬 같은 예술 장르와 접목시켜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다른 어떤 일보다 택견을 할 때가 행복하고 기운이 나요. 제게는 택견이 곧 일이자 휴식이에요. 아직 갈 길이 멀어요. 그러니 부지런히 움직여야죠. 아직도 택견이 뭐냐고 묻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거든요.” 다부지게 말하는 그를 보며 어쩐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외로운 길에서 동분서주하는 그가 고마웠고, 힘들어도 멈추지 말고 그 길을 계속 가 주었으면 하는 염치없는 바람이 마음 속에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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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rdian of Heritage 2020 SUMMER 311

오늘도 어제와 같은 마음 서울의 오래된 도심 경복궁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비원떡집은 조선 시대 궁중떡의 전통을 잇고 있는 가게다. 70년된 이 떡집의 3대 주인 안상민(安尙敏) 씨는 옛맛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 묵묵히 소명을 다하고 있다. 0년 역사를 지닌 비원떡집의 3대 주인 안상민 씨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떡집을 8년 전부터 운영해 오고 있다. 그는 가게 로고와 포장 용기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디자인했지만, 떡 제조는 전통적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가게 앞엔 간판이 없었다. 다만 안이 들여다보이는 아담한 통창 위로 작은 기와지붕이 얹혀 있을 뿐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진열대 위쪽 천장에도 기와가 올라가 있었고, 나무로 된 문과 바닥에선 한옥의 대청마루 느낌이 났다. 진열대엔 다섯 가지 떡이 나란히 정갈한 모습으로 손님을 맞았다. 그중 이 가게의 얼굴로 소문이 난 두텁떡(盒餠)에 먼저 눈길이 갔다. 찹쌀 반죽 안에 잘게 썬 호두, 밤, 잣, 대추를 유자, 꿀, 계핏가루에 버무린 소를 넣어 먹기 좋은 크기로 둥글게 만든 다음 볶은 팥고물을 얹어서 찐 떡이다. 고려(918~1392) 말기에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1392~1910) 시대에는 왕들의 생일상에 올랐고 부유한 양반집에서나 만들어 먹던 상류 사회 음식이었다. 팥고물이 가득 묻은 떡을 조심스레 베어 물면 견과류의 사각대는 풍성한 식감 사이로 유자청의 달고도 상큼한 뒷맛이 스쳐가 맛의 품격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값비싼 재료와 만드는 데 공이 많이 들어 지금도 일반 떡집에서는 제대로 된 솜씨를 만나기 힘들다. 미세한 식감 서울시는 역사가 오래된 가게들 중에서 특별히 가치가 있는 곳들을 골라 2017년부터 ‘오래가게’로 지정해 오고 있다. 비원떡집도 그중 하나인데, 유명세 때문인지 이곳을 소개하는 기사들이 제법 많다. 그 기사들에서는 이 가게의 유래를 이렇게 적고 있다. “고종(재위 1863∼1907)과 순종(재위 1907∼1910)의 수라상을 담당했던 조선의 마지막 상궁 한희순(韓熙順 1889~1972)이 홍간난(洪看連 1925~1999)에게 궁중떡의 비법을 전수했다. 홍간난은 1949년에 비원떡집을 열었고, 그곳에서 1970년대부터 일을 배운 조카 안인철(安仁喆)에게 1984년 가게를 물려주었다.” 지금 진열대 앞에 선 안상민은 안인철의 아들로 스물세 살이었던 14년 전부터 떡 일을 배우면서 8년 전 아버지로부터 대표 자리를 물려받은 3대 운영자다. 주방과 홀을 오가며 바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조선의 마지막 주방 상궁의 솜씨가 과연 어떤 사연을 업고 당신의 이모할머니에게 전해질 수 있었느냐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기다리는데 그의 답은 뜻밖이었다. “아버지에게 들은 건 그게 다예요. 아버지도 이모할머니께 상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하신 것 같아요.” 무엇을 묻건 그의 답은 좀처럼 길어지지 않았다. 그는 원래 말을 길게 못 하는 성미라고 했다. 14년간 일을 해온 지금 과연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물어도 답은 비슷했다. “전부 할 줄 알아요. 아버지가 모두 제게 맡기셨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되는 일은 없는지 물으니 “전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40년 넘게 떡을 만든 아버지와 비교했을 때 본인이 아직 체득하지 못한 기술이 어떤 것일까 물었다. “그런 것도 없어요. 제가 더 잘해요. 제 나름의 기준에서 식감을 조금씩 바꿨는데 매출도 늘고 평가도 나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예전의 설기는 좀 더 질기고 쫀득쫀득했다면, 지금은 보송보송한 파운드케이크 같은 식감에 가까워졌다 할까요?” 젊은 사람들의 입맛을 고려한 것인지 물으니 그는 자기 입맛에 맞춘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3대를 잇는 떡집 주인은 떡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좋은 떡의 기준은 여럿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식감, 다시 말해 맛 아닐까요? 떡마다 다른 고유의 쫀득한 식감이 살았는지 봐야죠. 다른 기준은 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맛을 결정짓는 요소요? 쌀가루 입자, 물의 양, 소금 이 세 가지일 것 같아요. 특히 식감은 쌀가루 입자에 영향을 받죠. 쌀을 곱게 빻느냐 좀 덜 곱게 빻느냐에 따라서 떡이 질긴지 덜 질긴지, 금방 굳는지 오랫동안 부드러운지가 결정되니까요. 그런 걸 많이 생각해요.” 자신의 직업을 미화하려는 의지가 조금도 없는 그의 답은 초지일관했다. 각종 매체에 꾸준히 노출되며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베이커리와 컬래버레이션하여 개발한 새 메뉴라든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디저트 카페 같은 청사진은 비치지 않았다. 한옥 기와를 천장에 설치해 고풍스럽게 꾸민 비원떡집의 내부. 이곳은 2017년, 서울시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가게를 골라 지정하는 ‘오래가게’에 선정되었다. 현대적 미감 미세한 식감의 변화와 함께 그가 챙긴 것은 떡과 떡집의 외관이었다. 손님 대부분이 단골인 상황에서 이곳을 처음 찾는 이들, 특히 20~30대 젊은 층에게 호감을 주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는 떡을 층층 쌓아 랩으로 둘둘 두르는 오래된 진열법, 투박한 스티로폼 용기를 걷어냈다. 떡 하나하나 일일이 따로 싸는 개별 포장법을 택했고, 국내외 유명 빵집의 포장 디자인을 연구하며 가게 로고와 포장지를 새로 만들었다. 흰색 종이 상자에 몇 가지 떡을 멋스럽게 담은 선물 세트까지 내놓았다. 이후 젊은 층의 구매량이 전체 매출의 30%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맛의 핵심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의 생각엔 흐트러짐이나 불안감이 없어 보였다. 70년간 매일 같은 방식으로 같은 제품을 내어온 가게를 이어 가는 사람. 상품을 묵힐 수가 없는 기술이자, 긴 세월 고객들의 입맛으로 걸러지고 입증된 순도 높은 기술. 그에게서는 그 안정성을 손에 쥔 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아버지가 그랬듯 양질의 국산 재료를 꾸준히 사용한다는 이야기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 가지라도 재료의 품질을 낮추면 떡의 맛에 큰 차이를 불러오느냐 물으니, 그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그렇겠죠? 그런데 전 늘 쓰던 재료만 계속 사용해서 어떤 변화가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재료 10여 가지가 제대로 조화를 이뤄야 맛이 완성되는 두텁떡에서 가장 맞추기 힘든 포인트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답을 늦추며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뭐가 어렵고 뭐가 쉬운지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떡을 다른 곳에서 따로 배운 게 아니고 이 가게에서만 줄곧 해왔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안 돼요. 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1. 바람떡 2개를 입술 모양으로 포개어 붙인 쌍개피떡[雙甲皮餠]. 껍질 벗긴 팥을 삶아 으깨어 만든 소가 멥쌀가루 반죽 안에 들어 있다. 2. 약식은 물에 충분히 불린 찹쌀을 찐 후에 꿀, 흑설탕, 진간장을 섞어 옅은 갈색으로 물들인 후 반으로 쪼갠 밤과 4등분한 대추를 넣고 참기름을 섞어 다시 중탕하여 찐 다음 잣을 고명으로 얹어 만든다. 3. 비원떡집을 대표하는 두텁떡[盒餠]은 안상민 씨가 가장 좋아하는 떡이다. 고운 팥고물이 묻은 떡을 베어 물면 잘게 썰어 소로 넣은 여러 견과와 유자청의 달콤함이 입 안을 가득 메운다. 꾸준한 일상 떡집 주방에 흩어지는 증기 너머로 사물을 보며 자란 그였고, ‘두텁떡에 쓰일 거피팥의 수분을 날리기 위해 솥 앞에 서서 몇 시간이고 팥을 볶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가슴에 맺혀 떡집을 이어받기로 결심한 그였다. 노동량에 비해 보상은 보잘것없는 이 일을 제대로 세우는 것이 그의 단 하나의 목표였다. 좀처럼 뜻이 머물지 않는 대학 공부는 제쳐두고, 군 제대 후 바로 떡집에 나와 새벽 3~4시부터 종일 일을 배웠다. 그렇게 그가 뿌리를 내린 떡집은 그의 시야 안에 온전히 들어온 세상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동안 무엇이 가장 힘들었나요?” “가족과 24시간 붙어 있으니 사소한 걸로 다투기도 해서 그 정도가 힘든 거지 다른 건 없어요.” “이제 떡집 일도 틀이 잡힌 것 같은데 그게 매일같이 반복되면 마음이 느슨해지거나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어요.” “떡집 운영하면서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간 부분은 없나요? 삶의 만족도가 떨어졌다든지.” “아, 일하느라요? 그런 건 없어요. 쉴 땐 쉬고, 가족 여행도 자주 다니고 단합이 잘 돼요.” “앞으로 어떻게 운영해야겠다는 계획이 있어요?” “그런 건 딱히 없어요. 그냥 하던 대로 매일매일 해가는 거죠.” 자신의 직업을 미화하려는 의지가 조금도 없는 그의 답은 초지일관했다. 각종 매체에 꾸준히 노출되며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베이커리와 컬래버레이션하여 개발한 새 메뉴라든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디저트 카페 같은 청사진은 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보다 중요한 떡에 집중하기 위해 메뉴를 더 줄일 수 있다고도 했다. 그의 대답 속에서 계속 허전함을 느끼던 질문자는 그제야 질문하는 자신의 마음을 다시 들여다봤다. 모름지기 ‘대를 잇는 가게’의 젊은 주인장이라면 전통을 재해석하거나 혁신해야 한다고 미리부터 단정한 것은 아니었는지…. 그러자 비로소 놀라울 것 없는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이 밀려들었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하루를 떡집에서 시작하고 떡집에서 끝내는 일상. 주문이 넘치면 넘치는 만큼 일을 더 하고, 떡이 빨리 팔리면 한 뼘만큼 가벼워진 마음으로 가게 문을 닫는 삶. 다른 직업인의 인생과 내 삶의 오늘을 함부로 견주지 않는 태도. 먼 미래를 향해 뛰어가는 걸음에 조급해하기보다 오늘을 완성한 뒤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내일을 같은 마음으로 걸어 나가려는 자세. 그런 삶이 흘러가는 가게의 반들반들한 나무문을 열고 나오자 무언가 길가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세상 어느 골목마다 살아 있었지만,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던 꾸준한 일상의 가치가. 별것 아니면서도 한순간 젖어들면 때론 아름답기까지 한 평범한 삶의 지치지 않는 리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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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rdian of Heritage 2020 SPRING 331

느림의 맛을 지킨다 정성과 시간이 이루어 내는 발효 과정은 한국 전통 음식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깊고 오묘한 맛으로 상징되는 발효 음식 중에서도 간장은 요리의 기본인 까닭에 더욱 중요하다. 360년 동안 씨간장을 지켜 온 집안이 있다. 그 책임은 대를 이어 오롯이 종부의 몫이다. “별것도 없는데 이 먼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했어요.” 종가의 며느리다운 단아한 너그러운 모습의 기순도(Ki Soon-do 奇順度) 명인의 말에 구수한 된장 맛이 묻어났다. 살포시 웃는 그의 뒤를 백구가 졸졸 따라다니며 손님을 함께 맞았다. 그는 지난 48년 동안 한결같이 전통 장을 만들어 왔다. 그 공을 인정받아 2008년 제35호 대한민국 전통식품 명인에 지정됐다. 명인은 20년 이상 한 분야의 식품에 정진했거나 기존 명인에게 5년 이상 전수 교육을 받은 다음 10년 이상 동종 업계에 종사한 이들에게 농림축산식품부가 심사를 통해 주는 명예 칭호다. 그는 5년 이상 숙성한 간장인 ‘진장(陳醬) 제조 가공’분야에서 명인의 자격을 얻었다. 그가 만든 간장엔 무슨 비밀이 숨어 있는 걸까?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인 전남 담양군 창평면 그의 집 너른 마당엔 장독 1200여 개가 잘 훈련된 군인들처럼 도열해 있다. 그 많은 독 속에 여러 단계의 숙성 과정에 있는 갖가지 장이 익어 가고 있었다. “냄새 한번 맡아 보시겠어요?” 그가 소매를 잡아끌었다. 뚜껑을 열어 코를 가까이 대봤더니 묘한 향이 났다. 발효 식품 특유의 쿰쿰한 향이 났지만, 특이하게 달콤한 냄새도 섞여 있었다. 그가 만드는 간장은 청장, 중간장, 진장 세 가지다. 청장은 숙성 기간이 1년 이내로 연한 것이 특징이고 주로 콩나물국이나 오이냉국 같은 맑은 국을 만들 때 넣는다. 숙성 기간이 5년 이하인 중간장은 짭조름하고 색이 짙은데 불고기나 장조림 등의 양념으로 쓰인다. 가장 진한 진장은 육포나 약과 등을 만들 때 쓰며 숙성 기간은 5년 이상이다. 노란 햇콩을 푹 삶아 메주를 쑤어 볏짚 위에서 발효시킨 다음 물과 소금을 넣고 담근 장에서 간장을 걸러내면 된장이 된다. “콩을 삶는 날엔 부정 타지 않도록 목욕재계부터 해요. 아무리 가까운 분이라도 상갓집엔 안 가고요. 그만큼 몸과 마음을 다해 정성을 들이는 거죠. 장의 기초를 만드는 일은 신성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전라남도 담양군에 있는 기순도(Ki Soon-do 奇順度) 간장 명인의 집 마당에는 1200여 개의 장독이 늘어서 있어 장관을 이룬다. 그는 48년 동안 전통적인 방법으로 정성껏 장을 만들어 왔으며, 그 공로와 장맛을 인정받아 2008년 제35호 대한민국 전통식품 명인에 지정됐다. 몸과 마음을 다하는 정성 기순도 명인의 오랜 노고와 정성은 해외에도 알려졌다. 뉴욕의 에릭 리퍼트(Eric Ripert)와 덴마크 코펜하겐의 르네 레드제피(Rene Redzepi) 같은 세계적 명성의 요리사들이 이곳에 다녀갔다. 2017년 방한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위한 청와대 국빈 만찬에 기 명인의 씨간장이 올랐고, 300여 년 이어온 씨간장의 내력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저는 죽염으로 장을 담그죠. 콩도 100% 국산입니다. 씨간장도 잘 간직하고 있어요. 매년 가장 좋은 간장을 씨간장독에 줄어든 만큼 부어요.” 그에게 ‘기순도 장’의 비법을 더 물었더니, 장의 기본인 물은 167m 아래 있는 지하수를 끌어올려 사용하고 죽염 재료인 대나무도 담양산으로만 쓴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의 집이 있는 담양은 본래 질 좋은 대나무가 생산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재료가 탁월하니 맛이 좋을 수밖에 없지만, 기술이 부족하면 완성도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는 죽염도 시중에서 파는 것과는 다르다고 했다. “서해안에서 생산한 천일염을 700도 이상 뜨거워진 황토 가마에서 3박 4일 동안 아홉 번을 구워서 만든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설명에서 깊은 자부심이 느껴졌다. “음력 11월 동짓달에 콩을 삶아서 메주를 만들어요. 한 달간 발효시킨 다음 음력 1월15일 정월대보름에 장을 담급니다. 장 담그기는 날 잡는 게 중요하죠. 연습은 없어요. 1년에 딱 한 번 담근 장이 그해 밥상 맛을 좌우하는 거죠.” 그는 발효실도 황토로 지었다. 황토는 메주 특유의 쿰쿰한 냄새를 없애주고 그의 장에서 달콤한 향이 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음식의 간을 맞출 때 사용하는 간장은 한국 요리의 기본이다. 예전에는 간장 담그는 일이 각 가정의 중요한 연중행사였고, 집집마다 조금씩 다른 고유의 간장 맛을 귀하게 여겼다. 지금은 대부분의 가정에서 시판되는 간장을 사 먹는다. 종가의 내림음식 “배고프죠? 자, 이것 드셔 보세요. 설탕은 거의 안 넣은 거랍니다.” 그가 당근정과와 도라지정과, 약과가 담긴 작은 소반을 내왔다. 그는 장뿐만 아니라 전통 음식에 두루 남다른 솜씨로 이름이 높다. 과연 끈적이는 도라지정과를 한입 베어 먹으니 입 안에 천국이 펼쳐졌다. 달콤하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조차 없는 우아한 맛이었다. 도라지정과의 단맛은 뒤따르는 쌉쌀한 맛으로 완성됐다. 약과는 바삭하지도, 아삭하지도 않은 식감이 매력적이었다. 이 단맛의 비결도 궁금했는데, 편하자고 물엿을 쓰면 제대로 된 맛이 나지 않기 때문에 번거로워도 전통 방식대로 조청을 만들어 사용한다고 했다. 목이 마른 것을 알았는지 그가 식혜를 내놓았다. 식혜 역시 그동안 익히 마셔 왔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덜 달고, 밥알이 많았다. “밥알이 많아야 단맛이 진하게 나지요. 본래 단맛은 밥에서 나는 거예요. 엿기름도 새싹을 틔워 만들었어요.” 그는 장흥 고 씨 양진재(養眞齋) 문중의 10대 종부다. 종부는 한 문중에서 맏이로만 이어 온 큰집인 종가의 맏며느리를 말하며, 종가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의무이다. 그 전통 중엔 물론 음식 문화도 있다. 그 집안만의 레시피가 전승돼 오기 때문에 각 종가마다 내림음식이 다르다. 또한 종가 음식은 그 지역 식재료를 최대한 활용한다는 점에서 고품질의 신토불이 음식이기도 하다. 이 집안의 대표적 내림음식으로 우엉들깨탕, 죽순전, 간장 김치, 백일주(百日酒)가 꼽힌다. 우엉들깨탕은 우엉, 버섯, 양파 등을 어슷하게 썰어 들기름에 볶은 다음 물을 붓고 끓이다가 들깨를 곱게 간 즙과 파, 마늘을 넣고 더 끓여 낸다. 슴슴한 맛이 일품인 건강식이다. 재료 본연의 맛이 돋보이는 것은 죽순전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이 종가의 내림음식 중 특이한 것은 매콤한 김치에 젓갈 대신 간장이 들어간 간장 김치다. 요즘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채식의 진수가 이 집에 있었다. 기 명인은 본래 근엄한 종가의 며느리가 될 생각은 없었다. 담양에서 차로 40여 분 걸리는 고향 곡성에서 1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조선 시대 양반집 가풍을 이어 온 친정 부모님으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한 막내딸이라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힌 적이 없었는데, 어쩌다가 집안 대소사가 많은 종갓집 종부가 되었다고 했다. 스물셋 나이에 시집 온 그는 1년에 30번 넘게 제사를 지내야 했다. 제사를 치르고 돌아서면 또다시 제삿날이 찾아오는 분주한 일상 속에 시어머니를 도와 장을 담갔다. 그는 그것을 운명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시어머니가 살아계실 당시엔 독이 50개 정도 있었죠. 장을 만들기만 하면 사람들이 와서 퍼 갔어요. 그만큼 맛이 좋았어요.” 장맛이 좋다고 소문이 나면서 종부의 장 담그기는 사업으로 이어졌다. “남편은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수행자의 길을 걷기를 원했어요. 하지만 종가에선 어림없는 일이죠. 아들을 낳아 집안의 대를 잇는 게 종손의 가장 큰 책임이니 결국 자신의 길을 포기했죠.” 기순도 명인이 메주를 말리기 위해 짚으로 묶고 있다. 장맛을 좌우하는 핵심 재료인 메주는 보통 초겨울에 만들기 시작한다. 노란 콩을 삶아 찧은 뒤 네모나게 빚어 따뜻한 곳에 두면 곰팡이가 생기면서 발효되고, 이것을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매달아 말리면 메주가 완성된다. 느리게 더 느리게 남편 고갑석(高甲錫) 씨가 10여 년 전 작고한 후 종가를 지키고 가풍을 잇는 일 모두가 온전히 기 명인 혼자의 몫이 되었다. 그 노력의 결과는 외국에서도 빛났다. 그의 장은 파리에 있는 르 봉 마르셰(Le Bon Marché) 백화점에 진출했고, 세계 3대 음식 박람회 중 하나인 파리 식품 박람회에도 초대되어 행사를 치렀다. 2019년엔 한국관광공사와 전라남도종가회가 공동 진행한 ‘남도종가보물투어’에도 참여했다. 이렇게만 보면 그의 삶이 탄탄대로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명문대에서 가업인 간장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은 둘째 아들이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기 명인은 자신을 추슬렀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전통 장이었다. 그의 솜씨로 운영해 가는 고려전통식품은 전통 장뿐 아니라 요즘 생활 양식에 맞도록 개량한 장 종류, 그리고 장을 기반으로 한 밑반찬들을 판매하고 있다. 그는 ‘빨리 더 빨리’가 시대의 화두가 되어 버린 지금 ‘느리게 더 느리게’ 만드는 우리 장을 보존하는 일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사명이라 생각하고 있다. “다른 이들이 만든 장과 제 장이 다르지 않다면 굳이 제가 만들 필요는 없죠.” 상업적인 유혹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그의 다짐을 뒤로하고 고택을 떠났다. 이번에도 백구가 기 명인과 함께 배웅했다. “음력 11월 동짓달에 콩을 삶아서 메주를 만들어요. 한 달간 발효시킨 다음 음력 1월15일 정월대보름에 장을 담급니다. 장 담그기는 날 잡는 게 중요하죠. 연습은 없어요. 1년에 딱 한 번 담근 장이 그해 밥상 맛을 좌우하는 거죠.” 장흥 고 씨 양진재(養眞齋) 문중의 대표적 내림음식인 우엉들깨탕은 담근 지 2년 이상 5년 미만인 중간장으로 간을 맞춰야 제맛이 난다. 우엉, 버섯, 양파를 어슷하게 썰어 들기름에 볶은 뒤 물을 붓고 끓이다가 들깨즙과 파, 마늘로 양념을 해서 끓여 먹는 건강식이다. 기순도 전통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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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rdian of Heritage 2019 WINTER 346

학을 닮은 선비의 춤 학의 동작을 형상화한 부산 동래 지역의 학춤은 조선 시대 선비의 고고한 기품이 어려 있는 민속춤 가운데 하나다. 유래나 발생 시기에 대해서는 문헌으로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기존에 전승되어 오던 춤들이 변형되어 발전한 것으로 추측된다.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동래학춤은 자유분방한 즉흥성이 특징이다. 적게는 3명부터 많게는 수십 명이 군무로 추는 동래학춤은 선비의 고고한 정신을 학의 움직임을 빌려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 이성훈 제공 현재의 동래는 부산의 구 단위 행정구역 중 하나일 뿐이지만, 조선 시대(1392~1910)에는 지방의 행정 중심지이자 흥과 멋이 흐르던 예인의 고장이었다. 동래관아 옆에 기생을 양성하는 기관이 있어 풍류객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유명한 천연 온천이 있어 놀이 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음력 정월 대보름 전후로 이곳에서 펼쳐지는 탈춤인 동래야류에는 춤꾼들의 춤사위가 빠지지 않았는데, 어느 날 양반 옷을 입고 덧배기춤(경상도 지역에서 추는 주술적 의미가 담긴 탈춤)을 추는 이가 나타났다. 구경꾼들이 그 모습을 보고 “마치 학이 춤을 추는 것 같다”며 감탄했고, 그것이 곧 동래학춤의 시초가 되었다. 동래학춤의 유래에 대해 이성훈(Lee Seong-hune 李惺薰) 씨가 요약한 이 내용은 온전한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춤이 시작된 시기에 대한 답변도 그러할지 모른다. “동래학춤은 민속무입니다. 그래서 이 춤의 유래나 발생 시기 또한 문헌에 남아 있는 내용이 아니라, 동래 지방 어른들의 구술을 통해 더듬어 볼 수밖에 없어요. 무형문화재엔 원형이라는 개념이 없잖아요. 원형이 없으면 많이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우리 문화가 말살됐던 일제강점기 때 동래야류가 금지 당했으니, 그 즈음에 다른 뭔가를 추고 있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이성훈 씨는 고정 춤사위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즉흥춤이야말로 동래학춤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 한국문화재재단 시작과 원형이 어떻든 현재 전승되는 춤의 모양새로만 보면 학춤은 영남 덧배기춤에 학의 움직임이 더해진 형태다. 그런데 선비의 의복을 갖추고 선비와 학의 모습을 오가는 춤이건만, 정작 춤을 추던 이는 선비가 아니었다. 선비정신을 담아 내다 시작과 원형이 어떻든 현재 전승되는 춤의 모양새로만 보면 학춤은 영남 덧배기춤에 학의 움직임이 더해진 형태다. 그런데 선비의 의복을 갖추고 선비와 학의 모습을 오가는 춤이건만, 정작 춤을 추던 이는 선비가 아니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글 공부만 했지 결코 춤을 추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학춤에는 선비정신이 담겨 있는데, 학문과 덕행을 갖춘 선비의 고결한 인품과 자태가 학의 고고하고 우아한 멋과 닮았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선비정신을 지향하는 마음으로 학춤을 추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시작은 독무였다지만, 지금은 적게는 3명부터 많게는 수십 명이 군무로 선보인다. 대략 14분 30초로 구성되는 동래학춤 무대에선 13가지 고정 춤사위가 등장한다. 이 씨는 동래학춤의 백미가 배김사위라 했다. 한쪽 발을 뻗어 큰 동작으로 출렁거리듯 몸을 구르는 신명나는 동작을 가리킨다. 이 외에도 학이 가볍게 나는 듯 양손을 어깨 위로 올려 도포자락을 너울거리며 뛰어다니는 사위도 있고, 학이 모이를 찾아 움직이듯 양팔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가 허리에 다시 내려 얹으면서 상체를 숙여 좌우를 훑어보는 사위도 있다. 학춤의 동작은 언뜻 보기엔 단순한 것 같지만, 그 또한 숙련되지 않고서는 쉽게 할 수 없다. “우리 전통 무용은 발뒤꿈치로 바닥을 짚고 서양의 발레는 발가락으로 짚지만, 학춤은 발을 수평으로 짚습니다. 터벅터벅 눈밭을 걸으며 굴신(屈伸)면서도 기분은 우쭐거리는 느낌으로 춰야 하죠.” 가장 큰 어려움은 호흡이다. 가령 호흡의 단계가 1에서 10까지 있다 할 때 승무나 살풀이춤 같은 전통 춤은 대략 4에서 7정도까지의 호흡을 유지하면서 끌고 간다. 그런데 학춤은 호흡을 2까지 떨어트렸다가 8까지 끌어올리면서 춘다. 한마디로 기복이 심하다. 동래학춤의 또 다른 멋은 고정 춤사위 사이로 펼쳐지는 즉흥성에 있다. 현장 상황, 무대 구성, 춤꾼의 인원수에 어울리는 춤사위를 개인의 역량과 흥에 맞게 분방하고도 절도 있게 소화하는 시간이다. “저는 ‘자유춤’이 아닌 ‘즉흥춤’이란 용어를 써요. 자유춤이라는 말에는 춤을 조금 낮춰 보는 느낌이 나서요. 비슷한 표현이라도 그렇게 규정하면 춤추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달라지니까요. 즉흥춤이 있기에 동래학춤 무대에서는 예술미와 자연미의 조화를 이루는 격조 높은 춤사위가 표현될 수 있는 거죠.” 2019년 9월 6일 경기도 오산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린 공연에서 동래학춤 군무가 펼쳐지고 있다. ⓒ 한국문화재재단 구음과 어우러지다 동래학춤은 꽹과리, 징, 장구, 북 등 사물의 반주와 함께한다. 한국의 다른 민속무들과 달리 여기에 특별히 추가되는 것이 구음, 즉 입으로 내는 음이다. 가야금, 아쟁, 해금 등 악기 소리를 흉내낸 소리, 소리꾼이 입으로 모은 자연의 소리, 소리꾼 고유의 소리가 혼재된 음이다. 이성훈 씨가 말했다. “나는 춤출 때 구음 듣고 나가요. 중심을 잡는 꽹과리가 있지만 사람 소리엔 감정이 있잖아요. 구음이 좋으면 추는 사람이 감정 잡기가 쉽습니다. 사물 반주는 구음 밑에 깔면서 가는 거죠. 또 구음은 사물 중에서 튀는 소리를 눌러줄 수도 있어요.” 구음 소리꾼이 내는 소리는 의미가 있거나 형태가 짜인 말이 아니지만, 구음 소리꾼은 학춤 사위를 목소리로 딛고 지나며 소리를 무대의 적재적소에 채워 놓는다. 그러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성훈 보유자와 짝을 이뤄 학춤 무대를 꾸리는 구음 이수자 김신영(Kim Sin- yeong 金神永) 씨가 말한다. “취미로 소리를 배우다가 구음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스승을 만났어요. 선생님의 소리가 그간 접해 왔던 소리와 굉장히 다르면서도 뭔지 모르게 사람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아쉽게도 선생님에게 직접 배우진 못했어요. 선생님 공연 따라다니면서 구음하시는 걸 들었고, 구음 이외의 다른 소리도 많이 접했죠. 서도소리, 남도소리, 경기소리 어떤 소리든 다 접해 봐야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소리를 찾을 수 있거든요. 그러다 이 춤엔 이런 구음이, 저 춤엔 저런 구음이 좋겠다는 걸 경험을 통해 내 안에 쌓아갔어요.” 그래서 구음은 ‘배운다’는 말보다 ‘체득한다’는 말이 어울린다. 동래학춤은 판소리나 민요 등과 달리 영감을 얻을 수 있는 뚜렷한 이야기도 없다. 소리가 기댈 것은 춤뿐이다. 그래서 김 씨는 “소리꾼이 춤을 잘 알수록 구음도 더 잘된다”고 말했다. “구음을 하다 보면 춤이 보일 때가 있고 안 보일 때가 있어요. 안 보인다는 건 소리꾼이 그 춤에 경험이 없다는 거죠. 저는 이성훈 선생님 춤에 소리를 하면 편해요. 편하다는 건 호흡을 오랫동안 맞춰 와서 선생님 스타일이 내 머릿속에 들어 있다는 뜻이에요. 저 부분을 이렇게 가야 되겠다는 게 그려지는 거죠. 그렇게 된지는 얼마 안 됐어요. 그런데 춤은 정말 잘 추는데도 같이 했을 때 불편한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소리가 잘 안 나와요.” 그의 이야기를 이 씨가 가만히 곱씹다가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구음하는 분이 모든 소리를 다 섭렵한 뒤 마지막엔 자신의 가슴 속에서 희로애락이 나와야 돼요. 어렵던 시기, 좋던 시기, 고통스러운 시기 모두가 더해진 자기의 소리가 목구멍을 밀고 나와야 하는 거죠. 소리엔 삶이 투영되기 때문에 스스로를 성찰하는 수양 과정도 중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소리의 정체성을 찾아야지요.” 그 말은 이 씨 자신이 지난 30여 년간 몸에서 춤을 끌어올리며 되뇌던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들른 무용학원을 잊지 못해 부모와 절연하고 집에서 쫓겨나던 15세 어느 날, 무용학원에 10년을 얹혀 살며 뭇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던 젊은 날들, 그리고 근육 부상으로 고생하다 무용에서 전통춤으로 전향하던 그때, 다양한 동래 민속예술을 섭렵하다 마침내 학춤에 안착하던 순간 그 모두가 그의 춤사위에 녹았을 테니 말이다. 이 씨의 속마음을 아는 김 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제 스승은 입으로만 소리 내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같이 엮어서 해야만 된다, 구음도 영혼이 있다 하셨죠. 많이 울어야 되고 많이 연구해야 하고, 온 천지가 우러나야 된다고….” 15세부터 무용학원에서 숙식하며 춤을 배우기 시작한 이성훈 씨는 1980년대 초반 부산시립무용단에서 활동하던 중 동래학춤을 추기 시작했고, 이후 2016년 이 춤의 부산시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동래학춤 구음 이수자 김신영 씨는 돌아가신 스승 유금선(柳錦仙) 명창을 뛰어넘는 자신만의 소리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춤과 소리 춤과 소리로 한 무대에서 숱한 교감을 나누었던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성훈 선생님은 몸집이나 키가 그렇게 크신 분이 아니지만, 무대에서 춤을 다 가지고 가세요. 몸에 학을 가지고 다니신다고 보면 되는 거죠. 춤이 완성에 이르러 가는 것 같아요.” “소리할 때는 춤추는 사람의 성격도 알아야 하거든요. 김신영은 내 못난 성질을 잘 알기 때문에 잘 맞춰 줍니다. 그런데 이제는 돌아가신 스승을 넘어야 합니다. 스승의 소리결을 가지고 온다 하더라도 자기 소리를 내줘야지요. 욕을 먹더라도 과감하게 시도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만 자기 세계가 구축되니까요.” 춤꾼은 소리꾼을 향하고, 소리꾼은 춤꾼을 향하는 그 자리에서 그들의 지향점을 묻는다. 자신의 춤을 자신과 떼어 관망할 수 있게 된 춤꾼의 답은 여유롭다. 무대에 올라 신호가 딱 떨어지면 몰입과 함께 자신만의 환상 세계를 만든다고, 무대에서 춤추는 순간만큼은 무릉도원이라고, 자신은 그 세계 속에서 노력하면서 매년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 자신의 소리를 미처 다 꺼내지 못한 소리꾼의 답은 춤꾼 옆에 조용히 앉은 그의 자세처럼 조금 나지막하다. 구음하는 사람은 반주 역할이기 때문에 최대한 춤에 맞추면서 춤에 꽂혀야 된다고, 춤추는 주인공에게 내가 철저히 몰입될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린다고 말이다. 두 답의 미묘한 차이와 조화를 생각하는 동안, 그들의 상상은 서울 광화문을 천 명의 학춤 무대로 수놓는 장면까지 뻗는다. 선비의 격조를 풀어내는 천 명의 도포자락이 흩날리고 천지가 우러나는 구음이 허공을 흔들 때 세상은 적어도 그들이 춤과 소리를 위해 노력한 만큼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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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rdian of Heritage 2019 AUTUMN 334

대나무에서 뽑은 실로 갓의 테를 짜다 한국 남성의 전통 관모인 갓은 일상에서는 퇴화됐지만 제작 기술과 체계는 여전히 보전되고 있다. 대나무를 삶고 말려 가늘게 쪼개 뽑아낸 실로 갓의 테를 4대째 만들고 있는 모녀를 만나 보았다. 장순자 씨는 갓의 차양을 만드는 일을 자신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아 제주 여성의 오랜 수공예 전통을 지켜 나가고 있다. 그는 뛰어난 솜씨를 인정받아 2000년 국가무형문화재 갓일 양태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갓은 한국의 전통 모자다. 그러나 ‘모자’라는 단어만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 갓은 과거에 일정 신분 이상의 성인 남자가 쓰던 모자였고, 그들은 바깥 출입을 할 때 도포와 갓을 갖춰야 복식의 격이 완성된다고 믿었다. 그뿐일까. 상중인 사람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조상의 묘를 지키지 못할 경우엔 큰 방갓을 써서 감히 하늘을 볼 수 없는 참담한 마음을 대신하기도 했다. 이처럼 갓은 일상이며 의례인 동시에 신분을 구별하는 도구이자 사상을 담는 그릇이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 말 이후 서구식 의습이 뿌리를 내리며 생활 속의 갓은 그 모든 의미와 함께 사라져갔다. 그리고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옛 물건’으로 남았다. 놀라운 것은 일상에서 사라진 이 물건의 제작 체계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갓은 둥근 차양(양태)을 만드는 일, 가운데 볼록하게 솟은 부분(총모자)을 만드는 일, 그 둘을 조립하여 마감하는 일이 각기 분업화되어 있다. 그리고 각 영역의 제작과 기술 전수가 자체적으로 이뤄지는데, 지금껏 그 분업 체계가 와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국가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에 등록된 기능보유자만 양태장 한 명, 총모자장 한 명, 입자장(笠子匠) 두 명 등 총 네 명이다. 바꿔 말하면 갓은 한 사람의 손에서 온전히 완성될 수도 없고, 한 사람이 완벽에 가까운 성과를 낼지라도 그 결과물은 궁극적으로 불완전한 상태에 그친다. 이 다면적인 물건의 시간을 짚다가 그 속에 삶의 근간을 세운 한 가계를 만났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업을 물려받아 2000년 국가무형문화재 갓일 양태 기능보유자가 된 장순자(張順子), 그리고 3년 전 4대 전승자의 삶을 시작한 장 씨의 딸 양금미(梁錦美) 씨가 그들이다. 이 모녀에게 모계로 이어져온 양태 이야기를 들었다. 쌀과 바꾼 일 “다른 어머니들은 고사리철엔 고사리도 따러 가고 봄에는 바닷가에서 해물도 캐다 먹이는데, 우리 어머니는 죽으나 사나 이것만 했어. 이걸 짜야 쌀을 받아먹는다고. 학교 갔다 와도 어머니 곁에 오질 못하게 해. 멀리 앉아라, 물러나 앉아라…. 입김의 수분이 양태에 밴다고.” 살기 어렵던 시절, 대나무실로 짜는 양태는 제주항 인근 5개 마을 아낙들에게 생활의 젖줄이었다. 물질을 하지 않는 마을 여성들은 양태청이라는 공동 작업장에 모여 양태를 짰다. 그 양태를 배에 실어 육지로 보내면 통영, 예산 등지에서 총모자와 조립해 완성품 갓을 전국에 유통시켰다. 어린 딸의 입김까지 단속하던 장 씨 어머니의 양태는 제주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한동안 대가 끊겼던 국가무형문화재 양태 기능보유자로 장 씨의 어머니가 지정된 것도 오랜 입소문 덕이었다. “어렸을 때 친구들끼리 동네 큰 집에 모여서 놀이처럼 양태를 짰어. 누가 먼저 한도리 돌았나 경쟁하면서 말야. 차양의 동그란 원을 한도리라고 하거든. 양태 바구니를 새벽같이 갖다놓고선 밥 먹고 다시 갔어. 서로 창가에 앉으려고 자리 싸움을 하니까 미리 맡아놓는 거지. 그때는 전깃불이 없었잖아. 양태는 밝은 데서 찬찬하게 해야 되거든.” 장 씨는 젊었을 적엔 사업을 하고 싶었다. “일당 받으며 품팔이 다니지 말고 스스로 노력해서 할 일을 개척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은 인생의 나침반이었다. 그래서 대나무 장사에 도전했다. 양태 만들 대나무를 공급하는 일이었다. 한번 육지로 올라가면 담양의 대밭을 60일씩 누볐다. “20개월 된 분죽 중에서 마디가 넓은 걸로 찾아야 해. 그게 흔치 않았어. 왕대는 마디가 길어서 구하기 쉽지만, 억세서 손을 다칠 수도 있고 실도 가늘게 안 나오거든. 큰 마당이 있는 집을 빌려서 대나무를 마차로 열 대 정도는 실어왔지. 그걸 마디 하나하나 톱으로 잘랐어. 잘못 하다간 실 나오는 줄기를 막아서 실을 못 뽑으니 자르는 것도 기술이었지. 에휴, 지금 생각하면 못할 일 많이 했지. 그래도 11년 동안 돈은 많이 벌었어.” 이후 감귤 장사로 더 큰 돈을 벌다가 양태일을 이어받기로 한 것은 그의 나이 마흔 셋 되던 해였다. 양태 작업의 핵심이 대를 다뤄 실을 얻는 과정이었기에, 대만 보고 만지던 거친 세월이 약이 되었다. 양잿물과 재를 넣어 이틀간 삶고 말린 대에 칼금을 내고 얼마나 가늘게 뽑아내는지가 실 만들기의 핵심이었다. 그는 약 1센티미터 너비로 깎아낸 대에서 50~70가닥의 실을 뽑는다고 했다. 굵기 별로 열여덟 종류의 실을 뽑는데 머리카락보다 가는 실도 있다. 장순자 씨와 그의 일을 이어받은 딸 양금미 씨가 대나무실을 만들고 있다. 양잿물과 재를 넣어 이틀간 삶고 말린 대를 약 1센티미터 너비로 깎아낸 대에서 50~70가닥의 실을 뽑아 낸다. 양태는 원형으로 된 판에 살대를 둥글게 펼친 다음 가장 가는 대나무실을 네 올씩 꼬아 가며 중심으로부터 가장자리를 향해 엮어 나간다. 가장자리로 갈수록 실의 굵기가 조금씩 굵어지며 섬세한 균형을 이룬다. 머리카락보다 가는 대나무 실 “칼금을 낸다지만 그게 눈에 보이질 않으니 손의 감각으로 하는 거지. 하고 나면 손이 험악해져. 그런데 하는 동안에는 몰라. 대 끝에만 집중하니까.” 두껍게 변형된 손톱, 지문이 닳아나간 손끝으로 그는 실을 엮는다. 원형의 나무판에 놓고 네 올씩 엮어가는 기술은 대단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공간의 크기를 읽어야 하고 그에 맞춰 굵기가 다른 실을 적절히 운용해야 하는 일이다. 총모자에 가까운 좁은 공간 쪽엔 가장 가는 실을 쓰고, 공간이 헐렁한 바깥으로 갈수록 굵은 실을 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열여덟 종류의 실 약 300~500올을 사용해 하나의 갓을 완성하는 동안 깨지면 안 될 것이 바로 균형인 것이다. “양태가 얼마나 넓고 촘촘하게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갓의 품위와 위용이 결정된다”고 곁에 있던 딸 양금미 씨가 얘기를 거들었다. 촘촘한 양태에 걸러진 햇빛이 착용자의 얼굴에 은은하고도 옅은 그림자를 드리울 때 갓의 고유한 품위와 아름다움을 새삼 실감하는 법이다. 양 씨가 덧붙였다. “입자장이 대나무로 짠 양태, 말총으로 짠 총모자를 조립할 때 대나무실이나 명주실을 댄다거나 명주천을 한 번 덧씌우거든요. 이렇게 섬세하게 작업된 모자는 전 세계적으로도 드물 거예요. 요즈음 영화나 여러 영상 매체에서 접하는 갓은 대부분이 모형인데 그것들과는 전혀 달라요.” 두껍게 변형된 손톱, 지문이 닳아나간 손끝으로 그는 실을 엮는다. 원형의 나무판에 놓고 네 올씩 엮어가는 기술은 대단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공간의 크기를 읽어야 하고 그에 맞춰 굵기가 다른 실을 적절히 운용해야 하는 일이다. 전시관에 인생을 담다 이야기 사이 짧은 침묵이 지날 때마다 장 씨의 말머리가 자꾸 흘러가는 곳이 있었다. 2009년 지은 갓 전시관 얘기였다. “도청에서는 양태가 문화재로서 가치가 없다고 하길래 직접 문화재청에 찾아가서 예산 8억 9천만 원을 지원받았지. 아무 데나 못 짓는다 해서 과수원 3천 평 판 돈으로 부지 800평을 사서 제주도에 기부채납한 거야. 짓기까지 무시도 많이 당하고 고생도 많았지.” 전시관은 그의 돈과 기억, 신념, 그리고 세월까지 모두 모인 곳이었다. “동네에서 이장을 할까, 도의원에 도전해 볼까 망설일 때 문화재청에서 어머니한테 후계자 세우라고 재촉하는 거야. 고민이 됐지. 이게 고독하게 혼자 하는 작업이잖아. 생각 끝에 보람 있는 일을 해야겠다 맘먹었어. 작품 꾸준히 만들면서 십수 년을 기다렸고, 62세에 보유자가 되면서 뭐라도 역사에 남겨야겠다 싶어서 전시관을 가슴에 품었어. 그때부터 돈을 아끼기 시작했지.” 일생을 전시관 안팎에 담으려는 팔순의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옆에는 자신의 대를 이어 양태로 새 삶을 시작한 딸이 있었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서울에서 디자이너로 생활하던 양금미 씨는 어머니의 끈질긴 설득 끝에 직장을 그만두고 3년 전 귀향했다. “살면서 이 일을 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자식들 중 누군가는 받아야 할 일이었지만, 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 일이 저한테 온 거예요. 가정이 없어서 시간이 많다는 이유가 컸죠. 아직은 책임감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밀감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전승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아요. 갓의 수요요? 수요라고 해봤자 1년에 몇 채 안되고, 세 장인이 같이 만드니 가격도 한 채에 천만 원이 넘어가거든요.” 하지만 그는 4대 전승자로서의 역할과 위치를 누구보다 잘 안다. 가늘고 잘 부러지는 대나무실의 내구성을 강화해 상품화하려는 시도는 물론, 양태 기법과 소재를 현대화시키는 연구를 틈틈이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온전한 제주 갓을 완성해서 완성에 대한 숙명적 갈증을 풀고 싶다고도 했다. 얘기를 들으며 딸의 맑은 성정과 능력을 거듭 논하던 장 씨가 말했다. 내가 작품도 충분히 준비해 놓고 길 다 닦아놨기 때문에 너는 놀지 말고 네 작품만 만들면 된다고. 딸이 웃으며 되묻는다. 엄마는 내가 희생하는 부분은 생각지 않느냐고. 어머니 역시 웃으며 농담을 섞는다. 희생일 수도 있는데 내가 봤을 땐 누워서 떡먹기라고. 다정한 모녀가 서로의 입장을 내세우며 투닥댄다. 그 끝에 장 씨가 하는 말. “직장 다니면 언젠가는 퇴직할 거 아냐. 그래서 이 기술을 배워서 보유자 길을 걸어가고, 같은 인생 살더라도 사람답게 살라는 거지. 난 딸 불러들여서 이걸 이어갈 수 있게 한 것이 너무 자랑스럽고 스스로도 잘했다 칭찬해. 내가 죽으면 딸이 완전히 맡으니까 나는 손뼉치고 가는 거야.” 그가 전시관 내부를 설명해 주며 관람자의 속내를 스리슬쩍 들춘다. 전시관이 이만하면 괜찮은 편이냐고, 사람들이 보러올 만하냐고. 기대에 모자라지 않을 답을 그에게 남기며 생각했다.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보전하려는 욕망과 의지에 대하여, 그것을 기꺼이 안고 사는 ‘대물림’이라는 숭고하고도 무거운 단어에 대하여. 조선 시대 성인 남자들이 외출할 때 썼던 갓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었는데, 특히 갓을 고정시키기 위해 묶는 갓끈은 호박이나 산호 같은 보석으로 장식해 아름다움을 더 했다. 갓은 역사 드라마에서 남성들의 아름다움과 품위를 더해 주는 의상으로 큰 역할을 한다. 특히 섬세하게 잘 짜여진 양태는 얼굴에 은은한 그림자를 드리워 격조를 높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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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rdian of Heritage 2019 SUMMER 246

물, 불, 공기로 호미를 만드는 대장장이 몇 개의 산맥이 만나 굽이치는 고원부지의 작은 도시 영주에서 반세기 동안 대장장이 외길을 걸어 온 석노기(昔魯基) 씨. 그의 수제 호미가 최근 아마존, 이베이 등 해외 인터넷 사이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서양의 모종삽과 달리 ‘ㄱ’자 모양의 날을 가진 호미가 훨씬 쓸모가 많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경상북도 영주에 있는 ‘영주대장간’ 주인 석노기 씨가 달군 쇠를 망치로 두들겨 호미 날을 만들고 있다. 열네 살부터 대장간 일을 시작한 석 씨는 스물세 살이 되던 해 영주역 근처에 이 대장간을 마련하여 지금까지 43년 동안 운영해 오고 있다 “처음엔 아마존으로 많이 나간다기에 아마존 정글에서 우리나라 아주머니들이 단체로 호미질을 하나보다 했어.” 석노기 씨가 아는 아마존은 ‘열대우림’이 전부였다. 자신의 호미가 아마존닷컴 가드닝 부분 톱 10에 이름을 올리고 아마존 선정 제품(Amazon’s choice)으로 꼽힌 후에야 그는 열대우림보다 더 넓고 깊은 아마존을 알게 됐다. 또 그곳을 통해 작년에만 자신의 대장간에서 만든 호미 2,000여 개가 전 세계로 흩어졌다는 것도. 그는 ‘영주대장간’ 로고가 박힌 호미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 일이 얼마나 파격적인 ‘사건’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는 얼굴이었다. “외국에서는 집집마다 정원을 가꾸는데, 모종삽이나 갈퀴처럼 긁는 것만 있고 호미처럼 ‘ㄱ’자로 구부러진 도구 자체가 없다네. 그래서 호미가 편했던가 봐. 모종삽처럼 흙이 날 위에 붙지도 않고, 힘을 조금만 줘도 땅을 일굴 수 있으니까.” 석노기 씨가 만든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호미들. 손님의 요구 사항에 맞춰 호미 형태를 수선해 주는 일도 잦다. ‘한국형 원예 도구’ 한국의 호미가 나라 밖으로 나가 어떤 나라의 흙을 고르고 있다는 이야기는, 적어도 어머니의 호미 쥔 손을 기억하는 세대에겐 감탄사로만 넘길 수 없는 이야기다. 호미는 손으로 논밭을 일궜던 이 땅 모든 농가의 필수품이었다. 이른 아침 논밭에 나간 우리네 어머니는 날이 이슥해지기 전까지 호미를 놓지 않았다. 호미로 흙밥을 뒤집어 그해의 곡식을 심었고, 그 곡식의 성장을 가로막는 잡초도 솎았다. 땅 깊이 박은 날 끝으로 작물을 캤고, 흙을 살살 다스려 밭이랑을 파거나 덮기도 했다. 호미질은 가슴과 등을 꼿꼿이 펴고선 할 수 없는 일이다. 호미를 들고 흙을 마주한다는 것은 힘 뺀 몸을 숙여 대지로 향하는 일이다. 어머니의 구부린 등선은 호미의 목선을 닮았다. 굽은 듯 일으키지 못한 듯 애처로운 어떤 둥긂. 그 둥긂이 땅을 쉼 없이 고른다는 생각만으로 일어나는 어떤 종류의 감정이 있다. 그래서 ‘호미 장인’으로 알려진 52년 차 대장장이를 대하는 마음은 대장간에 이르기 전부터 어렵고 복잡했다. 그는 호미에서 무엇을 볼까. 호미를 두드려 만들며 다져가는 생각이란 어떤 것일까. 물, 불, 공기, 쇠와 고루 마음을 통해야만 호미 한 자루를 내어 놓을 수 있는 대장장이의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사람마다 다른 호미의 쓸모 “이대로 쓰면 흙이 앞으로 엎어질 거 같은데…. 가운데를 이래 쫌 펴 주면 안 돼요? 끝도 뾔족하이 날려주시고요.” 대장간 선반에서 호미를 골라 이리 보고 저리 돌려 보던 손님이 석 씨에게 물었다. 불룩한 삼각형 날 가운데를 조금 더 눕히고 날 끝을 조금 더 뾰족하게 세워 달라는 주문이었다. 석 씨는 익숙한 일인 양 호미를 받아들고 화덕 앞으로 갔다. 불을 지피고 풀무를 돌려 바람길을 여니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불꽃을 한참 바라보던 그가 호미를 화덕에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 “사람마다 도구를 사용하는 습관이 다르잖아. 같은 호미로 같은 땅을 찍어 당겨도 흙밥이 다르게 뒤집어지겠지. 그래서 자기 스타일에 맞게 새 물건을 이렇게 수선해 가기도 해. 여긴 만들어진 물건을 팔기만 하는 철물점과는 다른 데니까.” 화덕을 응시하던 그의 눈빛이 잠시 변하는 것 같더니, 그의 손은 이내 집게를 들어 호미를 꺼냈다. 벌겋게 익은 쇠의 모습이 쇳덩이 속에 이글대는 불을 가둔 것 같았다. 그는 그것을 모루 위에 올리곤 이리저리 방향을 틀면서 메(쇠 토막에 자루를 박은 도구)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탕탕탕 쇠가 쇠를 치는 울림이 퍼졌고, 쇳가루를 안은 불꽃들이 자잘하게 튀었다. 쇠에 들어온 붉은빛이 서서히 옅어지는 동안 호미의 외형이 미세하게 변해 갔고, 손님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찰나의 기술 불과 쇠가 얽혀 드는 시간은 묘한 몰입을 부르는 시간이었다. 그는 이번엔 주먹만 한 작은 쇳덩이를 화덕에 넣고 다시 불꽃을 바라봤다. 쇠가 녹는 온도는 섭씨 1500도 내외. 대장장이라면 쇠가 녹기 전 변형이 자유로워지는 어떤 찰나를 알아차려야 했고, 온도계가 없는 오래된 화덕의 온도를 읽는 수단은 오로지 감각뿐이었다. “불이 달궈지는 색깔로 쇠를 알지. 아직 불그스름하면 더 달아야 해. 색깔이 달빛처럼 뻘건하면 야물어서 안 돼. 거기서 약간 햇빛마냥 하얀색이 나올 만큼 시기를 맞추는데, 너무 하얗게 되면 쇠가 물이 되어 버려. 그건 못 쓰는 거지.” 달빛은 붉고 햇빛은 희다는 그의 감각에 생각이 닿기도 전에 메질이 시작됐다. 이번에 쇠를 두드리는 것은 메가 아니라 ‘단조 함마기’다.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상하 운동을 하는 자동 메질 기계. 그는 기계 아래에 달군 쇳덩이를 올려놓고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기계가 찍어 누르는 리듬, 쇳덩이를 요리조리 돌려서 두드리는 면을 확보하는 손의 리듬이 절묘하게 합을 이뤘다. 리듬 속에서 긴 삼각형 형태의 호미 날이 만들어졌고, 엿가락처럼 늘어난 쇠는 날과 자루가 이어지는 긴 선을 이뤘다. 이것을 다시 달구고 때려서 형태와 선을 정교하게 다듬으면 호미 날이 완성된다. “주물 공장에선 정해진 틀에 쇳물을 부어서 물건을 생산하잖아. 대장간은 완전히 달라. 쇠를 직접 달구고 두드리고 늘려서 형태를 잡고 물건을 완성하니까.” 그 ‘두드린다’는 말 속에는 많은 것이 녹아 있다. 불을 통찰하여 쇠를 변형시키는 것을 넘어 바람까지 다루는 일이자, 쇠의 내면을 결정짓는 일이다. “풀무질해서 불을 피우니까 쇠 익힐 때 바람 구멍, 공기 구멍이 생기거든. 두드리면서 그 구멍을 메우는 거야. 그러면서 쇠의 밀도를 고르게 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옛날 대장간에선 수백 번 수천 번씩 두드린 거야. 그런데 나는 기계를 일찍 들여서 메질은 많이 안했어.” 두드림은 쇠에 대한 통찰을 전제한다. 아무리 경험 많은 대장장이라도 생쇠를 눈으로 분간하진 못한다. 두드림과 담금질 “어느 정도 강도가 나오나 불에 넣고 두드려 봐야 그때서야 알게 되는 게 쇠라고. 보기엔 같아 보이는 쇠도 성질이 조금씩 달라. 쌀도 여러 종류가 있듯이. 아주 강하면서 잘 부러지는 쇠가 있어. 반면 강하면서도 잘 안 부러지는 쇠도 있어. 낫이나 가래를 만드는 쇠지.” 그는 호미의 재료로 자동차 판스프링을 사용한다 했다. “난 강철을 써. 보통 대장간 작업하는 사람들은 강철을 잘 안 쓰려 하지. 쇠가 빠닥거리고 빡빡하니까 무른 쇠보다 다루기 힘들거든. 그런데 무른 쇠는 끝이 말려서 안 좋아. 칼날처럼 서야 되는 게 동그랗게 말린다 말이야. 그런 걸 내놓으면 신용을 잃지. 수선하면 안 되냐고? 옛날엔 호미를 무겁고 두껍게 만들었거든. 500g은 됐으니까 끄트머리에 늘려서 수선할 쇠가 있었어. 쇠가 없으면 다른 쇠를 갖다 붙여 가지고도 수선했지. 그런데 요새는 200~300g짜리 가벼운 물건 위주로 만들다 보니까 너무 얇아서 수선하기도 힘들어.” 그는 대장장이에게 물건의 가치가 판가름 나는 단계는 ‘담금질’이라고 했다. 달아오른 쇠 끝을 찬물에 살짝 담갔다가 꺼내는 열처리 단계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담금질을 두고 “냉수로 불이라는 야수를 강철의 감옥에 가둔다”(enfermer par l’eau froide le feu dans le fer , enfermer la bête sauvage qu’est le feu dans la prison d’acier.)고 표현했지만, 그는 말로 다하지 못할 기술이라 했다. 쇠의 성질, 두께, 온도, 상태에 따라 1초 안에 끝내기도 하고 그 이상의 시간을 두기도 한다고 했다. 이는 쇠의 강도를 결정하는 ‘대장간 작업의 꽃’으로 불린 기술이었기에, 그 옛날 대장간에서는 기술자들이 한밤중에 홀로 나와 담금질을 마치기도 했다고 한다. 물이라는 극과 불이라는 극을 절충해 극대를 얻는 작업을 어찌 쉽게 얻을 수 있었을까. 석노기 씨가 화덕에서 호미 날을 꺼낼 때 사용하는 집게(위)와 달군 쇠를 모루 위에 올려 놓고 두드릴 때 사용하는 메(아래)의 사용법을 보여 주고 있다. 대장장이로 살면서 고된 노동을 참고 배겨 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는 그의 말을 휘어진 손가락들이 증명한다. 달아오른 호미 날을 찬물에 담갔다가 꺼내는 담금질은 쇠의 강도를 결정짓기 때문에 오랜 경험과 감각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자신과의 싸움 그가 대장간에 발을 붙인 것은 열네 살 봄이었다. 대장장이 매형의 일을 잠시 도와주러 간 걸음이 시작이었다. 봄에 보리쌀 한 가마니 가져다 먹으면 가을에 장리쌀 한 가마 줘야 하던 어려운 시절이었고, 그는 일한 만큼의 대가를 얻어 가는 직업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장장이의 길은 쉽지 않았다. “대장간에선 쇠가 식기 전에 만지던 작업을 끝내야 돼. 손등에 쇳덩이가 떨어져 데어도 덜어낼 새가 없어. 식으면 처음부터 다시 달궈야 하니까. 열 몇 살에 일 배울 때였어. 쇠가 튀어서 눈에 딱 맞은 거라. 장갑 낀 손을 눈에 살짝 댔다 떼니 피가 흥건히 묻어 나와. 반대쪽 눈을 가리고 보이나 안 보이나 봤어. 보이더라고. 눈 빠진 거 아니니 됐다 하고 마저 일했지.” 가장 넘기 힘든 산은 무엇이었을까. 어려운 기술, 사람, 벌이 — 모든 것을 열어 놓고 물은 질문에 그는 “참고 배겨 내는 것”이라는 답을 했다. “여름 두 달, 아니 딱 한 달만 놀아도 먹고 살 수 있는 팔자였음 좋겠다는 게 내 꿈이었어. 세상 사람들은 다른 일 하고도 밥 잘 먹고 사는데 왜 나만 불 앞에서 이 고생을 하고 살아야 하나 싶었어. 집 한 채 장만한 뒤엔 그런 생각이 커져서 구멍가게에서 담배 팔아서라도 먹고 살자 했어. 그런데 막상 시작하려니까 생활비 벌 자신이 없더라고. 대장간에선 오늘 품값은 벌 자신이 있는데….” 대장장이로 사는 자신과 싸우는 시간은 그리 길었건만, 대장간에 어둠이 드리우는 것은 순간이었다. 농기구 기계화로 수요가 급감하고, 저가의 중국산 농기구까지 밀려들었다. 달아날 곳은 오직 자신의 호미 속뿐이었다. “호미 천 개를 만든다 치면 하나쯤은 미심쩍은 게 섞일 수 있다 생각하잖아. 나는 그걸 인정 못 해. 나한테는 천 분의 일이지만, 소비자한텐 100퍼센트잖아. 호미를 두 개 갖고 쓰는 사람은 없으니까.” 대장간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그는 판로를 개척했다. 모든 작업을 손에 의지하던 그 옛날, 쇠 자르는 기계를 집 한 채 값과 맞바꿔 들인 결단을 기억하며. 그는 인터넷 판매를 도울 지인을 만나 길을 찾았다. “인터넷 판매 시작한 건 10여 년 됐지. 우리 호미가 미국으로 하나씩 가고 있다고 이 사람이 종종 얘기하더라고. 수요가 하나둘 늘고 조금씩 입소문을 타게 되면서 아마존까지 가게 된 거지 하루아침에 이런 일이 생긴 게 아니야. 이젠 호주로도 나간다 하고, 요즘 매일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아. 그런데 주문이 들어와도 생산이 못 따라갈 지경이니…. 일 배우겠다는 젊은 사람이 없어. 두세 분이 일을 도와주시는데, 나이 드신 분들이라 이달에 그만둘지 다음 달에 그만둘지 예측도 못 해. 나도 한 해 한 해 일심이 줄고. 결국 내가 우리나라에서 대장장이로서 마지막 세대가 될 것 같아.” 불과 쇠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며 살아온 그에게서 호미 쥔 어머니를 다시 떠올렸다. 불 품은 쇠를 두드리는 대장장이의 뜨거운 숨, 흙 일구는 호미날을 일 년에 하나씩 닳아 없애는 어머니의 처연한 숨이 차례로 스쳐갔다. 석노기 씨의 호미는 아마존닷컴 가드닝 부분 톱 10에 이름을 올리고, 아마존 선정 제품(Amazon’s choice)으로 꼽힐 만큼 해외에서 인기가 높다. 정직한 일생 그는 뿌듯함과 아쉬움이 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웃다가 지난 삶의 이야기로 접어들었다. “열네 살 이후에 부모 도움 하나 없이 살았고, 43년 전 스물세 살에 여기 이 자리에서 영주대장간 주인이 되었고, 가정 꾸리고 집 장만하고 삼남매 낳아서 모두 4년제 대학 보내 가르쳤고, 여태 살며 부부가 돈 꾸러 남한테 사정하러 안 다녔어. 어려서 못 배웠으니 내가 장관을 하겠어, 의사나 판사를 하겠어. 그런 건 꿈도 안 꿔 봤어. 다만 남보다 앞서가진 못해도 동등하게는 가야 되지 않나, 낙오자는 되지 말아야겠다, 그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왔어. 나는 그렇게 된 걸로 만족해. 한평생 잘 산 것 같아.” 타인의 욕망을 탐하는 삶들로 어두운 이 세상에서 그가 자족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불 앞에 오래 있어서인지 난 시력도 좋아. 이 나이 되도록 아직까지 안경 안 쓴다고.” 불꽃의 힘이 스미어 밝아진 그의 눈동자는 달빛일까, 햇빛일까? 작지만 단단한 체구, 부드럽지만 강직한 얼굴의 그를 바라봤다. 옛 이야기에 몰입하면서 한껏 높아진 목소리엔 쇳소리가 배어 있었고, 호미를 숱하게 매만졌던 손가락은 호미의 목선처럼 굽어 있었다. 불과 쇠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며 살아온 그에게서 호미 쥔 어머니를 다시 떠올렸다. 불 품은 쇠를 두드리는 대장장이의 뜨거운 숨, 흙 일구는 호미날을 일 년에 하나씩 닳아 없애는 어머니의 처연한 숨이 차례로 스쳐갔다. 그 끝에 문득 깨달았다. 농기구들이 나란한 대장간 선반에서 눈길과 마음을 쉽게 거둘 수 없었던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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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rdian of Heritage 2019 SPRING 265

‘무심필’을 향한 집념 서양의 펜이 들어오기 전 동양의 모든 기록과 그림은 붓으로만 쓰고 그려졌다. 붓을 만드는 일은 그래서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작업이었다. 요즘의 쉽고 편한 제작 방식을 외면하고, 고된 옛 방식을 좇고 있는 장인은 자신의 붓을 두고 ‘목숨을 건 붓’이라고 말한다. 유필무 필장이 흰 염소 털로 엮은 붓 끝이 섬세하게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그는 속과 겉을 모두 상질의 천연모로 맨 무심필을 자신의 붓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서예 초심자가 제 붓을 사러 오잖아요? 제가 망설이다가 붓을 판단 말예요. 그러면 늘 후회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이 심각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죠. 주변의 동료는 물론 선생님까지도 다들 ‘이 붓은 잘못 맨 붓’이라 한다고요. 붓 사러 온 사람들 태반을 그냥 돌려보내는 주된 이유가 그거예요.” 유필무(柳弼茂) 필장(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29호 필장 기능보유자)은 자신이 만든 붓과 시중 필방에 유통되는 붓 사이에 명확히 선을 그었다. “시중의 붓 99%가 나일론 털을 동물의 천연모와 함께 섞은 붓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어요. 인조모에다 뻣뻣한 털로 심(心)을 넣어서 만든 붓이죠. 그래서 누구나 금세 다룰 수 있는 그런 붓에 익숙한 사람들 입장에선 제 붓이 생경할 수밖에요.” 심이 없는 붓 인조모를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붓털 속에 뻣뻣한 털을 심은 붓은 허리가 단단하다. 붓이 쉽게 서니 다루기 편하지만, 운필이 단조롭다. 그렇다고 강하고 뻣뻣한 동물의 털 자체가 좋지 않은 재료라는 뜻은 아니다. 붓 중에는 족제비 꼬리털이나 말 꼬리털 등 굳센 털로 만드는 붓이 있는가 하면, 염소 털이나 닭 털처럼 부드러운 털을 이용한 붓도 있고, 강한 털을 속에 넣고 부드러운 털로 그 겉을 감싸는 붓도 있으니 말이다. 경우에 따라 몇 가지, 많게는 열댓 가지 털이 섞인 붓도 제작된다. 사용자의 취향과 용도에 맞춘 선택이 필요할 뿐이다. 다만 유 필장이 제기하는 문제는 이런 것이다. 그는 한국의 붓 문화가 대중적인 붓의 기준에 익숙해지는 현실, 더불어 전통 붓의 원형을 지키고 전승하려는 의지가 점점 희미해지는 현실에 개탄한다. 그는 ‘무심필(無心筆)’이 자신의 붓 작업에서 중심이며, 전통 붓의 핵심도 바로 그것이라 했다. 심이 없는 붓, 즉 속의 털과 겉의 털을 상질의 천연모로 똑같이 몰아 맨 붓을 말한다. “좋은 붓은 4가지 덕목을 가지고 있어요. 붓털의 허리 부분이 굳세고 탄탄해야 하고, 붓 맨 모양이 들쭉날쭉하지 않고 둥그스름해야 하고, 아울러 붓끝이 가지런해야 하고, 뿌리 부분에서 끝으로 갈수록 점진적으로 가늘어지면서 그 끝이 뾰족해야 좋은 붓이죠.” . 유 필장이 10년 동안 구상한 끝에 만들어 낸 목탁 붓은 말 그대로 목탁에 붓을 접목한 작품이다. 그는 더 정성스러운 붓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붓대 제작에도 도전하고 있다. “예부터 문필가들이 붓을 찬할 때 가장 높은 자리에 두고 이야기했던 붓이 무심필이에요. 무심필은 아무리 필력 좋은 사람도 따로 길들이거나 사귀어 놓지 않으면 붓 세우는 것조차 쉽지 않아요. 심이 없어서 마음먹은 대로 운필하기 어렵죠. 다른 각도에서 얘기하면, 붓끝이 예민하면서도 낭창대고 부드러워서 의도하지 않은 표현까지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죠. 그야말로 천변만화하는 효과가 발생해요.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강하다는 얘기가 이렇게 통하는 겁니다.” 그가 붓을 만든 지난 40여 년은 곧 붓털을 통찰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모든 동물의 털을 붓털로 쓸 수 있다고 했다. 붓이 유일한 서사 도구였던 시절엔 구할 수 있는 모든 털로 붓을 만들었다. 족제비 털, 토끼털, 돼지털, 노루 털, 닭 털 등은 물론 사람의 배냇머리까지 재료가 됐다. 하지만 같은 사람의 것이라도 배냇머리를 잘라낸 이후의 머리카락은 붓이 되지 못했다. 붓은 ‘호(毫)’라고 불리는 털의 끝이 섬세하게 살아 있어야 하는데, 가위질에 단면이 생긴 머리카락 끝으로는 뭉뚝한 붓밖에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흔히 사용되는 붓털 재료는 흰 염소 털이다. 염소 몸에는 극세필부터 대필까지 엮을 수 있는 털의 재료가 풍부하다. 예를 들어 염소의 등 털, 발꿈치 털, 수염만 각각 모아서 붓을 매기도 한다. 그는 염소 뒷다리 안쪽의 사타구니 쪽 털을 주로 사용한다고 했다. 그가 가죽에 털이 그대로 붙은 원모를 보여 주며 말했다. “털이 끝 쪽으로 갈수록 맑아지고 투명해지죠? 가늘고 섬세해지거든요. 이런 색을 띠는 것은 내부 조직이 조밀하다는 얘기에요. 가죽에 가까운 뿌리 쪽으로 내려가면 어때요? 흰색이 점점 진해지죠? 조직의 밀도가 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뿌리 가까운 털까지 써야 더 큰 붓이 되고 값을 더 받으니, 제일 먼저 부서지는 제일 약한 이 부분까지도 다들 재료로 살려 쓰는 거죠. 저는 뿌리 쪽 이만큼을 뭉텅 잘라내고 써요. 그걸 큰 붓에서 붓대와 붓털을 연결시키는 부분인 각통에 3cm씩 밀어 넣기도 해요. 오직 더 오래 쓰는 붓을 만들기 위해서죠. 다른 필장들이 이 얘기 들으면 아마 미친 짓한다고 할지도 몰라요. 누가 알아주겠냐 싶지만 포기할 수가 없어요. 가치 있는 일이라 믿으니까요.” 전통 기법에 대한 천착 털을 다루는 작업은 어려운 일이었다. 원모에서 털 뽑는 작업 동작만 해도 5년 이상 숙련해야 자세가 제대로 나온다고 했다. 그는 털을 준비하는 동안 손끝에서 사라지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털 묶기 전 털의 유분을 제거하는 과정에서도 그랬다. 유분이 남아 있으면 털이 먹을 머금지 못하고 쏟아 낸다. 먹 흐름을 제어하는 중요한 과정을 위해 그는 옛 방법을 좇았다. 털 위를 왕겨 태운 재로 덮고 한지로 감싼 뒤 다듬잇돌로 1년간 눌러 기름을 뺀다. 유분이 많은 너구리 털, 말꼬리 털, 소 귓속 털은 사람들 왕래가 잦은 대문간에 묻는다. 그만큼 많이 밟히도록 하는 것이다. “적어도 4세대 이전부터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방법을 20년 전부터 물고 늘어졌어요. 그런데 저를 제외한 대다수 필장들은 유분 제거를 위해 열처리를 하고 있어요. 두꺼운 철판을 불에 달궈서 털 위를 누르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유분은 10분 안에 뺄 수 있지만, 털이 큰 손상을 입거든요. 사용하다 보면 털이 바스라지고 계속 빠져나오게 되죠. 그런데 지금 그 누구도 이 방법을 문제 삼지 않아요.” 그는 사라져가는 한국의 붓 전통에 끊임없이 천착했다. 동물털 대신 식물성 소재 붓을 재현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오래 전 식물성 붓은 값비싼 동물털 붓의 대용품이었다. 칡붓의 경우 양모의 부드러움을 일부 가지면서도 비백(飛白)의 거친 멋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1990년대 초반, 그는 칡붓을 성공적으로 재현하면서 갖가지 식물성 붓을 만들기 시작했다. 억새붓, 띠풀붓, 종려나무붓 등 수십 가지가 넘는다. 동물털 붓은 ‘버리고 추리는 것’이 핵심이라면, 식물성 붓은 ‘두드리는 것’이 핵심이다. 두드림은 시간과 정성을 전제하는 일이다. “섬유질을 최소 단위로 쪼개야 해요. 끊임없이 두드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더라구요. 최소 5000번에서 5만 번씩. 쪼개기 전에 재료가 가지고 있던 녹말, 진액 다 뱉어 내게 하고 섬유질만 남기는 거죠. 세게 두드리면 섬유질이 끊어지니 달래듯 살살 두드려야 해요. 칡 같은 건 손질 과정만 3개월 걸려요.” 의지할 만한 문헌이나 자료 한 장 없었지만 그는 구전을 좇아 기법을 궁리했다. 300년 전, 500년 전 그때를 살았다면 어찌했을지 스스로 묻고 답하며 더듬듯 찾아간 방법이었다. “옛사람들은 아주 지혜로운 사람들이어서 누구나 다 엔지니어였고, 또 과학자였어요. 지금과 같은 과학 장비 하나 없었는데도 그들은 다 알고 있었거든요. 그분들 발자취를 되짚는 자체가 이 세상에서 제가 맡은 역할이 아닐까 싶어요.” 충북 증평군에 있는 그의 작업실은 후원자가 2010년부터 무상으로 임대해 주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그는 전통 붓 연구에 본격적으로 매진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과의 일환으로 증평민속체험박물관은 올해 12월 말까지 그의 40여 년 붓 인생을 더듬어볼 수 있는 기획 전시회를 열고 있다. 좋은 붓을 위한 자기 검열 열 살에 아버지를 잃고 생계를 위해 열세 살에 고향 충주에서 상경한 그는 식당과 공장을 전전했다. 가발 공장에서 각성제를 먹어 가며 밤샘 노동에 시달리던 그는 1976년 친척의 권유로 붓공방에 취직했다. 지금에서야 ‘털 귀신이 붙은 인생’이라며 과거사를 웃으며 넘기지만, 가발을 만지다 붓을 처음 받았을 땐 어린 마음에도 ‘이젠 귀한 일을 하며 살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눈 뜨면 일하고, 먹고 앉으면 일하고, 졸릴 때까지 해야 먹고 사는” 붓 공방에서 하루 평균 15시간씩 일을 했다. 몇 번의 위기를 거쳐 12년간 붓을 배운 그는 독립해서 자신의 붓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먹고 살려나 싶을 1990년대 초반, 한중수교가 이뤄진 이후 저가의 조악한 중국산 붓이 전국의 필방을 잠식했다. 필장들이 업을 접고 흩어졌고, 국내 붓시장의 붓들은 중국산 저가 붓 품질에 맞춰 하향 평준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3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 그 상황은 현재진행형이다. 그 어두운 터널을 지나오면서 그가 붙든 것은 ‘기본’이다. 기본에 맞춰 자신과 자신의 붓을 끊임없이 검열한다. “좋은 붓은 4가지 덕목을 가지고 있어요. 붓털의 허리 부분이 굳세고 탄탄해야 하고, 붓 맨 모양이 들쭉날쭉하지 않고 둥그스름해야 하고, 아울러 붓끝이 가지런해야 하고, 뿌리 부분에서 끝으로 갈수록 점진적으로 가늘어지면서 그 끝이 뾰족해야 좋은 붓이죠. 필장들이 입을 모아 하는 얘기가, 아무리 큰 붓이라도 작은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옛사람들은 큰 글씨의 본문을 쓴 붓으로 작은 글씨의 낙관까지 하는 것을 ‘격’이라고 했어요. 선비들은 한 작품에서 붓을 바꾸는 것조차 군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정서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 이야기에 비춰 봤을 때, 큰 글씨는 되는데 작은 글씨에 어려움이 있으면 붓을 바꿔야 할 때라는 뜻이죠.” 유 필장은 기본을 모르는 붓에 냉정했다. 0.1mm만 닳아도 끝이 안 모이는 저열한 붓, 그래서 두 달 만에 수명이 끝나는 붓은 붓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는 당장은 쉽게 제어되는 덕에 초심자로부터 좋은 붓이라는 평까지 듣게 되는 붓을 경계했다. 그러나 그는 “붓은 탓하되, 사람을 탓할 순 없다”고 했다. “컴퓨터 학원 3개월만 다녀도 컴퓨터로 못하는 것이 없는 게 요즘 사람들이잖아요. 짧은 시간에 서예가 소리도 듣고 싶고 공모전에서 성과도 내고 싶은데, 붓 세우기까지 10년 걸린다는 제 붓을 어찌 좋아하겠어요. 모든 붓이 그렇게 다루기 어렵다면 서예를 취미 삼는 사람도 금세 사라지겠죠. 요즘 사람들의 그런 욕구나 심리를 이해 못 하는 바 아니에요.” 좋은 붓은 크게 4가지 장점을 갖춰야 하는데, 유 필장은 특히 큰 글씨와 작은 글씨를 두루 표현할 수 있어야 최상의 붓이라고 말한다. 그는 조직의 밀도가 떨어지는 뿌리 쪽 털을 잘라내고 내부 조직이 조밀하고 단단한 털만을 재료로 사용한다. 더 오래 쓰는 붓을 만들기 위해서다. 귀한 작업에서 나오는 귀한 붓 그래서 그는 ‘영업’을 관둔 지 20년째라고 했다. 집도 절도 한 칸 없이 후원자가 무상 임대한 공간에서 머물듯 흐르듯 살고 있지만,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붓쟁이는 붓만 매어야 한다고, 팔 걱정이 마음에 들어오면 바로 작업이 망가진다고도 했다. 자신이 선 자리에 생각이 자꾸 고일 때마다 그는 붓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더 정성스러운 것을 생각하다 붓대 제작까지 직접 맡았다. 대나무를 손수 가공해서 붓대 위에 글귀를 수십 자 새기기도 하고, 붓대 전체를 나전칠기로 장식하기도 하며, 복숭아씨나 연실 따위를 이어 붙이며 본 적 없는 붓대를 시험하기도 한다. 최근엔 내구성을 위해 붓대에 옻칠까지 직접 입히고, 붓과 어울리는 붓걸이까지 함께 만든다. 40여 년 세월을 촘촘히 되짚으며 특별한 붓 한 자루만 꼽아달라고 했다. 그는 붓들 앞에선 할 수 없는 얘기라 했다. “붓 하나하나마다 이야기가 있어요. 한나절 얘기할 수 있는 붓이 있는가 하면, 몇 날 며칠 이야깃거리를 가진 붓도 있어요. 제가 호구 걱정이 없다면 한 점도 팔고 싶지 않을 정도예요. 쓸데없는 욕심일 테지만,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만 팔겠다고 이미 십수 년 전에 공언했거든요. 제 자신을 다그치는 표현도 내포돼 있어요. 특별하지 않으면 유필무 붓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거죠. 그래서 감히 ‘목숨을 건 붓’이라는 얘기도 하는 거예요. 귀하게 작업하면 귀하게 된다, 그리고 알아봐 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버텨 왔어요.” 이를 테면 목탁에 붓을 접목한 목탁 붓은 10년 구상의 결과물이다. 머릿속에서 꺼내서 작업이 되기까지의 세월, 그리고 그 안에서 시시때때로 움직이던 생각의 흐름을 그는 기억한다. 목탁 붓을 연구하던 시간은 ‘몸의 일부분처럼 느껴지는 붓’에 집중하던 시간이었다. 끝이 거친 볏짚 붓에도 그의 생각이 고여 있다. 어찌 보면 솔과 유사한 미완성의 도구 같지만, 활발발한 표현을 능히 해낼 수 있는 붓을 생각했다. “어떤 순간 어떤 작업에서건 이것대로의 몫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요.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지는 사용자의 마음이겠죠. 제가 규정하는 것이 웃기기도 하고 불필요하다는 겁니다.” 강직함을 넘어 때론 결기까지 내보이는 유필무 필장이다. 그런 그에게 붓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준비한 듯이 즉답했다. 처음 30년은 자신이 붓에 기대 살았노라고. 그런데 그 이후부터는 붓이 내게 기대고 있다 느껴질 때가 많다고 했다. 어렵고 외로운 길을 걸어온 그의 얼굴에서 문득문득 내비치던 충만의 이유가 그렇게 또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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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rdian of Heritage 2018 WINTER 274

줄 위에서 40년이 흘러가다 권원태(權元泰) 명인은 불과 3cm 굵기의 나일론 줄 위에서 부채 하나로 중심을 잡으며 뛰고 날며 관객을 웃기고 울린다. 그는 한국의 전통 줄타기가 재주를 뽐내는 서커스가 아니라 관객과 소통하는 민중 연희라고 힘주어 말한다. 줄타기 명인 권원태 씨가 지난 9월 말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야간 공연에서 공중으로 날아올라 180도를 회전한 후 다시 줄에 앉는 ‘거중돌기’를 선보이고 있다. 40년을 줄꾼으로 살아온 그에게 ‘줄’에 대해 묻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낯선 질문이 이어지자, 그는 특유의 말꼬리를 올리는 화법으로 질문을 밀쳐냈다. 줄꾼의 복잡다단한 마음자리를 살피는 것은 외줄에서 중심을 잡듯 어려웠다. “얼음 언 산 올라탈 때 어때요? 미끄러질 수도 있고 굴러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조심스럽게 타잖아요. 거기에 빗대서 줄 타는 사람을 ‘어름산이’라 불렀어요.” 얼음산을 올라타듯 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어름산이란 말의 유래가 무색하게 그는 줄 위를 거침없이 활보한다. 약 3m 높이로 설치된 8~9m 길이의 줄이 그의 무대다. 줄 위를 걷다가 뛰기도 하고, 줄에 가랑이를 걸치고 내려앉았다가 몸을 튕겨 뛰어올라서는 빙글 돌아 다시 줄에 앉기도 한다. 공연 내내 관객을 움찔하게 만드는 아슬아슬한 장면이 연출되지만 무대 아래엔 어떤 보호 장치도 없다. “보통 한 번에 30~40분 정도 타요. 우리나라 줄은 한두 시간씩 탈 수 있는 콘텐츠가 아니거든요. 관객과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어우러져야 하니까…. 그 정도가 한계라고 생각해요.” 권원태의 줄타기 무대는 조선 시대 유랑 예인들이 펼치던 전통 민속 공연 남사당놀이의 한 종류이다. 하지만 최근엔 각종 축제에서 줄타기 공연만 단독으로 치르는 경우도 많다. 외국의 서커스 공연단이 줄 위에서 곡예를 완성하는 시각 위주의 무대를 꾸리는 데 비해 남사당 줄꾼은 이야기꾼 역할까지 소화하며 재담과 기예를 동시에 선보인다. 그 시작이 서민들의 볕 들 일 없는 삶에 위로와 활력을 전하던 민중의 놀이였기 때문이다. “줄타기 동작이나 재담의 기본 틀은 전승되는 것을 따릅니다. 하지만 지역이나 장소, 사회적 이슈, 관객의 호응도 등에 따라 그때그때 조금씩 달라져요. 기술의 가짓수요? 재주를 몇 개나 보여 주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죠. 상황에 따라서 응용 기술이 즉흥적으로 들어가기도 하니까요.” 줄꾼의 무대 줄은 줄타기 무대의 전부이자 줄꾼이 넘어야 할 전부이다. 그에게 줄에 대해 물었다. 그가 쓰는 줄은 어떤 줄이고, 서커스 공연의 줄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2004년 미국 플로리다 탬파베이에서 열린 ‘세계의 최고 기록-줄타기’ 부문에서 19초 33 만에 주파해 그를 챔피언 자리에 오르게 했던 50m 줄, 그리고 2007년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줄타기 명인들이 참여했던 ‘한강 횡단 세계 줄타기 대회’에서 17분 6초의 기록을 내게 했던 1km 줄은 도대체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런 데선 쇠줄을 써요. 쇠줄은 강하고 팽팽해서 흔들림이 없죠. 그 줄은 두께가 3cm고, 양쪽에서 당기는 장력이 35t이에요. 줄이 안 끊어지고 버틸 수 있는 하중의 최대치가 35t인 겁니다. 사람들이 그 힘을 이용해 올라가서 퍼포먼스를 해요. 그런데 우리나라 줄은 나일론 재질이라서 부드럽단 말이에요. 출렁출렁 낭창낭창한 느낌에 우리 줄의 멋이 있어요. 그만큼 줄 위에서 중심 잡는 건 힘들겠죠. 쇠줄과 나일론 줄을 딛는 느낌을 비교하자면 땅바닥에서 그냥 뛸 때와 발이 쑥쑥 들어가는 모래밭을 뛸 때 정도 되겠네요.” 같은 나일론 줄이라도 탄성이 조금씩 다르고, 어떤 탄성의 줄을 선택할 것인지는 줄꾼의 취향이라고 했다. 탄성이 다른 줄을 때때로 섞어서 쓰기도 하는지 물었다. 그는 이마의 주름을 깊게 만들더니 곧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입을 열었다. “줄은 예민한 거예요.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하기 때문에. 그래서 줄꾼이 줄을 함부로 바꿔 쓰는 일은 쉽지 않아요.” 40년 넘게 줄을 타 온 권원태 씨가 “한국의 전통 줄타기는 단순히 기예를 뽐내는 차원이 아니라 재담으로 관중과 소통하는 민중 놀이의 하나”임을 강조한다. 9살에 줄 위에 서다 그의 공연 영상을 다시 봤다. 줄꾼의 움직임만 보이던 시야에 흔들리는 줄의 곡선까지 함께 들어오기 시작했다. 땅에서 벗어난 사람의 움직임, 한 사람의 무게를 받아 내는 줄의 움직임이 그런 것이었나. 줄 위를 걷던 그는 부채를 펴더니 허공에 작은 곡선들을 그리기도 했다. 관객이 풍류라는 부채의 이미지에 취할 때 그는 그 부채로 바람의 저항을 제어하며 중심을 잡았다. 외줄에 의지해 허공을 가르는 그가 반드시 이겨야 할 것은 바람이고, 그 바람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부채다. “부채 들고 바람 한번 날려 보세요. 무게감을 느끼잖아요. 그 무게로 중심을 잡을 수 있죠.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부채를 들었는데 바람이 세게 불면 낙하산 효과가 나겠죠. 중심 잡는 방법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줄타기에서 가장 넘기 힘든 산은 무엇일까. 줄꾼은 무엇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을까. 그는 질문을 받고 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줄을 연습하는 건 성장하는 과정이에요. 사람 몸이 크면서 또 뇌도 성숙하면서 줄 기술도 같이 발전하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어떤 단계를 넘었다, 무엇을 마스터했다, 단순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공연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무르익으며 완성도가 안정권에 들어가요. 줄이라는 건 그래요.” 문답이 이어질수록 권원태의 줄타기는 기예의 영역을 점점 벗어났다. 그리고 그의 삶과 마음을 비추기 시작했다. 광대로 살던 그의 부모는 아홉 살 아들을 무작정 유랑 예인 극단에 입단시켰다. 그는 강요된 삶의 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유년기 이후의 삶이 줄타기와 분리되지 않았고, 줄꾼으로 성장해 가는 시간은 곧 권원태라는 사람을 키우는 시간이었다. 삶과 연습이 밀착된 총체적인 배움이 지속될 뿐이었다. ‘줄 위에서 커 버린 사람의 세월’이 당사자에게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그 기억을 시간의 단위로 나눌 수 있을까. 그는 ‘10년 차 실력’ 따위의 ‘숫자로 환산하는 능력값’에 저항감부터 드러냈다. “굳이 그런 방식으로 얘기해야 한다면…. 10년 정도 했을 땐 패기가 있죠. 겁도 없고. 그런데 느낌이 없는 거죠. 반복된 학습을 쫓아가기 바쁘니까요. 20년쯤 돼야 어느 정도 느낌을 내고 몸의 컨디션에 맞게끔 줄을 탈 수 있어요. 이후엔 ‘내 몸 상태가 이러니까 오늘은 이 선에서 이렇게 해 보자’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요. 40년을 탔지만 아직도 완벽해진 게 아니에요. 지금도 날씨가 꿉꿉하면 줄도, 몸도 무거워요. 그건 어떻게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줄타기는 정해 놓은 것 없이 상황에 따라서 다이내믹하게 흐르는 익스트림 스포츠 같아요.” 시종일관 건조한 대답을 이어가던 그가 격정적으로 변한 것은 ‘줄의 높이’를 논하던 대목이었다. 3m라는 수치를 확인하려는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줄의 높이가 얼마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죠. 3m 높이의 지형물과 3m 높이의 외줄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어요. 높이의 차이는 위험과 공포감의 차이예요. 굳이 위험수를 둬서 5m 높이를 고집할 필요가 없는 이유죠. 우리나라 줄문화는 아찔한 계곡 위에서 줄타기하는 그런 기예가 아니에요. 관객 눈을 맞추고 대화하면서 재주를 부리는 것이지.” 그가 말했다. 며칠 젓가락 안 쓴다고 젓가락질을 잊어버리지 않듯 줄꾼에게 줄은 그렇단다. 연습하다 삐끗하면 다칠 수 있으니 요즘엔 연습 없이 바로 공연에 들어간다고 했다. 때때로 공연 중에 사고를 겪기도 했지만, 그것에 대해선 좀처럼 복기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줄에 설 때마다 두려움이 다른 모습, 다른 깊이로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에게 줄타기의 전부는 사고의 두려움으로부터 초연해지는 모든 행동과 자세였다. 적잖은 마인드 트레이닝이 요구될 것 같았지만, 그의 답은 의외였다. “복잡하게 생각 안 해요. 그냥 이건 내 직업이다, 단지 직업에 위험이 따르니까 조심하자, 그 정도로만 생각하려 해요. 그리고 평소에도 늘 조심하는 거죠. 살아 있는 생명체는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든가, 특히 날짐승은 절대 해코지하지도, 먹지도 않죠. 내가 늘 높은 데 있는 사람이라….” 줄꾼의 움직임만 보이던 시야에 흔들리는 줄의 곡선까지 함께 들어오기 시작했다. 땅에서 벗어난 사람의 움직임, 한 사람의 무게를 받아 내는 줄의 움직임이 그런 것이었나. 권원태 명인이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앞 잔디광장에서 기예를 펼치고 있다. 한 손에 든 부채는 그가 줄 위에서 바람의 저항을 제어하며 무게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 인생은 줄이다 두려움과 공포는 멋대로 출몰하고 사라지는 것이어서 40년의 경험으로도 제어하기 어려웠던 걸까. 그는 그 어찌할 수 없는 감정에 그저 거리를 두고 설 뿐이었고, 불운의 기운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스스로를 막연하게 방어할 뿐이었다. 그 대신 통제할 수 있는 것에서만큼은 어떤 미진함이나 모호함도 허락지 않았다. “줄을 매는 일은 당연히 직접 하죠. 지지대 세울 때 줄이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하중을 받을 수 있는 땅인지 꼼꼼히 살피고, 장력을 가늠해서 줄을 직접 걸어요. 예를 들어서 빳빳하게 맨 줄이 잘못 묶여서 한 뼘만큼 붙어 버릴 때 그 줄이 내 몸에 전해지는 충격은 어마어마하거든요. 나한테 익숙한 줄의 느낌, 그런 줄의 탄성은 나만 알아요. 거기에 맞춰 거는 거죠.” 자신의 방식대로 줄 위의 물리학적 힘의 분배까지 설명하는 줄꾼. 아니나 다를까 그는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더라면 이공 계통의 일을 찾았을 거라고 했다. 특히 기계 다루는 일을 좋아해서 지금도 간단한 기계의 부품 정도는 직접 만들어 쓸 정도라고, 그런 업에 몸담았으면 조금 더 성공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그 삶이 못 이룬 꿈으로 남은 것인지를 물으니, 꿈 꾼 적은 없노라고 잘라 말했다. “먹고 살 거 걱정만 하지 않는다면 이 일이 아주 멋진 직업이에요. 줄 하나 잘 배워서 해외도 다니고, 남들에게 ‘권 선생’으로 불리면서 존중도 받고 하니까요. 또 기네스북에도 이름을 올렸잖아요. 제가 30초 동안 거중돌기(공중으로 뛰어올라 180° 돈 후 줄 위에 앉기) 12번 기록을 세웠거든요. 이만하면 행복한 인생 아닐까요.” 그뿐 아니다. 그가 이수 과정을 마치고 ‘명인’의 호칭을 얻은 남사당놀이는 대한민국의 국가중요무형문화재인 동시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다. 그는 인생은 곧 줄이라고 했다. “태어날 때 뭐 잡고 태어나죠? 그래요, 탯줄이죠. 새 생명은 가는 줄로 배냇저고리 입고 인생을 시작하죠. 또 인생사 사는 데 줄을 잘 서야죠? 똑바로 앞만 보고 가야되는데 옆으로 새면 나쁜 곳으로 빠지잖아요. 줄 위에서 바람 불어 휘청휘청할 때도 있겠지만 중심 잡고 똑바로 가야죠. 마지막엔 어디로 가나요. 삼실에 묶여서 한 줌의 재로 끝나버리잖아요. 인생은 줄로 시작해서 줄로 끝나는 거예요.” 그는 일상에서 줄이 안 들어가는 데가 어디 있느냐며 그제야 웃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인생줄 어디쯤에 서 있을까. 그 줄 위에서 얼마만큼 가벼운 몸으로, 또 얼마만큼 기쁘게 뛰고 놀았을까. 줄꾼이 던진 화두에 오늘이 그가 딛는 줄처럼 오래도록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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