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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rdians of Heritage

절제 속에서 빛나는 자연미

Guardians of Heritage 2023 WINTER

절제 속에서 빛나는 자연미 한국의 목가구는 화려한 채색이나 정교한 조각 대신 나뭇결을 활용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는 특성이 있다. 2010년 국가무형문화재 소목장 기능 보유자로 지정된 박명배 장인은 전통 목가구 기법을 계승하는 한편 철저한 도면 작업을 통해 비례미를 구현한다.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자신의 공방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박명배 소목장. 꼼꼼한 도면 작업을 통해 만들어지는 그의 작품들은 간결하고 기품 있는 전통 목가구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나무를 다루는 목수는 건축물을 짓는 대목(大木)과 가구나 각종 기물을 만드는 소목(小木)으로 구분한다. 전통 목공 기법으로 장롱, 문갑, 책상 등을 만드는 장인을 소목장(小木匠)이라고 한다. 기교가 화려했던 고려 시대(918~1392)와 달리 조선 시대(1392~1910)의 공예품은 유교적 영향으로 소박함과 절제미가 돋보인다. 소목장 박명배(Park Myung-bae, 朴明培)의 작품은 조선 시대 목가구의 전형을 나타내면서도 화장판(化粧板, 가구의 앞면)의 재질로 인해 수려한 느낌을 준다. 간결한 선과 판재의 역동적 무늬가 어우러진 그의 작품은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적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목수에게 용목(龍目)이 없으면 속 빈 강정이죠. 나뭇결은 인위적으로 만든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고, 자연 그대로이니 싫증이 나지 않아요. 전통 가구는 장식이나 조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나뭇결 자체를 잘 살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박 장인이 마치 용이 뒤엉킨 것 같은 오래된 느티나무의 나뭇결을 좋아하는 이유다. 그의 말처럼 나무가 만들어 내는 무늬들은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답다. 기술력과 창의성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의 기능 보유자 문하에서 오랜 시간 수련하며 전수자, 이수자, 전승교육사의 과정을 거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박 장인은 이와 달리 전승 계보가 없다. 특정 소목장의 제자로 들어가 기술을 전수받지 않았다는 얘기다. 21세 때인 1971년 전국기능경기대회 목공예 부문 1위를 시작으로 스스로 능력을 입증해 인정받았다. 1989년에는 동아(東亞)일보사가 주최한 동아공예대전에 목리반(木理盤)을 출품해 대상을 받았고, 1992년에는 한국문화재재단이 주관하는 전승공예대전에서 의걸이장(欌)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도면 구성에만 1년이 걸린 이 작품은 판재로 사용한 소나무를 인두로 지져 독특한 색감을 냈다. 그가 고안해 낸 방법이다. “원래 이 기법은 오동나무를 써요. 오동나무판을 인두로 지져 태운 후 솔이나 짚으로 문지르면 무른 부분은 검게 패고 단단한 부분은 덜 파여 나뭇결대로 무늬가 생기죠. 그 무늬가 질박하고 품위가 있어 예로부터 사랑방(舍廊房) 가구에 많이 쓰였습니다. 이 기법을 소나무에 적용해 수려한 문양을 내 봤는데 큰 상을 받았죠.” 박 장인은 바티칸박물관 한국관에 들어가는 가구 일습을 비롯해 미국 LA와 워싱턴D.C., 독일 베를린, 폴란드 바르샤바, 일본 오사카 등 세계 주요 도시의 한국문화원에 들어간 사랑방 가구를 제작했다. 또 고종(高宗)황제(재위 1863~1907)가 태어난 저택인 서울 운현궁(雲峴宮)을 복원할 때 100여 점에 이르는 가구 제작을 총괄하기도 했다. 전통 목가구의 제작 기법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뛰어난 기량 덕분이었다. 한국의 전통 목가구는 못이나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부재에 홈을 파서 끼워 맞추는 결구법을 사용한다. 박 장인은 젊은 시절 내로라하는 목수들을 찾아다니며 70여 가지의 짜맞춤 방식을 배웠다.   특별한 인연 비록 계보는 없지만, 그에게도 스승이라 할 만한 특별한 인연이 있긴 했다. 1950년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태어난 그는 집안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 후 상급 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 됐다. 18세 때 서울로 올라와 목수인 친척 형의 소개로 당시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공예과 최회권(崔會權) 교수의 공방에 들어갔다. 상업적으로 제작해 파는 가구가 아니라 목공예 작품을 먼저 접한 것이다. “예전에는 교수나 전공자는 디자인만 하고 제작은 목공소에서 해 주는 경우가 많았어요. 최 교수님 공방에서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작품을 기획하고 완성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았죠. 대학에서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교수님 공방에서 더 많은 것들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몇 년 후 최 교수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되면서 공방이 문을 닫자 그는 진로를 고민해야 했다. “현대 공예는 작가주의적 성향이 강해서 저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장인 기질이 요구되는 우리 전통 가구 쪽으로 방향을 틀었죠.” 그는 이름난 목수들에게 못을 쓰지 않고 목재에 홈을 파서 짜맞추는 70여 가지 전통 짜맞춤[結構] 방식을 배웠다. 수년에 걸쳐 나무를 말리고 다스려서 숨통을 틔워 주는 결구법은 소목의 핵심 기법이다. 소목장이 갖춰야 할 기능적인 면을 두루 익힌 그는 30세가 되던 1980년에 독립했다. 최상의 도면 자신의 공방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최순우(崔淳雨, 1916~1984)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목공예 인생에 큰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최 관장은 한국 미술사학의 기초를 마련한 학계의 큰 스승으로 박 장인에게 전통 공예의 철학과 안목을 가르쳐 주었다. 박 장인은 최 관장을 통해 전통 가구의 비례미에 눈을 떴다. 우리 가구는 앞면을 테두리로 분할하고, 나뉜 면에 무늬 좋은 목재를 쓴다.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는 여름과 겨울의 온도 및 습도 차이가 크다. 그래서 판재를 통으로 쓰면 시간이 지나면서 뒤틀리기 때문에 면을 나눠야 한다. 기능적인 이유로 면을 분할하지만 이를 통해 아름다운 비례가 생기니, 어떤 비율로 면을 쪼개느냐가 관건이다. 1984년 그는 청와대에 전통 안방을 꾸미면서 판재 선별부터 디자인, 비례와 형식, 제작 공정에 이르기까지 최 관장의 세밀한 가르침을 받았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솜씨 좋은 목수를 불러들여 집 안 분위기에 맞는 가구를 합작으로 만들어 냈던 것처럼 그도 최 관장과 합심해서 조선 시대 가구의 원형을 되살려냈다. 최 관장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인연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지금도 최 관장과 작업할 때와 마찬가지로 일대일 도면 그리기를 고수한다. “가구 도면을 실물 크기 그대로 그려서 벽에 붙여 놓고 자꾸 들여다봅니다. 그러면 어제 안 보이던 것이 오늘 보이고, 어제는 괜찮아 보였는데 오늘은 고쳐야 할 게 눈에 들어오죠. 시간을 두고 수정하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해 최상의 도면을 완성합니다.” 뒤틀림 없이 깔끔한 비례미를 자랑하는 그의 작품은 이처럼 꼼꼼한 도면 작업을 거쳐 만들어진다. 재현은 하되 복제는 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진 그는 지금도 짬이 날 때마다 스케치하며 디자인을 구상한다. 두 딸을 비롯해 19명의 이수자들과 많은 교육생들을 배출한 그는 올해 18번째를 맞는 < 소목장 박명배와 그의 제자전 > 을 해마다 거르지 않는다. 전통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지 아직도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결한 면 분할과 나뭇결로 인해 단아하면서도 화려함이 풍기는 사층 책장. 전통 가구는 목재의 수축 및 팽창으로 인한 변형과 파손을 막기 위해 가구 전면을 분할하는데, 이를 통해 아름다운 비례와 조형미가 생겨난다. 화장판의 나뭇결이 아름다운 박 장인의 머릿장. 머리맡에 두고 물건을 보관하는 용도의 단층 장이다. 남성들은 중요한 문서를 보관하기 위해, 여성들은 간단한 옷가지를 수납하는 데 주로 사용했다. 반닫이는 앞면의 위쪽 절반을 아래로 젖혀서 여는 가구이다. 빈부에 상관없이 집집이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던 필수품이었고, 지역별로 다른 특징을 나타낸다. 사진은 앞면 중앙에 호리병 모양의 경첩 장식이 달려 있는 강화(江華) 반닫이.   이기숙(Lee Gi-sook, 李基淑)자유기고가

목판에 새긴 글자의 힘

Guardians of Heritage 2023 AUTUMN

목판에 새긴 글자의 힘 목판에 글씨나 그림을 새기는 각자(刻字)는 목판 인쇄와 현판 제작의 핵심 기술로 서체의 특성과 글 내용을 온전히 이해한 뒤에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각자장의 기량은 각질의 흔적, 글자체의 균형도 등으로 평가된다. 김각한(Kim Gak-han, 金珏漢) 장인은 오랜 기간 작품 활동과 전승 활동을 펼친 노고를 인정받아 2013년 국가무형문화재 각자장 보유자가 되었다. 각자장 김각한(Kim Gak-han, 金珏漢) 씨가 각자 작업 중인 모습. 그는 책판용으로 조직이 치밀하면서 적당히 단단한 산벚나무를 애용한다. 각자는 목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일을 말한다. 목판 인쇄물은 물론이고 건축물에 내거는 현판(懸板)도 각자를 통해 제작됐으니 역사가 오랜 기술이다. 각자의 기능을 가진 장인을 각자장이라고 한다. 2013년 각자장 보유자로 인정된 김각한은 방화로 소실됐던 숭례문(崇禮門) 현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1377)의 목판본, 한국전쟁 때 불타 버린 『훈민정음 언해본(諺解本)』 등 굵직한 우리 문화재의 복원 작업에 참여했다. 목공에서 각자로 단단한 목판에 글씨를 정교하게 새기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도구가 필요하다. 그가 사용하는 도구는 망치, 칼, 끌 등 30여 가지에 이른다. 장인의 출발은 목공예였다. 그는 1957년 경상북도 김천(金泉)에서 농사짓는 부모의 5남 1녀 중 다섯째로 태어나 초등학교만 겨우 마쳤다. 6학년 때 부친이 사망하면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김천 시내 목공소에 다니며 소목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촌구석에 널린 게 나무였으니까요. 덕분에 일찌감치 나무를 다룰 줄 알았죠.” 학업에 대한 미련이 많았던 그는 낮엔 일하고 밤엔 공부하면서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군 제대 후에는 서울로 올라와 종로 탑골공원 근처 목공예학원에 다녔다. 그러던 중 1983년 동덕(同德)미술관에서 열린 오옥진(吳玉鎭)의 전시회는 그의 인생을 단번에 바꿔 놓았다. “그때 전통 각자를 처음 봤어요. 옛 서울의 지도 < 수선전도(首善全圖) > 를 복원한 것을 보고 첫눈에 반해 버렸죠. 곧바로 하던 일을 정리하고 선생을 찾아가 배움을 청했습니다.”그의 스승은 1996년 각자장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첫 번째 보유자가 된 인물이었다. 김각한은 2005년 전승교육사가 되었고, 이후 문화재 복원과 전승 활동을 인정받아 8년 후 스승의 뒤를 이어 2대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스승과의 만남이 목공에 머물 뻔했던 장인을 각자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면, 서예가 박충식(朴忠植)은 그를 진정한 장인의 길로 이끌었다. “각자를 배운 지 2년쯤 되니까 한자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걸 절감하게 되더군요. 문자를 다루는 공예인 만큼 글과 글자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죠.” 그는 본격적으로 서예를 배우기로 하고 아예 선생의 서실이 있던 방배동 인근으로 이사를 했다. 이때 마련한 작은 공간이 지금의 공방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됐다. 배움에 대한 갈증은 1992년 방송통신대학 중어중문학과 입학으로 이어졌다. 늦게 빠진 공부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었다. 일하며 공부하느라 6년 만에 졸업했지만 글공부는 지금도 놓지 않고 있다. 치목에서 인출까지 각자의 핵심은 새기는 일이지만, 그 시작과 끝은 나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적합한 나무를 구해 오랜 시간 건조시키며 삭이는 치목(治木) 과정이 중요하다. “현판은 용도에 따라 돌배나무, 소나무 등 다양한 수종을 씁니다. 하지만 책판용으로는 조직이 치밀하면서 적당히 단단한 산벚나무가 가장 적합하죠. 『팔만대장경』 목판의 수종을 분석해 보니 70% 이상이 산벚나무였습니다. 그러나 나무의 종류보다는 나무를 충분히 숙성시키는 작업이 더 중요합니다. 7~8년 이상 말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나뭇결이 잘 삭아야 변형되지 않고 오래 보전할 수 있거든요.” 각자할 원고나 도안이 준비되면 나무를 적합한 크기로 잘라 대패질해서 다듬은 다음 풀칠을 하고 원고나 도안 종이를 붙인다. 인쇄를 목적으로 하는 목판은 좌우를 바꿔서 붙인다. 그런 다음 종이 두께의 절반가량을 손으로 비벼서 벗겨 내고 사포로 문질러 도안을 목판에 밀착시킨다. 그러고 나서 기름칠을 해 도안이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하는데, 이를 배자(排字)라고 한다. “배자에 사용하는 기름은 어떤 종류든 상관없지만 볶지 않고 생으로 착즙한 것을 써야 합니다. 볶은 기름은 굳어 버려서 글자를 새길 수가 없거든요.” 각자는 글자나 문양의 특징을 고려해 작업에 적합한 칼과 끌, 망치 등을 사용한다. 목판본처럼 좌우를 바꿔서 새기는 것을 반서각(反書刻), 공공건물이나 사찰 등의 현판과 같이 보이는 그대로 새기는 것을 정서각(正書刻)이라고 한다. 각자 작업이 끝나면 목판본의 경우 양옆에 손잡이와 통풍 기능을 겸하는 마구리를 만들어 끼운다. 그리고 각자한 나무판에 알맞은 농도의 먹물을 고르게 칠한 다음 인출할 종이를 덮고 밀대로 문질러 찍어 낸다. 현판의 경우 각자 후 채색해 완성한다. 서체에 대한 이해 김 장인이 책판을 인출(印出)한 뒤 각자가 잘되었는지 점검하고 있다. 각자장은 대량 인출이 필요한 서적을 만들기 위해 책판에 글자와 그림을 새기는 기술을 지닌 장인이다. 각자의 기법은 크게 음각(陰刻)과 양각(陽刻)으로 구분한다. 음각은 글자 자체를 파내는 기법으로 문자를 바탕면보다 깊게 파낸다. 양각은 글자 주변을 깎아내 입체적으로 돌출시키는 기법이다. “각자의 기본은 음각인데 사실 그게 가장 어렵습니다. 그저 획을 따라서 새기면 무슨 글자인지 읽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서체를 보면 어떤 부분에는 힘이 들어가 있고 어디는 힘을 뺐는데, 그런 디테일을 각자로도 잘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획에 힘이 들어간 곳은 더 깊고 넓게 파야 글자가 살죠. 완성했을 때 누구의 서체인지 알 수 있어야 하니까요. 한마디로 서체의 특징을 잘 알고 글의 흐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많은 작품들에 둘러싸인 그에게도 전승에 대한 고민은 적지 않다. “이 일만으로 생활이 어렵다 보니 젊은 사람들이 배우려고 하질 않아요. 대부분 취미로 배우는 은퇴자들이죠. 애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까 마음을 비우게 됩니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작품만 생각하려고요.” 아직 대표작이 나오지 않았다며 겸손해하는 장인은 우리 각자의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낙관했다. 이기숙(Lee Gi-sook, 李基淑)자유기고가

재미로 이루어 낸 새로움의 세계

Guardians of Heritage 2023 SUMMER

재미로 이루어 낸 새로움의 세계 무형문화재 이수자 허성자(Hur Sung-ja, 許性子) 씨는 완초(莞草) 공예에 과감하게 현대적 디자인을 적용한다. 기존 완초 공예의 제한된 용도와 형태에서 벗어난 그의 오브제들은 전통 공예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완초 공예의 기본 형태인 원형 화방석(花方席)이다. 완초 공예는 논이나 습지에서 자라는 한해살이풀인 왕골을 재료로 돗자리, 방석, 합 등을 만드는 작업이며 고드랫돌을 사용하거나 손으로 직접 엮는 두 가지 방법을 활용한다. 과거 농경 생활을 하던 한국인들은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짚이나 풀로 생활 공예품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중 완초라고도 불리는 왕골 공예는 일손을 놓은 겨울철 농가의 좋은 부업거리이기도 했다. 왕골로 만든 자리는 한여름 더위를 식혀줄뿐더러 형형색색 무늬가 아름다워 인테리어 소품 역할도 했기 때문에 수요가 적지 않았다. 한국의 왕골 공예 문화는 그 역사가 깊다. 고려 시대 역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1145)에 보면, 이미 삼국 시대에 왕실에서 사용하는 공예품을 만드는 전담 기구가 있었고, 신분에 따라서는 왕골로 자리를 엮어 수레에 휘장을 쳤다는 기록도 있다. 왕골 공예의 진수를 보여 주는 화문석(花紋席)은 일찍이 고려 인삼과 함께 중요한 교역품이기도 했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1123)에 화문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에 이미 화문석 짜는 기술이 매우 정교하고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초기 지리서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54)에는 지금의 강화군(江華郡)이 속해 있던 지역에서 왕실에 특산품으로 왕골속(왕골의 겉껍질을 벗겨 낸 속살)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 이미 이 지역이 왕골 재배에 적합한 날씨와 풍토로 완초 공예의 명산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때 강화군 교동(喬桐) 지역은 집집이 왕골을 짠다고 했을 만큼 완초 공예가 왕성했지만, 1980년대 이후 저렴한 수입산 공예품에 밀려 수요가 급격히 줄면서 위기를 맞았다. 현재는 몇몇 장인들에 의해 전통 공예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기교와 집중의 극치 서른이 훌쩍 넘은 늦은 나이에 완초 공예의 길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허성자 장인은 자신만의 표현 방식으로 현대적 감각의 작품 세계를 선보인다. 완초 공예의 공정은 크게 재료 준비와 제작 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재료인 왕골은 7~8월에 수확했다가 주로 겨울철에 물에 적셔서 말리는 정련 작업을 거친다. 이렇게 물에 적셔 말리기를 반복해야 껍질이 부드러우면서도 질겨지고, 왕골 특유의 푸른 기가 빠져 전체적으로 미백색을 띠게 된다. 정련 작업 후 문양이나 패턴에 사용될 왕골은 따로 염색한다. 끓인 물에 색깔별로 염료를 풀어 왕골을 넣고 푹 익힌 다음 건조시키면 된다. 이렇게 준비한 왕골을 굵기별로 분류해 보관해 두고 사용한다. 재료 손질을 마치면 제작에 들어가는데, 왕골을 짜는 기술에는 기구를 이용하는 방법과 손으로 엮는 방법이 있다. 화문석과 같은 자리는 보통 기구를 이용한다. 고드랫돌에 맨 실을 자리틀에 걸고 왕골을 한 가닥씩 올려 실을 교차해 가며 짠다. 방석, 바구니, 각종 합(盒)처럼 크기가 작은 기물은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손으로만 엮기 때문에 숙련된 장인의 솜씨와 감각이 필요하다. 먼저 왕골을 가늘게 쪼갠 후 두 개를 교차해 시계 방향으로 길게 꼬아서 날줄을 만들고, 다양한 굵기의 씨줄을 준비해 본격적으로 문양을 만들어 가며 제작에 들어간다. 합이나 바구니같이 높이가 있는 입체 형태의 기물은 기본형인 원형 화방석(花方席) 제작 공정에 운두(옆면)를 올리는 공정을 더한다. 엮는 방식은 동일하지만, 적절한 곡선을 주며 운두를 올리는 데는 정교한 기술과 숙달된 솜씨가 요구된다. 전체적으로는 왕골 굵기에 따라 짜임이 고르도록 당기는 힘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이같이 기교와 집중의 극치를 보여 주는 왕골 공예 장인을 완초장(莞草匠)이라고 한다. 재미에서 재능으로 허성자 씨는 강화도에서 나고 자랐다. 태어나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아온 그에게 왕골은 가장 흔한 놀잇감이자 생활의 일부였다. 여느 강화 사람들처럼 그의 집도 화문석을 짜는 게 일상이었고, 그 또한 어머니 어깨너머로 간단한 기법 정도는 깨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결혼해 평범한 주부로 살던 허 씨가 완초 공예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05년, 그의 나이 서른이 훌쩍 넘은 뒤였다. “집 근처에 화문석문화관이 개관하면서 직원으로 일하게 됐어요. 완초 공예는 화문석, 화방석만 있는 줄 알았다가 생활 전반에 다양하게 사용된다는 걸 그때 알게 됐죠. 문화관에서 완초장 체험 수업을 들으며 장인들께 체계적으로 배우다 보니 이 일이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퇴근해서도 애들이 잠자리에 들면 완초부터 손에 잡았으니까요.” 관심사와 일이 일치하다 보니 그는 빠르게 성장했다. 2009년 서울 한벽원(寒碧園)미술관에서 열린 을 비롯해 크고 작은 공예전에 꾸준히 출품도 했다. 그가 자타 공인 완초 공예인으로 들어선 계기는 2011년 ‘강화군 공예품 경진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면서다. 같은 해 ‘인천광역시 공예품 대전’에서는 대상을, ‘대한민국 공예품 대전’에서는 중소기업청장상을 받았다. “제가 상복이 있나 봐요. 재미가 있어 만들면서도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아 보고 싶어서 출품했던 건데…. 뭐든 상을 받으면 힘이 나고 열심히 하게 되잖아요.” 재미에 빠져 몰두한 결과 그는 쟁쟁한 장인들을 제치고 인정받으며 성과를 올렸다. 이듬해 그는 국가무형문화재 완초장 전수장학생이 됐고, 2017년에는 이수자로 선정됐다. 이수자가 되면서 그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완초 공예에만 집중하게 됐다. “제가 이수자들 중에 가장 젊어요. 오랜 세월 이 일을 해 오신 선생님들이 계시지만, 저는 뭔가 새로운 걸 해 보고 싶었어요. 전통 공예라고 해서 전통 문양만 넣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다른 분야의 전시회나 책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구했죠.” 한정된 용도와 표현 방식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직선과 사선, 격자 패턴을 넣어 완초 공예에 현대적 감각을 입혔다. 이른바 ‘허성자표’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작업실 벽장의 절반을 채운 각종 디자인 관련 서적들이 그간의 과정을 짐작하게 한다. 공예와 예술 사이 완성된 합의 안쪽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허 장인이 나무 방망이로 두드리며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허 장인은 조규형, 최정유 두 명의 디자이너로 이루어진 스튜디오 워드(Studio Word)와 함께 1년여 동안 협업을 지속했으며, 그 결과 기본 형태에서 벗어난 다양한 오브제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스튜디오 워드 제공 “국가무형문화재 이수자 지원 사업 중에 전승 공예품 인증제라는 게 있어요. 2020년, 이 프로젝트에 출품한 제 화방석을 보고 심사위원이자 문화유산 보존 단체인 재단법인 예올의 자문위원이기도 한 조규형(Cho Kyu-hyung, 趙奎衡), 최정유(Choi Jung-you, 崔定有) 디자이너께서 협업을 제안하셨어요. 1년여 협업을 거치면서 왕골로만 작업하기 어려웠던 것들이 가능해졌고, 제 작업에도 큰 변환점이 됐죠.” 나무로 만든 모형[木型]을 활용하게 되면서 기본 형태에서 벗어나 원뿔형, 삼각형, 팔각형 등의 다양한 오브제가 탄생했다. 모양과 기능을 확장하면서 완초 공예의 쓰임에 대한 갈증도 어느 정도 해소됐다. 전통 기술을 구현하면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그의 작업은 곧 세간의 인정을 받았고, 2021년에는 예올이 뽑은 ‘올해의 장인’으로 선정됐다. 디자이너들과 협업하여 내연을 확장했다면, 지난해에는 밀라노디자인위크 한국공예전을 통해서 외연을 확장할 수 있었다. 밀라노 한국공예전 10주년을 맞이해 이탈리아 디자이너들과 한국 장인들의 협업으로 진행된 특별 전시에서 그는 브랜드 디자이너 프란체스코 파신(Francesco Faccin)과 함께 한국의 전통 갓을 모티브로 한 오브제를 비롯해 왕골의 짜임 기술을 접목한 의자, 조명 등을 선보여 호평받았다. 그의 말마따나 경륜에 비해 비약적인 성취를 얻은 것이다. “사실 장인이라는 호칭은 사양하고 싶어요. 그 정도로 경륜이 쌓인 것도 아니고, 장인이라면 뭔가 힘들게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할 것 같잖아요. 저는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정말 재미있어서 해 오고 있거든요.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 해내야 하는 일을 재미없으면 절대 못 하죠. 그래서 장인보다는 작가로 불렸으면 해요.” 허 장인이 한국 전통 갓을 모티브로 디자이너 프란체스코 파신(Francesco Faccin)과 협업한 작품으로 2022년 밀라노디자인위크 한국공예전에서 전시되었다. 이기숙(Lee Gi-sook, 李基淑)자유기고가

영원한 금빛 꿈을 새기다

Guardians of Heritage 2023 SPRING

영원한 금빛 꿈을 새기다 한옥이 밀집해 있는 서울 가회동(嘉會洞) 일대 골목에는 전통 공방들이 들어서 있다. ‘금박의 잔치’라는 뜻을 지닌 금박연(KumBakYeon, 金箔宴)도 이곳에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19호 기능 보유자 김기호(Kim Gi-ho, 金基昊) 씨가 운영하는 공방이다. 그는 5대째 금박 공예를 계승하고 있는 국내 유일한 장인이다. 김기호 장인이 한복 치맛단에 금박을 올린 후 여분의 금박을 제거하는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금박 공예는 과정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매우 섬세한 손놀림과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김기호 장인의 공방은 금박 공예의 과거와 현재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작은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궁중 예복을 비롯해 댕기, 족두리, 복주머니 등에서는 화려한 전통 복식을 엿볼 수 있고 넥타이나 보석함, 브로치 등에서는 현대적 쓰임새를 확인할 수 있다.“예로부터 금은 색이 변하지 않고 귀했기 때문에 최고의 권위를 나타냈어요. 조선(1392~1910) 왕실에서도 제한적으로 사용했죠. 아무나 금박 무늬가 찍힌 옷을 입을 수는 없었어요.” 그가 벽에 걸린 녹원삼(錄圓衫)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옷은 순조(純祖, 재위 1800-1834)의 셋째 딸 덕온(德溫)공주가 혼례 때 입었던 것을 그가 직접 재현한 것이다. 그의 말처럼 금박은 위엄을 나타내고 화려함을 더하기 위해 왕실 복식에만 사용되었으며, 왕실 내에서도 지위에 따라 용‧봉황‧꽃 등 무늬에 차등을 두어 사용했다. 그러나 조선 시대 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규제가 완화되면서 민가에서도 결혼, 회갑, 돌잔치 등 일생에 한 번뿐인 특별한 날에는 금박을 새긴 옷을 입을 수 있었다. 기술과 창의 김 장인이 판재에 도안을 그려 넣은 후 양각으로 깎아내고 있다. 그는 5년 이상 잘 건조된 돌배나무를 문양판으로 사용하는데, 목질이 단단하면서도 무늬가 잘 새겨지기 때문이다. 금박은 금 조각을 망치로 두드려 종이처럼 얇게 만든 재료를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금박을 제조하는 장인을 금박장, 금박으로 문양을 꾸미는 장인을 도다익장(都多益匠)이나 부금장(付金匠)으로 부르며 세분화해 구별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 금박을 기계로 만들고부터 이 기술은 점차 명맥이 끊겼고, 대중들이 ‘금박’과 ‘금박 문양’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현재는 금박으로 옷감에 무늬를 장식하는 기술을 가진 이를 금박장이라 부른다. 금박 장식은 얼핏 보면 매우 단순한 과정을 거친다. 문양을 새긴 목판에 접착제를 바르고, 그것을 옷감 위에 눌러 찍은 다음 풀이 묻은 부위에 금박지를 올리면 된다. 하지만 과정 하나하나가 고도의 집중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우선 문양을 새길 판재는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해 5년 이상 건조한 나무를 사용한다. 김 장인은 목질이 단단하면서도 무늬가 잘 새겨지는 돌배나무를 쓴다. 끓는 물에 콩기름을 넣고 판재를 2분여간 담갔다가 꺼낸 후 그늘지고 통풍이 잘되는 곳에서 말린다.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해야 문양판이 틀어지지 않고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다음에는 대패와 사포로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는다. 이제 문양을 새길 차례다. 도안을 판재에 그려 넣고, 도구를 이용해 양각으로 깎아낸다. 풀을 발랐을 때 깎인 틈새로 들어간 풀을 쉽게 제거할 수 있도록 비스듬히 경사를 주며 깎는 게 요령이다. 금박을 붙이는 데는 어교(魚膠)를 사용한다. 말린 민어 부레를 물에 오랜 시간 끓여서 만든 어교는 접착력이 매우 뛰어나 예부터 왕실의 예복이나 공예품 외에 고급 음식에도 사용한 천연 접착제이다. 붓에 풀을 묻혀 문양판에 고루 바르는데, 이때 풀의 농도가 관건이다. 풀칠이 너무 강하면 금박이 들러붙어 문양이 뭉개지고, 약하면 금박이 제대로 붙지 않아 문양이 찍히지 않기 때문이다. 풀칠이 끝나면 작업대 위에 직물을 펴고 원하는 위치에 문양판을 도장 찍듯이 꾹꾹 누른다. 그리고 풀이 묻은 부분에 금박을 올리는 동시에 마른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려 붙인다. 이때 풀이 완전히 마르기 전에 빠르고 정확하게 붙여야 하고, 충분히 건조한 다음 문양 바깥에 묻은 금박을 떼어내 다듬으면 완성이다. 금박을 입히는 것이 기술의 영역이라면 문양을 디자인하고 조화롭게 배치하는 것은 창조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좌우 대칭을 중시합니다. 비례와 균형이 정확해야 아름답다고 느끼는 거죠. 반면에 우리는 비대칭이 자연스럽고 아름답다고 여깁니다. 저는 이걸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작업 중 문양을 만드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다. 어떤 도안을 어느 위치에 넣을지, 여백 처리는 어떻게 할지 설계를 하듯 미리 짜야 한다. “문양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집니다. 저는 문양도 동시대와 소통하며 진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또 같은 문양이라도 어떻게 표현하고 담아내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죠.” 과거에서 온 첨단 공학 김 장인은 5대째 금박 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가업은 철종(哲宗 재위 1849-1863) 때 왕실에 옷감을 납품하던 고조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됐다. 당시에는 금박을 중국에서 주문해 사용하는 일이 잦았는데, 제때 도착하지 않아 애를 태우는 일이 많아지자 그의 고조할아버지가 직접 금박을 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금박 제조 기술은 그의 할아버지까지는 이어졌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구전으로만 전한다.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에 이어 할아버지도 궁궐에서 일을 하셨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인 영친왕비(英親王妃)와 고종황제의 고명딸 덕혜옹주(德惠翁主)의 옷에도 금박을 만들어 장식하셨다고 들었어요.” 그가 다섯 살 때인 1973년, 금박장이 국가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되면서 그의 할아버지가 첫 번째 금박장이 되었다. 하지만 지병이 있었던 할아버지가 몇 개월 후 세상을 뜨자 보유자 사망으로 인해 금박장 종목이 폐지되고 말았다. “당시에 아버지가 회사에 다니며 전수 중이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바로 직장을 그만두고 금박 일에 전념하셨죠. 저도 회사에 다니다가 아버지 건강이 나빠진 것을 계기로 퇴사하고 본격적으로 투신했고요. 이것도 내림인가 봐요.” 그의 아버지 김덕환(Kim Deok-hwan, 金德煥)은 금박장이 해제된 지 33년 만인 2006년에 부활한 국가무형문화재 금박장의 첫 번째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아버지가 작고하기 직전인 2018년에는 그가 뒤를 이어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삼성전자에서 4년여간 로봇을 설계한 공학도였다. 사명감이 컸다고 해도 퇴사 결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조직 생활이 내게 맞지 않다고 느낄 때라 결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회사 일은 다른 유능한 인재가 대신할 수 있지만, 가업은 제가 잇지 않으면 끊어지니까요. 미래 사업으로도 승산이 있다고 확신했고요. 본격적으로 일을 해 보니 로봇 설계하는 일이나 1mm의 만분의 1 두께인 마이크로미터 단위의 금박과 씨름하는 일이 크게 다르지 않더라고요. 금박 한 겹이 약 0.1㎛입니다. 금박 만드는 기술도 일종의 하이테크인데, 그 옛날 이미 고도의 기술력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죠.” 퇴사하고 그는 제일 먼저 홈페이지부터 만들었다. 인터넷이 대중화된 지 얼마 안 된 1997년 당시로선 무척 앞서간 행보였다. 온라인 판매까지 염두에 두고 해외에도 알릴 생각을 했지만, 하필이면 그해 외환 위기가 터졌다. “3개월간 수입이 한 푼도 없었어요. 다행히 오랜 고객들이 외국 나간 자식들이나 손주들을 위해 꾸준히 주문을 해 주어 버틸 수 있었죠. 지금은 각종 금박 작업 의뢰 외에 저희 공방 브랜드로 문화 상품을 만들어 판매도 합니다.” 장인 가족 문양은 심미적인 기능 외에도 상징성을 지닌다. 장수를 의미하는 목숨 ‘수(壽)’나 행복한 삶을 바라는 ‘복(福)’자 같은 문자 문양을 비롯해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석류나 부귀영화를 뜻하는 모란 등은 흔히 사용되는 길상 문양이다. 가업이 가내수공업인 경우 대체로 가족이 기술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작업인 작업 특성상 혼자 소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어머니라는 또 다른 장인들이 곁에 계셨기 때문에 가업을 이어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아내도 제 분신이라고 할 만큼 줄곧 함께해 오고 있습니다.” 그의 동갑내기 아내 박수영(Park Soo-young, 朴秀英)은 2009년 이수자로 지정됐고,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아들도 일을 돕고 있다. 박 이수자는 2022년 재단법인 예올(YÉOL)의 ‘올해의 장인’에 선정돼 예올과 샤넬의 프로젝트 전시에 작품을 선보여 호평받았다. 예올은 한국의 공예 장인들과 젊은 공예 작가들을 후원하는 활동을 벌이는 단체다. “전통적 아름다움이 현대적 감각과 조화를 이루면서 금박 작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요. 금박은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명예, 부, 사랑 같은 소망들을 담아 금박을 입히죠.” 요즘 그가 작업에 더 몰두하는 것도 박물관 건립이라는 궁극의 꿈이 있기 때문이리라. 이기숙(Lee Gi-sook 李基淑) 자유기고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가

오래된 미래를 꿈꾸다

Guardians of Heritage 2022 WINTER

오래된 미래를 꿈꾸다 전통 신은 수십 번의 제작 공정을 거쳐 완성될 만큼 정밀한 기술력과 숙련된 솜씨가 필요하다. 신분과 성별, 나이에 따라 종류가 다르고 부르는 명칭도 제각각인데, 신는 사람의 발 모양에 맞춰 형태가 완성되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황덕성(Hwang Duck-sung 黃德成) 씨는 화혜장(靴鞋匠)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6대째 전통 신을 만든다. 대대로 전통 신을 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난 황덕성 씨는 화혜장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6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한국 전통 신의 아름다움은 곡선미에 있다. 한옥 기와지붕의 처마가 그러하듯 직선으로 힘 있게 내려가다가 살짝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코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특유의 곡선미는 버선과 함께 신을 때 배가된다. 버선의 날렵한 앞 끝이 신의 맵시를 살려준다. 좌우 구분이 없는 것도 특징이다. 신다 보면 발 모양에 맞게 형태가 잡히고, 왼쪽과 오른쪽이 자연스럽게 구별되면서 발도 편해진다. 전통 신을 ‘화혜(靴鞋)’라고 한다. 목이 있으면 ‘화(靴)’, 목이 없으면 ‘혜(鞋)’이다. 이를 만드는 장인을 화혜장이라 하는데, 가죽을 다룬다고 하여 갖바치라고도 불렀다. 조선 시대(1392~1910)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TV 드라마에는 갖바치가 곧잘 등장한다. 조선 시대 통치의 근간이 된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1485)에 의하면 당시 중앙 관청에만 화혜장 수십 명이 소속돼 활동했다고 한다. 그만큼 수요가 많았으며, 그 기능도 분화돼 있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쓴 『미암일기(眉巖日記)』에 보면 과거에는 관혼상제 같은 의식은 물론이고 신분에 따라서도 소재, 모양, 색상 등을 구별해 신었다. 연령에 따라 색상과 배색에 차이를 두기도 했다. 재료는 가죽 외에도 비단, 삼베, 모시, 종이, 나무, 짚풀 등 다양하다. 오늘날 화혜는 혼례나 제례 등 특별한 날에 격식을 갖추기 위한 용도로 쓰인다. 선택이 아닌 운명 “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생활고로 배달 일을 병행하셨어요. 일반 수요가 거의 없으니 화혜만으로 밥벌이가 안 되니까요. 그게 싫어서 학교 졸업 후 잠깐 회사에 다니기도 했는데, 적성이 아니더라고요. 마침 그때 아버지가 오래 염원하던 복원 작업에 성공하셨어요. 그 과정을 지켜보며, 세상에서 잊힐 뻔했던 것을 되살려 내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 깨달았죠. 가업이 운명임을 받아들인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황덕성 씨는 태어날 때부터 예고된 장인이었다. 그의 집안은 갖바치 명가로, 예부터 왕실 장인들이 모여 살던 서울 인사동 토박이들이다. 화장과 혜장이 국가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채택되고 나서 1971년 첫 번째 화장으로 인정받은 이는 증조할아버지 황한갑(黃韓甲)이었다. 이후 2004년 아버지 황해봉(Hwang Hae-bong, 黃海逢)이 화혜장으로 통합된 국가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의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현조(玄祖)할아버지 황종수(黃種秀)가 철종(재위 1849~1863) 때 궁궐에 가죽신을 납품한 것이 시작이고, 그가 2016년 이수자가 되면서 6대째 대를 잇고 있다. “증조할아버지의 할아버지부터 왕실에 신을 만들어 올렸어요. 증조할아버지는 조선 마지막 왕실의 화장으로, 고종 황제의 적석(赤舃)을 만드셨죠. 애석하게도 기록만 있지 실물은 남아 있지 않아요. 증조할아버지가 1982년에 돌아가셨는데, 당시 아버지가 서른 살이고 제가 세 살 때였죠. 할아버지가 그보다 두 해 전 앞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맥이 끊길 뻔했지만, 다행히도 이후에 아버지께서 적석과 청석(靑舃)을 복원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대를 잇게 됐습니다.” 그가 진열장 맨 위에 있는 상자를 꺼내 보여 준다. 왕과 왕비가 신는 ‘석(舃)’이다. 붉은색 신은 왕실 의례 때 왕이나 왕세자가 제복 차림에 신었고, 푸른색 신은 왕비나 왕세자빈이 예복과 함께 신었던 것으로, 복원 전까지 옛 문헌에 기록으로만 남아 있었다. 이를 그의 아버지가 관련 학자들의 고증을 토대로 재현해 낸 것이다. 신발 제작의 첫 번째 단계인 백비를 만들기 위해 황덕성 씨가 작업대 위에 광목을 올려놓고 재단하는 모습이다. 전통 신은 숙련된 장인의 손에서 70개가 넘는 공정을 거친 후 완성된다. 사람에게 맞추는 신발 보통 ‘꽃신’이라 부르는 ‘혜’ 한 켤레를 만드는 데 종류에 따라 4일에서 10일 정도 걸린다. 숙련된 장인의 손에서 70개가 넘는 공정을 거쳐야 완성되기 때문이다. 우선 신발의 옆면인 신울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먼저 백비가 필요하다. 신울의 안쪽에 대는 백비는 모든 신발 제작의 첫 번째 단계이다. 쌀로 풀을 쑤어 광목에 삼베와 모시를 여러 겹으로 붙인 다음 며칠 동안 바람에 잘 말린다. 여기에 재단한 비단을 으깬 밥풀로 붙이면 신울이 완성된다. 밥풀칠을 할 때는 중간에 굳지 않도록 물 적신 수건을 넣은 항아리에 신울을 넣었다가 꺼내 작업하기를 반복한다. 매 단계마다 숙달된 기술뿐만 아니라 최적의 상태가 되도록 기다리는 것 또한 중요하다. 다음에는 밀랍으로 칠한 면사와 돼지털로 신울 두 짝을 연결한다. 이때 뒤꿈치를 먼저, 앞코 부분을 나중에 꿰맨다. 이어서 소가죽으로 밑창을 만들고, 신울과 밑창을 맞바느질하여 연결한 다음 마지막으로 나무로 된 신골을 넣어서 신발 형태를 잡아 준다. “비단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전통 방식대로 멧돼지 뒷덜미 갈기를 바늘로 사용합니다. 나이 든 멧돼지는 갈기가 빳빳하면서도 잘 휘어지기 때문에 가죽과 비단을 꿰매기에 딱 좋습니다. 백비에 비단을 붙일 때는 밥풀을 손으로 이겨서 사용하고요. 밥풀이 굳으면 돌처럼 딱딱해져 신의 형태를 유지해 줍니다.” 만드는 사람으로서 어떤 부분에서 혜의 묘미를 느끼느냐 묻자, 곡선을 그리며 날렵하게 올라간 신발 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코의 곡선은 걸을 때 평평한 신발이 벗겨지지 않게 하는 기능적인 측면도 있다. “왼쪽과 오른쪽의 구별이 없다고 하지만, 조금 신다 보면 형태가 만들어지면서 저절로 구분이 됩니다. 우리 전통 신은 사람이 신에 맞추는 게 아니라 신이 발 모양에 맞게 서서히 변하면서 사람에게 맞춰 가는 게 특징이죠.”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문양을 수놓은 수혜(繡鞋)가 툇마루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전통 신은 형태와 재료,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고 명칭도 제각각이다. 그중 비단에 수를 놓은 수혜는 흔히 ‘꽃신’이라 불렸으며, 주로 반가의 여인들이 신었다. 전통 재현의 소명 한때 황 장인은 수요를 넓히기 위해 신을 개량하는 데 관심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꽃신을 사람들이 전통 신으로 오해한다는 게 문제였다. “개량한 한복처럼 요즘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취향, 기능에 맞게 변형해서 현대화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죠. 그런 시도가 저에게 자극이 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누군가는 전통 방식을 지키면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버지께서 선대의 유물을 복원해 보여 주신 것처럼 전통 그대로 후대에 물려주는 일이 저의 소명인 거죠.” 올해 7월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갤러리에서 있었던 국가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전시회는 젊은 장인에게도 반환점이 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해 3년 만에 열린 이번 전시에는 작품 전시뿐 아니라 체험 수업도 진행했는데, 신청자가 몰려 전시가 종료된 이후에도 보충 수업을 해야 했다. “신청자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이어서 반가웠어요. 우리 전통 신의 정교한 아름다움과 견고함에 놀라더군요.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니 반응이 무척 좋았어요. 현대화에 대해서만 고민할 게 아니라 강의나 시연 등을 통해 전통을 제대로 알리는 일도 중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신청 문의가 계속 이어지자, 그는 화혜 체험 강좌를 정례화해 일반 수요자들과 직접 만날 계획도 세웠다. “주요 공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재료와 기법 등을 좀 더 단순화할 방법을 찾고 있어요. 전수생이 없는 현실에서 아버지와 제가 오롯이 감당하기에 버거운 일이긴 하죠. 하지만 아내가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어머니가 아버지 곁에서 평생 힘이 되어 주신 것처럼요. 제 아들 둘이 아직은 어리지만 든든하고요.” 단절 위기에 처한 전통 공예 장인들이 가는 길은 유독 외롭기 마련이다. 그도 예외는 아니지만, 어쩐지 편안함이 느껴진다. 이기숙(Lee Gi-sook 李基淑)자유기고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사진가

고요한 마음으로 맺는 선(線)의 예술

Guardians of Heritage 2022 AUTUMN

고요한 마음으로 맺는 선(線)의 예술 전승 공예의 하나인 매듭은 집 안 살림살이를 비롯해 복식이나 의례용 도구를 장식하는 용도로 다양하게 활용되어 왔다. 40년 가까이 매듭 일을 해 온 박선경(Park Seon-keung 朴仙璟) 전승교육사는 가업을 이어 전통 매듭의 맥을 잇는 한편 현대적 감각의 작품 연구에도 힘쓰고 있다. 박선경(Park Seon-keung 朴仙璟) 전승교육사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어머니의 뒤를 이어 40년 가까이 전통 매듭의 맥을 잇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 공예의 한 분야인 매듭은 실용적 또는 장식적인 목적으로 끈목을 이용해 다양한 형태를 표현해 내는 기법을 말한다. 끈목은 여러 가닥의 실을 꼬거나 엮어서 만든 끈을 말하며 다회(多繪)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매듭 기술을 가진 장인이 매듭장이다. 고려 말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모든 규범을 집대성한 법전 『대전회통(大典會通)』(1865)에 의하면 조선 시대에는 왕실에 소속된 매듭장들이 매듭 만드는 각 과정을 분담했다고 한다. 그만큼 공정 하나하나에 전문성과 정성이 요구된다는 얘기다. 매듭은 예부터 한복의 아름다움을 배가하는 요소로 긴요히 활용되었다. 남성들의 외출복이던 도포에도 매듭과 술이 더해지면 한결 멋스러웠다. 갓에도, 부채에도, 복주머니에도 필수였다. 가마를 장식하는 오색 술의 휘장에도, 북과 해금 같은 악기에도 매듭과 술을 길게 늘어뜨리면 격식을 갖출 수 있었다. 매듭은 예부터 한복의 아름다움을 배가하는 요소로 긴요히 활용되었다. 남성들의 외출복이던 도포에도 매듭과 술이 더해지면 한결 멋스러웠다. 갓에도, 부채에도, 복주머니에도 필수였다. 가마를 장식하는 오색 술의 휘장에도, 북과 해금 같은 악기에도 매듭과 술을 길게 늘어뜨리면 격식을 갖출 수 있었다. 자연스러운 선택 박선경 장인에게 매듭은 운명 그 자체다. 전통 매듭이 국가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된 1968년, 첫 번째 매듭장이 된 이가 외할아버지 정연수(程延壽)였다. 이후 1976년에 외할머니 최은순(崔銀順)이 2대 매듭장으로 인정받았고, 어머니 정봉섭(Jung Bong-sub 程鳳燮)이 2006년 3대 매듭장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어머니에 이어 가업을 잇고 있는 박선경은 매듭장 기능보유자 전 단계인 전승교육사다. 그에게 매듭은 3대에 걸친 가족사이자 단절 위기에 처했던 우리 전통 매듭이 걸어온 일백 년 역사이기도 하다. “외할아버지가 나고 자란 서울 광희동(光熙洞)은 1930년대까지 매듭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장인촌(匠人村)이었다고 해요. 그 집단의 마지막 세대인 외할아버지가 1968년 매듭장 종목 지정과 함께 첫 보유자가 되셨어요. 자칫 꺼질 뻔했던 전통 매듭의 불씨가 살아난 거죠. 시대가 변하고 제작 방식이 기계화되었지만, 전통 방식을 고수하며 소임을 다하셨던 그분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죠.” 아담한 체구에 한복이 썩 잘 어울리는 박 장인의 말에서는 다부짐이 묻어났다.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했지만, 일찌감치 전수의 길을 걷기로 한 데는 환경의 영향이 컸으리라. 1964년생인 그는 열아홉 살이 되던 해부터 전수생 신분으로 외할머니를 정식으로 사사했고, 완벽주의자인 어머니로부터 호된 훈련을 받았다. “매듭이 워낙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자잘하게 도울 일이 많아요. 어려서부터 성격이 온순하고 손끝이 야물다고 심부름은 늘 제 차지였죠. 매듭 공예를 배워야겠다고 처음부터 작정한 건 아니었지만, 철들면서 자연스럽게 내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실을 엮고 묶고 무늬를 만들어 완성하는 작업이 오로지 한 사람 손에서 이루어지는 매듭 일이 적성에 맞았던 거죠. 작업에 집중하다 보면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져요.” 전통 매듭은 장신구뿐만 아니라 생활용품이나 악기 장식에도 쓰인다. 심벌즈와 비슷하게 생긴 향발(響鈸)은 국악 타악기의 하나인데, 매듭과 술을 길게 늘어뜨려 장식했다. 박선경 제공 섬유 예술가 신예선(Shin Ye-sun 申禮善)과 협업해 공예트렌드페어, 메종 앤 오브제 등에 출품했던 오너먼트. 박선경 제공 국화 매듭, 생쪽 매듭, 가락지 매듭 등으로 만든 비취 삼작(三作)노리개. 여성의 몸치장 용도로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허리에 착용했던 노리개는 한복에 아름다움을 더해 주는 장신구다. 박선경 제공 잠자리 매듭 등 다양한 형태의 매듭으로 장식한 각종 주머니들. 자잘한 물건들을 담아 허리띠에 착용했던 주머니는 과거, 남녀노소 모두에게 필요한 실용품이었다. 일반적으로 여성용 주머니는 빛깔이 고운 천에 화려한 매듭과 술을 달아 장식했던 반면 남성용 주머니는 과다한 장식을 삼가고 수수하게 만들었다. 박선경 제공 인고의 산물 매듭 공예를 위해서는 우선 끈목이 필요한데, 이를 만드는 것부터가 복잡하고 녹록하지 않다. “명주실 생사(生絲)를 푸는 것부터 시작해 크게 5~6단계에 이르는 과정마다 숙련된 기술이 필요합니다. 염색도 매번 똑같은 색이 나오기가 어려워요. 중심에서 시작해 중심에서 끝내야 하는 매듭의 특성상 완성 후 좌우 대칭 균형은 물론 앞면과 뒷면이 동일해야 돼요.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선 안 되는 매우 섬세한 작업입니다.” 매듭의 종류는 맺은 모양에 따라 30여 가지가 있다. 거북, 잠자리, 병아리, 나비, 벌, 국화, 매화, 연꽃 등 주로 동식물의 이름을 붙인다. 매듭의 구성 요소인 술의 호칭도 마찬가지다. 낙지처럼 발이 많다고 해서 낙지발술, 술머리가 딸기처럼 생겨서 딸기술, 원기둥꼴의 봉술 등 다양하다.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허리에 매다는 노리개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짧게는 열흘, 대작의 경우 몇 달씩 걸려요. 노리개에 달린 한 가닥의 술조차도 쉬지 않고 수백 번 실을 꼬아서 완성합니다.” 매듭은 그야말로 인내와 끈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선의 예술이라고 할 만하다. 중국의 매듭은 다양한 모양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고, 일본은 매듭 자체의 장식성보다는 끈의 기능에 중점을 둔다. 이와 달리 우리의 전통 매듭은 단색의 끈목을 이용해 무늬를 맺고 술을 달아 아름다운 선을 완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사람들이 가끔 평생 매듭 일 하는 게 질리지 않느냐 묻지만, 힘들 때는 있어도 질리지는 않아요.” 아무리 솜씨가 뛰어나도 그 일을 지겨워하면 진정한 장인이라 할 수 없다. 그가 일찌감치 전수생이 되어 곁눈질 한 번 없이 40년 가까이 정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재능이나 운보다도 일을 좋아하는 그의 본성 때문일 것이다. “거의 일 년에 하나씩 제 작품을 주문하는 분이 계세요. 선물용이냐고 물었더니, 평소에는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 두고 보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니 그림보다 좋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힘을 얻기도 했죠.” 박선경 전승교육사가 다회틀을 사용해 여러 올의 실을 엮어 끈목을 만드는 모습이다. 이렇게 만든 끈목은 매듭 공예의 기본 재료가 된다. 시대와 소통하기 박 장인은 전통을 잇는 작업 외에도 현대적 감각을 접목한 새로운 시도에도 적극적이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공예트렌드페어(Craft Trend Fair)’(2018~2019)와 파리 노르 빌팽트(Paris Nord Villepinte Exhibition Centre)에서 개최된 ‘매종 앤 오브제(Maison&Objet)’(2019~2020) 전시에서는 섬유 예술가 신예선(Shin Ye-sun 申禮善)과 협업해 유리볼에 매듭을 씌우고 장식한 오너먼트들을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대중화라는 나름의 목적도 있지만, 선대의 전통 매듭이 그 시대와 소통했기에 살아남았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매듭에서 인생을 배운다. “한 올이라도 잘못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요. 슬쩍 넘어갔다간 결국 티가 나서 작품 전체를 망치고 말아요. 아예 풀어버리고 정직하게 다시 시작하는 게 최선이죠.” 매듭 일을 하겠다고 결심한 스무 살 무렵, 그는 자신이 매듭을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 매듭이 자신을 선택했고 그런 운명에 감사한다. “이런 일이 참 외로운 작업이라고 하는데, 저는 어머니가 곁에서 지켜봐 주셔서 다행이에요. 최근에는 매듭 일이 많아지면서 전문직으로 일하던 오빠와 여동생도 전업해 이수자로 함께하고 있어요. 또 제게 딸이 셋 있는데, 나름대로 재주와 열의를 보이고 있으니 참 복이 많은 거죠.” 전통 공예 일을 하는 많은 장인들이 맥이 끊기는 위기 속에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다. 그런데 그에게는 같은 길을 걷는 형제자매가 있고 대를 물릴 딸들이 있으니 분명 복이 많은 사람이다. 서울 삼성동 국가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National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Training Center)에 마련된 그의 공방에는 어머니 정봉섭 기능보유자와 박 장인, 그의 오빠 박형민(Park Hyung-min 朴炯敏)과 여동생 박선희(Park Seon-hee 朴宣熹)의 작품이 나란히 전시돼 있다. 닮아 있으면서도 어딘지 달라 보이는 작품들은 고유한 조형미를 견지하면서도 서로의 스타일을 존중해 주는 그들의 마음을 보여 주는 듯하다. 2021년 8월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린 전시에 출품했던 망술 삼천주(三千珠). 불교적 의미가 담겨 있는 삼천주는 궁중(宮中) 여인들이 사용하던 노리개로 커다란 진주 세 개를 매듭으로 엮은 형태다. 박선경 전승교육사는 전통 기법으로 망을 짠 뒤 진주 대신 유리 구슬을 사용해 현대적 감각을 담았다. ⓒ 한국문화재재단 이기숙(Lee Gi-sook 李基淑)자유기고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사진가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바람

Guardians of Heritage 2022 SUMMER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바람 전통 부채를 만드는 기능을 보유한 사람이 선자장(扇子匠)이다. 김동식(Kim Dong-sik 金東植) 장인은 전라북도 전주에서 4대째 가업을 이어 부채를 만들고 있다. 60년 넘게 전통 방식으로 작업을 해 오고 있는 그는 2015년 국가무형문화재 선자장으로 지정되었다. 선풍기와 에어컨이 없던 시절 부채는 여름을 나는 생활필수품이었다. 바람을 일으키는 용도 외에도 신분을 드러내는 장식품으로, 혼례나 상례 같은 예식 때도 의례용으로 들고 다니는 휴대품이었다. 조선 시대 양반들은 둥근 부채보다 접부채, 그중에서도 합죽선(合竹扇)을 사랑했다. 바람 이는 소리와 함께 폼 나게 펴서 부쳤다가 순식간에 접어 도포 자락에 집어넣는 신공을 즐겼다. 부채에 그림을 그려 화첩 삼아 들고 다녔고, 등이 가려울 땐 효자손으로, 비상시엔 무기로도 요긴했다. 남녀가 은밀히 만날 때는 얼굴을 가리는 도구로 필수적이었다. 한국의 부채는 형태에 따라 둥근 모양의 부채[團扇]와 접고 펼 수 있는 접부채[接扇]로 나뉜다. 단선은 손잡이를 중심축으로 부챗살이 방사형으로 이어진다. 접선은 부챗살의 개수와 재료, 부채 바탕의 꾸밈, 부속품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그중 합죽선은 고려 시대부터 나전, 금속, 칠, 옥 공예 등과 접목돼 대표적인 국교품으로 발전해 왔다. 조선 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부챗살 수도 제한했다. 왕실 직계만이 50개를 넣을 수 있었고, 사대부는 40개, 그 아래 중인과 상민 계층은 그보다 살이 적은 부채를 사용했다. 조선 후기의 학자 홍석모(洪錫謀 1781~1857)가 펴낸 세시풍속집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보면, 단오(음력 5월 5일)에 단오부채를 만들어 진상하면 왕은 이것을 재신과 시종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나라에서는 선자청(扇子廳)이라는 기구를 두어 부채 만드는 일을 관리 감독하고, 전라감영(옛 전라도청)에서는 각 지역에서 제작된 부채를 모아 임금에게 올렸다. 지난한 공정 크고 작은 대나무 조각들이 빼곡히 들어찬 작업실에서 한창 일하던 김동식 장인이 얇게 깎은 대나무를 들어 보여 준다. “합죽선은 이렇게 얇게 깎아 낸 대나무 겉대를 두 개씩 맞붙여서 만든 부채입니다. 속대만 사용하는 중국, 일본의 접선과 달리 합죽선은 견고해서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지요. 우리 전통 부채만의 특징입니다.” 합죽선 하나를 만드는 데는 140~150번의 공정을 거친다고 한다. 우선 적합한 대나무를 찾아야 한다. 대나무는 첫해에 훌쩍 다 자라고 이후에는 속으로 여물기만 하는데 3년은 되어야 적당히 단단해진다. “새로 난 대나무가 보기에는 멋져 보이지만 짜개 보면 속이 물렁해서 쓸 수가 없어요. 3년 된 대나무가 가장 알맞습니다. 또 습기가 차면 좀이 슬기 때문에 건조한 12월과 1월에 일 년치 재료를 마련해야 합니다. 집 지을 때 겨울철에 벌목한 목재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죠.” 색깔이 깨끗한 대나무를 골라 부챗살 치수에 맞게 쪼갠 다음 겉대를 물에 담가 5일 정도 불린다. 그러면 초록빛이 돌던 겉대가 부챗살 특유의 누런색을 띠게 된다. 다음부터가 핵심이다. 대나무 겉대를 끓는 물에 담가 불려 가면서 0.3~0.4mm 두께로 속대 쪽을 얇게 깎아낸다. 이 단계까지 깎여 나간 대나무 양이 3분의 2 정도 된다. “합죽선 만드는 과정에서 이 작업이 제일 힘들어요. 빛이 투과할 만큼 얇게 깎아 내야 접고 펴는 게 부드럽고 탄력도 좋아 바람을 더 시원하게 몰고 옵니다. 겉대는 잘 썩지 않고 단단해서 관리만 잘하면 500년도 가죠.” 얇게 깎아 낸 대나무 겉대 2개를 풀로 맞붙인 다음 부채 형태를 잡아 일주일 정도 말린다. 이때 민어의 부레를 말려서 끓인 부레풀과 동물의 뼈와 힘줄, 가죽 등을 고아 만든 아교풀을 4:6 비율로 섞어서 사용한다. 그래야 떨어지지 않고 오래간다. 부채 골격이 만들어지면, 불에 달군 쇠붙이로 부챗살 아래쪽에 하나하나 문양을 새겨 넣는다. 주로 박쥐, 매화, 용 등의 그림을 넣어 예술성을 높인다. 그다음, 손잡이 부분에 사용할 재료를 깎고 다듬는데 주로 대추나무, 먹감나무, 박달나무 등을 사용해 그 위에 얇게 깎은 대나무 겉대를 붙이거나 나전과 함께 옻칠 또는 주칠로 화려하게 마무리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상아나 우족도 사용하고 거북이 등껍질을 붙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매끄럽게 광을 낸 다음 부챗살에 고루 풀을 입히고 미리 재단해 놓은 한지를 붙인다. 마지막으로 황동, 백동, 은 등 금속으로 고리 장식을 만들어 손잡이를 고정시키면 비로소 한 개의 합죽선이 완성된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이러한 작업을 6개 부문으로 나눠 여러 사람들이 분업했다고 한다. 정교한 작업인 만큼 손이 많이 가고 수요도 많았던 시절 얘기다.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김동식(Kim Dong-sik 金東植) 선자장은 합죽선을 만드는 과정에서 대나무를 얇게 깎아내는 작업이 가장 어렵다고 말한다. 최장수 합죽선 명가 합죽 작업까지 마치면 부채 형태를 만들고 장식하는 이후의 공정은 별도의 공방에서 작업한다. 김 장인이 밥 먹는 시간 외에 하루 종일 기거하는 방이다. 한쪽 벽면에 가지런하게 정렬된 무쇠 칼들과 연장들, 세월을 가늠키 어려운 작업대에서 60년 넘는 내공이 단번에 느껴진다. “원래는 넓적하던 무쇠가 20년 갈아서 쓰다 보니 이렇게 회칼처럼 가늘어진 겁니다. 이 줄칼은 제 외할아버지가 만들어 쓰시다 제게 물려주셨죠.” 선반과 문틀 사이 벽에 걸린 빛바랜 흑백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조선 말 고종 황제에게 진상할 만큼 솜씨가 당대 최고였다고 합니다. 다행인지 저는 어린 나이에 배우기 시작해 기초부터 세부적인 모든 기술을 외할아버지 곁에서 보고 익혔죠.” 김 장인의 집안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 합죽선을 대물림해 만들고 있다. 1대 외증조할아버지에서 시작해, 흑백사진 속 외할아버지인 2대 라학천(羅鶴千), 3대 외삼촌 라태순(羅泰淳)을 거쳐 김 장인이 4대를 잇고 있다. 그가 합죽선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열네 살이던 1956년부터다.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외가에서 살다시피 하며 배웠다. 당시 외가가 있던 마을은 부채 장인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던 곳으로, 부채의 주재료인 대나무와 한지를 만드는 닥나무가 풍부했다고 한다. “부채가 생활필수품이었던 때라 착실히 배우면 먹고살 만했죠. 처음엔 허드렛일만 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웠습니다. 손재주가 있었는지 대나무를 힘 안 들이고 예쁘게 깎는 걸 어른들이 보시더니 그제야 제대로 가르쳐 주시더라고요. 제가 우직한 성격이라 배운 대로 곧잘 만들어 내니까 칭찬을 많이 해 주셨어요. 그 바람에 정말 열심히 배웠죠.” 단순한 기술자와 장인의 차이는 발심(發心)에 있는 것일까. ‘이왕 일을 시작했으니 멋진 작품을 만들자’고 다짐한 그는 외할아버지에게 배운 정교한 제작 방식을 그대로 재연하면서 자신만의 합죽선을 만들고 싶었다. 그의 부채는 손에 쥐면 부드럽게 감기고 펼쳤을 때 부챗살과 정확히 반원 대칭이 된다. 그의 합죽선이 특별히 우아하고 품격이 느껴지는 이유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포기할 뻔한 적도 있었다. 한번은 보증 선 게 잘못되어 수중에 재료 살 돈은커녕 당장 먹고 살 돈도 없을 때였는데, 한 친구가 선뜻 돈을 빌려주며 그에게 했던 말을 평생 잊지 못한다. “너는 부채 만드는 재주를 타고 났으니 절대 놓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 말이 가슴에 박혀 이후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2019년 이수자가 된 아들 김대성(Kim Dae-sung 金大成) 씨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으며 전통 부채의 명맥을 잇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김 장인은 지금도 합죽선 만드는 전 과정을 직접 손으로 해내고 있다. 명품을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버텨 왔으나 경제적 위기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부채를 만들어서 생활이 제대로 안 되니 젊은이들이 이 일을 하려고 하질 않아요. 그렇다고 제 대에서 이 전통이 끊어지게 할 수 없어서 다른 일을 하던 아들에게 넌지시 의향을 물었죠. 고맙게도 선뜻 해 보겠다고 하더라고요.” 2007년부터 5대째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아들 김대성(Kim Dae-sung 金大成)은 늦게 시작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자라서인지 빠르게 배워 나갔다. 장인은 대를 잇는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우리 고유의 기술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이라도 받고자 문화재 신청을 했다. 3년에 걸쳐 관련 기록들을 정리하고 만들기 공정을 체계화해서 마침내 2015년 국가무형문화재 ‘선자장 1호’로 지정받았다. 그가 부채 기능인으로서는 최초로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음으로써 전통 부채의 명맥을 잇는 몇 안 되는 장인들에게도 동력이 되었다. 이어서 아들도 2019년 이수자가 되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작업실 한켠에서 줄곧 대나무를 깎고 있던 청년이 일을 마치고 인사한다. 김대성의 아들, 김 장인의 손주다. “대학교에 갓 입학한 손주가 만들어 보고 싶다며 다니고 있긴 한데, 제가 딱히 하라고도 하지 말라고도 못 하는 형편입니다.” 장인은 손주가 대견하면서도 자식들 외에 합죽선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없는 게 못내 아쉽다는 표정이다.

영원히 지지 않는 꽃

Guardians of Heritage 2021 WINTER

영원히 지지 않는 꽃 한지를 천연염료로 염색해 만드는 지화(紙花)는 제작에 드는 비용과 시간 때문에 생화가 점차 그 용도를 대신하게 되면서, 오늘날 간신히 명맥을 이어 가고 있는 전승 공예 중 하나다. 1980년대 초 지화 공예에 입문한 석용(石龍) 스님은 불교 의식에 사용되었던 전통 지화를 복원하며 꾸준히 지화를 널리 알리는 데 힘써 왔다. 한지를 쑥으로 염색한 뒤 살접기 기법으로 만든 연꽃 봉오리들. 전통 지화는 한지를 천연 염료로 물들이고 적당한 습기를 먹인 다음 살접기, 접기, 말기, 끌기와 같은 4가지 기법으로 만든다. 이 중 예리한 칼을 사용해 정교하게 주름을 잡는 살접기가 가장 까다롭다. 지화는 불교 및 무속의 제반 의식에서 널리 활용되어 왔으며, 궁중 의례에서도 태평성대에 대한 바람을 담아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뿐만 아니라 민가에서도 혼례나 상례 같은 중요한 의례에 두루 사용되었다. 한겨울에도 비닐하우스에서 꽃을 대량 재배할 수 있는 오늘날에는 과거 지화가 차지하던 자리를 생화가 대신하고 있지만, 불가에서는 대규모 의식에 여전히 지화를 사용한다. 이는 불교에서 꽃이 종교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석가모니는 연꽃 한 송이를 들어 가섭존자에게 불법을 전했고, 다수의 불교 경전들이 꽃을 깨달음의 경지로 비유하고 있다. 한국어 단어 ‘장엄(莊嚴)’은 웅장하고 엄숙하다는 의미인데, 불교에서는 이 단어가 부처를 공양하기 위해 도량을 꽃으로 장식하는 일을 가리킨다. 사찰에서 지화를 만들게 된 것도 꽃을 꺾는 것을 살생으로 여겼던 전통에서 기인한다. 이 ‘웅장하고 엄숙한’ 일을 40년 동안 수행 삼아 해 온 승려가 있다. 2008년 첫 전시회 이후 꾸준히 지화 공예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해 온 석용스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뛰어난 솜씨와 노력을 인정받아 2017년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천연염색 지화를 처음 접한 이들의 입에서는 하나같이 탄성이 터져 나온다. 오묘한 색깔은 물론 섬세함이 예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사람의 손으로 그런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서는 고된 노동과 기나긴 인내가 필요하다. 석용 스님이 지화를 수행의 과정으로 여기는 것은 재료 준비부터 시작해 꽃 한 송이를 완성하는 데 1년이 걸릴 정도로 그 제작 과정이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지를 갖가지 천연염료로 물들인 후 꽃잎의 주름을 잡고 형태를 만든 뒤 대나무살로 꽃대를 만드는 과정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석용(石龍) 스님이 살목단을 만들고 있다. 40년간 전통 지화 복원과 제작에 힘써 온 그는 뛰어난 솜씨와 노력을 인정받아 2017년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접착할 때 사용하는 풀만 하더라도 만드는 데 6개월 이상이 걸린다. 통밀이나 찹쌀 같은 재료를 물에 담갔다가 거품이 끓어오르면 그 물을 버리고 새 물에 담그는 과정을 3~6개월 동안 반복해 곡류의 성분이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풀기만 남을 때까지 삭힌다. 이 과정을 다시 한 번 반복하여 얻게 된 풀을 사용해야 종이에 좀이 쓸지 않는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된 영산재는 보통 3~5일 동안 치러지는데, 저는 1년 반 전부터 지화를 준비합니다. 재를 지낸 후 소지되는 지화를 보면서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안 한다 마음을 먹지만 어느새 다음 재를 준비하게 되더군요.” 지화를 만들기 위한 본격적인 첫 작업은 염색이다. 꽃잎에 색을 내기 위해 스님은 한 해 전부터 원료를 채취해 건조시킨다. 파랑은 쪽, 빨강은 소목(蘇木), 노랑은 치자 열매, 녹색은 쑥, 그리고 보라색은 머루와 지초(芝草)에서 얻는다. 이 외에도 양파에서 옅은 노란색을, 홍화에서 선홍색을 추출해 쓴다. 손이 가장 많이 가는 재료는 쪽과 홍화이다. 쪽 염색은 별도로 중요무형문화재가 있을 만큼 쪽풀을 발효시켜 색을 얻는 과정이 복잡하고, 홍화 또한 다루기 어려운 재료다. 무엇을 사용하든 원하는 색감을 얻기 위해서는 염료에 종이를 담갔다가 꺼내 말리고 다시 적시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한다. 이러한 수고 끝에 생화처럼 보이는 지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 “다른 계절에도 필요에 따라 하긴 하지만, 염색 작업은 주로 봄철에 합니다. 3~4월에 종이가 아주 잘 마르거든요.” 습 먹이기와 살접기 지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스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은 꽃잎을 만들기 전 종이 상태를 조절하는 것이다. 종이가 건조하면 꽃잎의 주름이 금세 펴지고, 눅눅하면 주름 자체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스님이 ‘습(濕) 먹이기’라 부르는 이 과정은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한 손끝의 감각이 필요하다. 수건을 물에 적셔 꼭 짠 후 펼쳐 놓고 종이를 얹는다. 그 위에 다시 수건을 올리고 종이를 놓아 겹겹히 쌓은 후 비닐로 싸매 따뜻한 방에 한두 시간 정도 둔다. 그러고 나서 손으로 만져 보면 주름을 접어도 되는 상태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다. 이렇게 적절한 수분을 머금고 있는 종이로 꽃을 만들어야 10년이고 20년이고 세월이 지나도 형태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 “비 오는 날에는 꽃을 접지 못해요.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방에 불을 때 습도를 낮춰야 하지요. 더운 여름날에는 종이가 마를까 봐 선풍기도 함부로 틀지 못해요. 한지가 워낙 습도에 민감하기 때문이지요. 만졌을 때 약간 빠닥빠닥한 느낌이드는 것이 알맞은 상태입니다.” 그가 가장 많이 만드는 꽃은 불단을 장엄하는 모란, 작약, 국화, 연꽃이다. 민간에서 모란과 작약은 부귀영화를 뜻하지만 불교에서는 불심을 상징하며 이 꽃들은 상단에 놓인다. 중단에는 국화와 다리화를, 하단에는 주로 연꽃으로 장엄한다. 꽃잎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종이를 접어 주름을 잡아야 한다. 이때 살접기, 접기, 말기, 끌기 크게 4가지 기법이 쓰인다. 이 중 예리한 칼로 한지를 꾹꾹 눌러 정교한 주름을 만드는 살접기가 가장 어렵다. 손에 힘이 조금만 더 실려도 종이가 베어지기 때문에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다. “한번은 전시회를 구경하던 관람객 한 분이 저렇게 주름 잡힌 종이는 어디에서 파는지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제가 편한 방법으로 작업하면 결코 자연 속 꽃의 느낌을 연출할 수 없어요. 살접기를 오래 하면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프지만, 수행하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공정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화 작업에 쓰이는 다양한 종류의 칼과 송곳, 망치들. 망치와 물고기 칼은 꽃대의 재료인 대나무와 싸리나무를 다듬을 때 사용하며, 송곳은 주로 국화를 만들 때 꽃잎을 고정하는 데 쓴다. 지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스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은 꽃잎을 만들기 전 종이 상태를 조절하는 것이다. 종이가 건조하면 꽃잎의 주름이 금세 펴지고, 눅눅하면 주름 자체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통 지화의 복원 보존된다면 천년이 간다고 하지만, 지화가 유물로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의식이 끝나면 사용한 지화는 태워버리기 때문에 전통 지화의 실물은 문헌과 그림을 통해서만 전해진다. 더군다나 제작 방법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1980년대 초반 석용 스님은 천태종 총본산인 충북 단양 구인사(救仁寺)에 계시던 춘광(春光) 스님으로부터 사찰을 통해 근근히 명맥이 유지되어 온 지화 몇 종류의 제작법을 사사받았다. 이렇게 지화 공예에 입문하게 된 스님은 사라진 전통 지화의 원형을 재현하고자 전국에 몇 명 남아 있지 않은 장인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의 사료에 나오는 지화들을 참고했다. 지화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그림은 불화로 그중 지옥에 떨어진 영혼의 극락왕생을 비는 감로탱화(甘露幀畵)에 비교적 잘 표현되어 있어 이를 토대로 한 지화를 여럿 복원했다. 그는 “전하는 이야기로 약 60종의 전통 지화가 있었다”며 지금까지 복원한 것이 25종 정도 되니 나머지를 찾아내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말했다. 100여 년 전의 시대상을 담은 책 한 권도 스님이 보물처럼 아끼는 귀한 자료다. 책에 실려 있는 한 장의 흑백 사진 때문이다. 불국토를 상징하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표현한 작품이다. 석용 스님은 연꽃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3박 4일에 걸쳐 꽃이 피고 지는 과정을 관찰했다. . 220 × 180 ㎝. 부채난등은 지화를 장엄하는 형태 중 하나로 아래에서 위로 꽃송이가 점차 늘어나게 만든다. 꽃 모양이 부처의 머리처럼 곱슬곱슬한 불두화는 사찰에서 정원수로 많이 심는 꽃이다. “제가 2000년대 중반 덴마크 코펜하겐의 천태종 사찰 고광사 주지로 있을 때 스웨덴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그곳의 한 서점에서 우연히 아손 그렙스트(W. A:son Grebst) 기자가 쓴 조선 방문기 『I.KOREA』(Elanders Boktryckeri Aktiebolag 출판사, 1912)를 발견했는데, 사진 한 장에서 살모란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스님은 전통 지화를 해외에도 알리기 위해 덴마크, 캐나다, 일본, 벨기에,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특히 2014년 6월 미국 메릴랜드 찰스 카운티에서 열린 제22회 찰스 카운티 문화 축전에서는 제작 체험 부스를 운영해 현지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2017년 7월에는 한미문화예술재단이 주최하는 제12회 워싱턴 한미문화축전 행사에서 30여 점이 넘는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2미터 높이에 달하는 화려하고 웅장한 부채난등(부채 형태의 꽃꽂이)과 250여 송이 꽃으로 연출한 팽이난등(팽이 모양의 꽃꽂이)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한번에 사로잡았다. “그때 찰스 카운티의 피터 머피 커미셔너 의장이 저에게 다가와 감동적이었다고 하면서 자신의 옷깃에 꽂고 있던 카운티 배지를 제 도포에 꽂아 주었습니다. 행사장에 있던 기자들이 무척 놀라워했어요.” 현재 스님은 경기도 이천에 있는 한 건물을 임대해 작업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문화재 지정을 받은 덕분에 제자를 키워 낼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은 마련되었지만, 여전히 척박한 환경 속에 놓여 있다. 그는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지화 기법을 전수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공간이 마련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비쳤다. . 200 × 85 ㎝. 살접기 기법으로 만든 모란을 화병에 팽이 모양으로 꽃꽂이했다. 일본 효고현 약선사(藥仙寺 Yakusenji Temple) 소장 감로탱화 속 지화를 재현한 작품이다. 이 탱화는 조선 중기 1589년도에 제작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감로탱화이다.

정직한 돌을 쪼는 우직한 석공

Guardians of Heritage 2021 AUTUMN

정직한 돌을 쪼는 우직한 석공 이재순(Lee Jae-sun 李在珣) 씨의 지난 반세기는 화강암과의 씨름이었다. 단단하고 결이 치밀해 석공에게는 큰 도전이지만, 한국의 석조 문화재는 대부분 이 돌로 만들어졌다.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석장 부문의 최초 명장인 그의 손끝에서 많은 문화재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현대식 기계와 장비가 도입되면서 전통 석조물 제작 기법이 차츰 사라져가고 있는 요즘, 이재순(Lee Jae-sun 李在珣) 씨는 여전히 망치와 정으로 돌을 쪼아 작품을 만든다. 그는 2007년 신설된 국가무형문화재 석장 분야에서 최초의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재순 석장의 경기도 구리시 작업장엔 돌조각들이 가득했다. 입구에는 높이 10m가 넘는 미륵상이 우뚝 서 있었고, 주변에 부처상과 사자상 등 수많은 석상들이 자리를 차지하며 각기 명장의 솜씨를 드러내고 있었다.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난 이 석장이 돌을 처음 손에 잡았던 것은 그의 나이 불과 13세 때였다. 석공 일을 하던 외삼촌과 형의 일손을 도우면서부터였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와 일머리가 좋아 썰매나 팽이를 직접 만들었던 그는 석공 일도 남들보다 빨리 배웠다. 외삼촌을 따라 문화재 공사 현장을 다니며 돌 다루는 기초 기술을 익혔다. 좋은 스승 그는 타고난 솜씨뿐만 아니라 좋은 스승을 만나는 행운도 누렸다. 1970년엔 서울의 유명한 석공 김부관(金富宽) 선생을 찾아가 일을 배웠고, 2년 뒤에는 당대 석조각의 대가 김진영(金璡榮) 선생의 문하에서 본격적인 석공예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스승 밑에서 돌을 다루는 기술과 더불어 장인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와 작품을 보는 안목까지 기를 수 있었다. 하지만 젊은 시절 잠시 방황했던 시간도 있었다. 사소한 실수가 빌미가 돼 작업장에서 쫓겨난 뒤 갈 곳 없던 그는 무작정 경주 석굴암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의 깨달음이 인생을 바꿔 놓았다. “석굴암의 조형미에 압도되었어요. 사람의 손으로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니, 죽기 전에 한번 그런 작품을 꼭 만들고 싶었어요.”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간 그는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일을 배웠다. 그는 “선생님은 건축, 종교, 미술사, 실내 장식 분야 교수들과 자주 어울리셨는데 그런 자리에 늘 저를 데리고 가셨어요.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와 불교 미술 전반에 대한 견문을 넓혀갔어요”라며 당시를 돌아보았다. 그는 21세의 나이로 1977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국제기능올림픽 석공 부문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이후 국내 각종 공모전에서 연이어 수상하며 명성을 얻었고, 1989년 석공예 명장, 2005년 경기도무형문화재 석장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2007년 신설된 국가무형문화재 석장 분야 최초의 보유자로 지정받은 것은 그가 이 분야 최고의 자리에 올랐음을 의미한다. . 화강암. 82 × 27 × 98 ㎝. (WDH) 가운데 안상 안에 봉황 한 쌍을 구름 문양과 함께 새기고 네 귀퉁이와 기단부는 당초문으로 장식해 화려함을 더한 작품이다. 성인이 출현해 천하가 태평하면 나타난다는 상상의 새 봉황은 성스러운 동물로 여겨져 주로 궁궐 장식에 이용되었고, 왕족 여인들의 예복이나 장신구 무늬로도 활용되었다. ⓒ 서헌강(Seo Heun-kang 徐憲康) . 화강암. 23 × 20 × 50 ㎝. (WDH) 어린 소녀의 모습을 통해 불교의 청정한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머리를 양쪽으로 틀어올린 쌍계(雙髻)는 길게 땋은 머리와 함께 동자상의 가장 보편적인 머리 모양이다. ⓒ 서헌강(Seo Heun-kang 徐憲康) 지광국사탑이 복원 전 서울 경복궁에 놓여 있을 때의 모습이다. 고려 시대 국사(國師) 해린(海麟 984~1067)의 사리를 봉안한 이 탑은 원래 강원도 원주 법천사지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반환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한국전쟁 시 폭격으로 심하게 손상되어 1957년 재건 보수 공사가 시행되었지만, 다시 보존 처리가 필요한 상황이 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진 후 2016년 전면 해체하고 보수를 시작하여 올해 복원이 완료되었다. 독특한 구조와 화려한 조각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승탑이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 돌의 매력 이 석장은 화강암을 주로 쓴다. 한반도에 가장 많이 분포된 이 암석은 강도가 높고 광택이 뛰어난 장점이 있지만, 흡수성이 적고 결이 치밀해 조각하기가 매우 어렵다. 불상, 석탑, 석교 등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의 고대 석조 기술은 4세기 이후 삼국 시대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잦은 전란에도 불구하고 화재를 이겨내어 수많은 석조 문화재가 전해 내려온다. 또한 석재는 사찰과 궁궐 건축의 주요 자재일 뿐 아니라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돌로 쌓는 성의 축조 또한 활발했다. 그 동안 수많은 문화재 복원과 재현 작업에 참여해 온 이 석장은 가장 힘들었던 작업을 꼽아달라고 하자, ‘대수술 끝에 올해 초 새로 태어난’ 강원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을 꼽았다. 그는 “이보다 더 어려운 석조 문화재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매우 고단한 작업이었다”고 했다. 지광국사탑은 고려 시대에 국사(國師) 칭호를 받은 해린(海麟 984~1067)의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이전 시대 전통 석탑의 모양에서 벗어난 색다른 구조에 탑 전체를 정교하고 화려한 구름·연꽃·보살·비천상 문양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승탑(僧塔)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경복궁 마당에 옮겨 놓았던 이 탑은 6.25 전쟁 때 폭격을 맞아 수많은 조각으로 부서졌다. 전쟁이 끝나고 1957년 깨어진 조각들을 일일이 붙이고 시멘트로 땜질했는데, 당시는 문화재 복원 기술이 많이 부족했을 뿐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땜질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등 훼손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상태가 가장 안 좋았던 지붕돌의 절반 정도를 새 석재로 복원했는데, 새 돌을 깨고 쪼아서 원래 돌 사이에 끼워 맞추는 작업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요. 기술 이수를 끝낸 제자 두 명하고 셋이서 1년 반을 꼬박 매달렸죠.” . 화강암. 33 × 27 × 55 ㎝. (WDH) 선의 역동성에 중점을 두고 몸의 비늘과 갈기를 표현한 작품이다. 상상의 동물인 천록은 잡귀를 물리치는 성스러운 동물로 인식되어 궁궐의 석조 장식물로 쓰였다. 경복궁 영제교(永齊橋)에서도 볼 수 있다. 이재순 석장이 사용하는 수공구들이다. 돌을 채취하거나 다듬을 때 쓰는 정, 돌을 쳐낼 때 사용하는 메를 비롯해 틈새에 박아 그 사이를 벌어지게 하는 쐐기, 표면을 곱게 쪼아낼 때 쓰는 도드락망치 등 용도에 따라 다양한 공구가 사용된다. 복원과 재현 2008년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 복원,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보수 등 굵직한 문화재 복원 현장마다 그가 있었다. 궁궐과 사찰을 포함한 전국의 석조 문화재 중 그의 손길이 닿은 작품만 2000여 점에 이른다. 또한 그는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과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의 복제품을 만들었고, 북관대첩비는 복원과 재현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함경도 의병들이 왜군을 물리친 것을 기리기 위해 1709년 주민들의 발의로 길주군에 세워진 북관대첩비는 일제가 1905년 자국으로 불법 반출한 뒤 2000년대 초까지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 비석이 일본에 있을 때는 기단과 지붕돌 없이 비신 위에 커다란 자연석만 얹어 놓은 상태였어요. 유홍준(兪弘濬) 당시 문화재청장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이 비석이 환수될 때를 대비해서 지붕돌과 기단을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돌 만지는 장인으로서 이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일본 측에선 “본래 북한 지역에 있던 것이니 북한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환을 미루고 있었다. 일본은 북한이 쉽게 허락할 리가 없다고 본 것이다. “유 청장이 묘안을 내서 서울에 몇 달 둔 다음 북한에 돌려주겠다고 약속했고, 이 제안을 받아들인 북한이 일본에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돌려주게 된 거죠.” 2005년 드디어 한국 땅으로 돌아온 북관대첩비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이어 경복궁에서 전시된 후 이듬해 그가 만든 지붕돌 및 기단과 함께 북한으로 보내졌다.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워진 이 비석은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었고, 현재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 앞뜰에 전시된 복제품은 이 석장이 실물과 같은 크기로 제작한 것이다. “숭례문 복원 공사 때는 현장에 화재의 기운이 남아 있어 피부병도 걸리고 기관지가 안 좋아졌지요. 하지만 큰 재난 후 새로운 역사를 쓴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고, 옛 석공들의 지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서 공부가 많이 됐습니다. 그들이 돌을 다듬으면서 비가 올 때를 대비해 빗물을 흘려보내는 방법까지 치밀하게 계산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구전으로만 듣던 걸 해체 작업을 하면서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거죠.” “돌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무심하게 툭툭 때리면 무심하게 모양이 나오고, 화가 나서 쪼면 화난 모습 그대로 나오거든요. 정직해서 매력적인 것이 바로 돌이지요.” 국내 석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화강암은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암석이기도 하다. 화강암은 강도가 높고 빛깔이 고우며 광택이 뛰어난 장점이 있지만, 결이 치밀해 작업하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한국의 석공예는 섬세한 조각보다 선으로 특징을 잡아 표현하는 조각이 주를 이룬다. 거친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는 돌에 새긴 부드러운 선은 한국 석조 문화의 특징이다. 변함없는 일과 이 석장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1995년 타이완 신베이시 시즈구(新北市 汐止區)의 자항기념당(慈航記念堂)에 조성한 아미타불상을 꼽았다. 앉아서 입적한 후 등신불로 모셔진 자항대사를 기리는 공간에 안치할 불상을 제작하기 위해 당시 타이완 신도들이 세계 여러 나라의 석불을 돌아보고 나서 “석굴암 본존불이 최고”란 결론을 내리고는 그에게 의뢰를 한 것이다.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한 부처님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부피가 그것의 1.7배가 넘는 거대한 불상을 만들게 됐지요. 완성된 불상을 배로 옮겨 현장에 안치하던 날, 아미타불이 서쪽을 향해 앉자 구름이 걷히고 빛이 퍼졌다고 들었어요. 나중에 영상을 봤는데 정말 신기하게 석양빛이 불상을 감싸고 있었어요. 많은 분들이 감동했던 모습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는 우직하다. 눈을 뜨면 바로 작업장으로 향하는 게 변함없는 그의 일과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종일 돌을 깨고 쪼고 나면 온몸이 아프다. 그러나 돌에 대한 그의 사랑과 경외심은 변함이 없다. “돌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무심하게 툭툭 때리면 무심하게 모양이 나오고, 화가 나서 쪼면 화난 모습 그대로 나오거든요. 정직해서 매력적인 것이 바로 돌이지요.” 그의 아들 이백현(李伯鉉) 씨가 아버지의 기술을 전수받아 뒤를 잇고 있다. 그러나 전통 석공 기술의 우수성이 후대로 계속 이어 나가려면 개인의 노력과 함께 사회의 관심과 정부의 지원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 석장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젊은이들이 우리 전통 기술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합니다.”반 세기를 한결같이 돌과 함께 살아온 명장의 말이 느릿느릿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

마음의 실을 이어 하늘의 수를 놓다

Guardians of Heritage 2021 SUMMER

마음의 실을 이어 하늘의 수를 놓다 자수장 최유현(Choi Yoo-hyeon 崔維玹)은 70여 년 동안 바늘과 실을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아왔다. 그는 불화(佛畫)를 바탕으로 한 대작과 독창적 기법으로 한국 자수의 차원을 한층 높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삼세불도(三世佛圖)⟩ 중 ‘석가모니불도’(부분). 257 × 128 ㎝. 비단에 명주실. 자수장 최유현(Choi Yoo-hyeon 崔維玹)은 1970년대 중반부터 불화를 자수로 표현하는 수불(繡佛)에 도전했다.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를 표현하는 ⟨삼세불도⟩는 완성하는 데 10년이 넘게 걸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서헌강(Seo Heun-kang 徐憲康) 아름답고 섬세한 자수 작품을 대하면 누구나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되지만, 수틀 앞에 앉아 바늘로 한 땀 한 땀 그림을 만들어 나가는 작업은 매우 고되고 지루하여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특히 전통 자수는 현대 자수에 비해 대체적으로 제작 과정이 더 복잡하고 기법 또한 다양한 데다가 그 안에 담긴 정신까지 표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수가 힘들고 지루하기만 했다면 어떻게 평생 이 일을 했겠어요? 재미있고 즐거우니까 했죠.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 자수를 내 손으로 복원하고 싶다는 바람도 컸고요.”고생스럽지 않냐는 질문에, 최유현 자수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본질에 천착하다 “제 나이가 이제 80이 훨씬 넘었어요. 우리 어렸을 땐 바느질이 일상이었어요. 집집마다 옷도 손수 만들어 입고, 혼수에 들어가는 수도 직접 놓았죠. 제가 7남매 중 막내인데, 어머니가 늘 수를 놓고 계시니 저도 자연스레 옆에서 따라 하게 됐어요. 10대 때 학교 숙제로 자수를 해 갔다가 칭찬을 받은 게 재미를 붙이는 계기가 됐고요. 한때는 하루 스무 시간 넘게 수틀 앞을 떠나지 못한 적도 있어요. 밥 먹는 시간, 세수하는 시간까지 아껴 가며 매달렸죠.” 열일곱 살에 당시 자수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던 권수산(権寿山) 선생을 만나 체계적으로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자수를 시작하게 될 무렵, 한국 전통 자수는 암흑기였다. 그 당시 자수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여성들이었고, 이들은 귀국 후 여자대학교 가정과나 양장학교에서 일본풍의 자수나 생활 소품에 치중된 자수를 가르쳤다. 이런 경향은 오랫동안 지속됐다.최 자수장은 1960년대 초반 자수 학원을 열어, 전통 자수의 본질에 천착하고 우리 것을 되찾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베갯모나 방석 같은 생활 소품에 전통 문양을 수놓는 수준이었지만, 점차 소재를 전통 회화로 확대해 나갔다.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옛 미술품들을 재해석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확립해 나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자수는 바늘 다루는 솜씨와 타고난 색감도 중요하지만 디자인이 무엇보다 중요해요. 다른 사람의 작품을 따라 하기만 해선 자신만의 독창적 세계를 구축할 수 없어요. 한국 전통 도자기와 산수화, 민화 등을 밑그림으로 삼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1. ⟨연화장세계도(蓮華藏世界圖)⟩. 270 × 300 ㎝. 비단에 명주실. 경상북도 예천 용문사(龍門寺)의 만다라를 자수로 표현한 작품으로 최 자수장에게 1988년 제13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을 안겨 주었다.ⓒ 서헌강(Seo Heun-kang 徐憲康) 도전과 성취 사회 일반적으로 한국 고유의 전통 문화가 경시되었던 시절, 그의 이 같은 노력은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고 전통 자수에 매혹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났다. 특히 그의 작품은 외국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당장의 경제적 이익보다 전통 자수의 발전을 먼저 생각했던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는 작품 판매보다는 전통 자수 연구와 전시 활동에 집중했으며, 불화를 자수로 표현하는 수불(繡佛)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불교 미술이야말로 전통 예술의 총화라는 생각에서였다. 그중 석가모니의 일생을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팔상도(八相圖)⟩와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를 아우르는 ⟨삼세불도(三世佛圖)⟩는 그의 70여 년 자수 인생을 대표하는 화룡점정이라 할 만하다. 전통 기법과 창작 기법이 화려하게 어우러졌을 뿐 아니라, 재료도 명주실은 물론 면사, 양모사, 인견사 등을 활용해 질감을 다양하게 살렸다. 두 작품 모두 완성하는 데 1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스님들이 수행과 정진에 힘쓰듯 참선하는 마음으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았어요. 특히 ⟨팔상도⟩는 통도사에서 처음 그림을 접한 후 10년간 ‘이 작품을 내 자수로 짓게 해 달라’고 기원을 드렸습니다. 가까스로 절의 승인을 받아 제작에 착수했는데, 높이 2미터가 넘는 작품 8점을 수놓다 보니 완성하는 데 12년이 걸렸어요. 그나마 제자들과 함께했기에 망정이지 저 혼자였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남다른 열정과 집념은 큰 상의 수상으로 이어졌다. 예천 용문사(龍門寺)의 만다라를 수놓은 ⟨연화장세계도(蓮華藏世界圖)⟩로 1988년 제13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1996년에는 마침내 국가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2. ⟨팔상도(八相圖)⟩ 중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236 × 152 ㎝. 비단에 명주실. 이 작품은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팔상도를 밑그림으로 삼았으며, 자수 표현이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크게 여덟 가지 장면으로 나누어 보여 주는 ⟨팔상도(八相圖)⟩는 한 화면에 여러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효제충신도(孝悌忠信圖)⟩ 8곡 병풍 중 ‘염자도(廉子圖)’(부분). 128 × 51 ㎝. 비단에 명주실. 1960년대, 한국 전통 자수의 본질에 천착하게 된 장인은 문자도를 포함한 민화의 재해석에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보존과 계승 한국 전통 자수의 역사는 삼국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한국 문화에 대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은 고대 부여와 고구려 사람들이 수를 놓은 화려한 옷을 입었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에는 궁궐에 자수 장식을 전담하는 수방(繡房)을 설치해 왕실의 의복과 장식품에 수를 놓았고, 민간에서는 가정마다 가풍에 따라 전승되는 자수 양식이 있었다. 최 자수장의 예술 철학은 ‘심선신침(心線神針)’이라는 한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 2016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전시회의 제목이기도 했던 이 말은 ‘마음의 실을 이어 하늘의 수를 놓는다’는 뜻이다. “작품 한 점 한 점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완성됩니다.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면서 자수로 재현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해 본을 뜨기까지 그 과정도 만만치 않지만, 어떤 질감과 색감의 천과 실을 사용할지, 색 배합은 어떻게 할지, 어떤 기법을 사용할지, 머릿속에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가며 작업해야 해요. 구성과 위치에 따라 실의 굵기를 달리해야 하니 실도 직접 꼬아야 하고, 마음에 드는 기법과 색감을 찾을 때까지 수를 놓았다가 뜯어내 버리는 과정을 숱하게 반복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뭐 하나 대충 넘기는 법이 없다. 언제나 기본을 강조하며 전통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 후대에 제대로 전수하기 위해서다. 이는 그가 부산대학교 한국복식문화연구소 석좌교수로 출강하며 후학 양성에 열과 성을 다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 “전통 자수가 아름답고 좋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선뜻 해 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이들도 부지기수고요. 제대로 교육받았다 해도 부단한 인내로 오랜 수련을 거쳐야만 비로소 작가로 거듭날 수 있어요.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 도전 자체를 꺼리는 거죠.” 그는 자신의 자수 인생을 돌아보는 자서전 『최유현 자수사』의 발간을 앞두고 있다. 생활 소품에서 민화, 다시 불화로 변화를 거듭해 온 그간의 여정을 시기별로 정리한 책이다. 제자들을 위한 교육용 자료 편찬 작업도 서두르고 있다. 이미 100여 점이 넘는 작품에 주석을 달아 정리한 작품집을 여러 권 펴냈고, 자신이 개발한 독창적 기법에 이름을 붙여 상세하게 기록한 책도 조만간 출간할 계획이다. 그런가 하면 대작으로선 마지막 작품으로 예상되는 양산 신흥사(新興寺) 대광전(大光殿) 벽화를 모본으로 하는 ⟨관세음보살도⟩도 완성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색(紫色) 천에 금색 실로만 수를 놓은 이 작품은 그 정교함과 화려함이 가히 극치에 달한 느낌이다. 지난 3년간 작업해 온 역작이다. “앞으로 이처럼 대규모 작품은 더 이상 하기 힘들 것 같아요. 눈도 침침하고 체력도 달려서 2~3시간 작업하는 것도 힘에 부치거든요. 이젠 작품 제작보다 제자들 교육에 집중해야죠.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전수하는 게 제 남은 숙제니까요.”그가 거의 반세기 동안 팔지 않고 보관해 온 자신의 작품과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수백여 점의 전통 및 현대 작품이 문화재청 지원 아래 전주 국립무형유산원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머지않은 날 자수 전문 박물관이 건립돼 이 작품들을 오래도록 보존하고 전시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1. 최 자수장은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명주실, 면사, 양모사, 인견사 등 다양한 소재와 색상의 실을 사용해 질감을 표현하는 한편 전통 및 창작 기법을 두루 활용해 수를 놓는다. 2. 그는 지난 3년 동안 경상남도 양산 신흥사(新興寺) 대광전(大光殿) 벽화를 모본으로 하는 를 작업 중이다. 이 작품은 자색 비단에 금색 명주실로만 수를 놓아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기품이 느껴진다.

정확함과 아름다움의 균형

Guardians of Heritage 2021 SPRING

정확함과 아름다움의 균형 기흥성(Kee Heung-sung 奇興聲) 관장은 건축 모형 분야의 대가다. 국내 건축 모형뿐 아니라 중국 당나라 장안성 복원 모형, 파리 에펠탑 모형 등 그의 손을 거친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서도 특히 예술적 감각이 살아 있는 한국 전통 건축 모형이 압권이다.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기흥성뮤지엄(Kee Heung Sung Mseum)에서 그를 만났다. 전시실에 들어서니 소인국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작은 세상을 만든 기흥성 관장은 1938년, 지금은 북한 땅인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났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 남한행을 택했다. 어릴 때부터 만들고 그리는 데 재주를 보였던 그가 모형 제작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1967년부터였다. 무역박람회장 설계를 맡은 업체에서 모형을 제작할 사람을 구했다. 한국 현대 건축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건축가 김수근(金壽根 1931~1986)이 당시 그 회사의 수석부사장이었는데, 그가 만든 모형을 보고 “어디서 귀신 같은 놈이 나타났다”며 탄복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제가 토목 일을 하길 바랐어요. 통일이 되면 토목 공사가 많이 필요하다고. 건축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김수근 선생을 만난 게 제 인생의 큰 행운이었죠.” 기흥성 관장이 신라 시대 최대 호국 사찰이었던 황룡사 9층 목탑을 복원한 높이 4m의 모형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전통 건축물 모형을 제작할 때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와 나무를 결구 방식으로 짜맞춤하는 전통 방식을 그대로 사용한다. 전통 건축 모형 그는 손이 빠르고 정확했다. 남들이 스케치를 하고 있을 때 작품 한 점을 뚝딱 완성하는 속도였다. 김수근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은 그는 서른한 살 이른 나이에 팀장 역할을 맡게 됐고, 산업화가 한창이던 1970년대에는 국가 개발 프로젝트에 필요한 모형 제작을 도맡다시피 했다. 그의 모형들을 보면 한국 경제 발전사를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땐 제가 대통령 브리핑의 마지막 구원 투수 역할을 했어요. 도면만 가지고 설명하기엔 한계가 있는데, 제가 만든 모형을 보면 단박에 이해가 됐으니까요.” 서울에서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 여의도 종합 개발 계획 등의 모형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그는 “당시에는 사무실에 야전 침대를 가져다 놓고 밤을 새우면서 잠깐씩 눈을 붙였을 정도로 몸을 던지며 일했다”고 했다. 현대 건축으로 시작한 그의 작업은 전통 건축물을 재현하며 무르익었다. 국립박물관에서 주문한 황룡사 9층 목탑 모형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신라 시대 최대의 호국 사찰이었던 황룡사는 1238년 몽고 침략으로 9층 목탑과 전각까지 모조리 불에 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기 관장은 실물이 남아 있지 않은 탑을 추정해 높이 4m의 모형으로 재현했다. 그는 “1980년대에 건축•고고학•미술사 등 여러 분야 학자들과 전문가들의 자문을 거쳐서 3년 만에 추정 복원 설계도를 완성하고, 제작에만 5년이 걸렸다”며 “현존하지 않는 탑을 추정 복원하는 작업이라 가장 힘이 들었지만 그만큼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고 했다. 지하 1층 전시관에 그가 복원한 황룡사 9층 목탑이 전시돼 있다. 현재의 작품은 1993년 국립민속박물관 이전(移轉) 개관 기념 특별전 를 위해 제작한 작품이다. 당시 국내외에서 “찬란했던 신라 건축이 되살아났다”며 극찬을 받았다. 서울 롯데월드 민속박물관 내 1200㎡ 규모의 모형촌도 그의 대표작이다. 조선 시대의 법궁(法宮) 경복궁을 비롯해 향교와 사찰 등 각종 전통 건축물이 1/8 축소 크기로 전시되어 있다. 당시의 건축물과 생활상을 한눈에 보여 주는 곳이라 전 세계 귀빈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단골로 찾는 명소다. 2002년 이곳을 방문한 루샤오보(魯曉波) 중국 칭화대 미술학원 부원장은 “전통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되살린 솜씨를 중국에 들여오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목재에 단청을 칠하고 손톱만 한 기와를 구워 가며 꼬박 2년을 매달렸다”며 “그것들을 완성하느라 죽을 뻔했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가슴에 심장박동기를 달고 작업을 이어나갔기 때문에 그로서는 정말 목숨을 건 작업이었다. “한국 고건축에서는 선이 매우 중요해요. 살짝 올라간 처마의 곡선, 일직선이 아니라 약간 들려 있는 그 미묘한 차이를 감각으로 해내야 하거든요. 작업을 할 때마다 우리 선조들의 슬기로운 능력에 탄복합니다. 현대 건축물은 이 멋을 못 따라가죠. 전통 건축이 현대 건축물보다 훨씬 더 재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제자들도 여기 손대려면 최소 5년 이상 경력을 쌓아야 합니다.” 칭화대는 지난 2004년 그를 미술대 객원 교수로 초빙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 박람회를 앞두고 그의 예술적 감각과 기법을 배우고자 한 것이다. 2004년 6월 베이징에서 열린 은 CCTV에서 특별 방송으로 다루어 중국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기 관장은 높이 80미터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진 황룡사 9층 목탑을 1:20의 비율로 축소한 모형으로 복원하기 위해 3년에 걸쳐 추정 복원 설계도를 완성하고 5년 동안 제작했다. 각 층마다 난간의 살을 아(亞) 자 문양으로 짜서 정교하게 둘렀다. “솜씨만 비슷하게 흉내를 내서는 절대 감동을 줄 수 없다. 모형은 정확함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모형 전문 박물관k 기흥성뮤지엄은 기 관장의 모형업 종사 50주년을 맞아 2016년 11월 개관했다. 자신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건축 모형 분야 종사자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은 그의 오랜 꿈이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 박물관에는 그가 만든 모형 작품 10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지하 1층은 한국 전통 건축관으로 입구에서 국보 숭례문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다. 2008년 화재 이전의 모습이 그의 모형으로 남은 것이다. 건물 내부의 기둥과 계단, 지붕 추녀마루 위에 올린 앙증맞은 잡상까지 생생하다. 문 양쪽의 성벽도 실제 돌의 무늬와 길이까지 반영해 정교하게 제작했고, 손톱만 한 암수 기와까지 일일이 짜서 맞췄다. 그는 “숭례문에 불이 났을 때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다”며 “화재 이전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작품이라 실제 복원 작업에도 도움이 됐다고 들었다”고 했다. 2층 전시실은 근현대 건축관이다. 옛 서울역과 지금은 철거된 조선총독부 건물이 원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88 서울올림픽 주경기장, 63빌딩, 종로타워, 월드컵 경기장 등 국내 주요 건축 모형뿐 아니라 백악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등 세계 각국의 유명 건축물 모형까지 볼 수 있다. 그중에는 평양 시가지 모형도 있다. 그를 ‘평양을 서울에 옮겨 온 사나이’로 불리게 한 작품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즈음에 평양 시내 주요 건물들과 자연 경관을 가로•세로 5m 입체 조형물로 만들었다. 순안공항에서부터 주체사상탑, 만수대 의사당, 인민문화궁전, 고려호텔 등이 눈길을 끈다. 숭례문은 조선 시대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화강암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건물을 올렸다. 1398년 지어진 이 목조 건물은 2008년 방화로 소실됐다가 2013년 복원됐다. 기 관장의 숭례문 모형은 화재 이전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기 관장은 지붕 추녀마루 위에 올린 잡상까지 실제 비율을 감안해 세심하게 만들었다. 전통 건축에서 기와지붕의 추녀마루에 놓는 잡상은 장식적 용도뿐 아니라 벽사의 의미도 있다. 완성되지 않은 꿈 기 관장은 2009년 한국이 아랍에미리트연방에서 400억 달러 규모의 원전을 수주하는 데도 일조했다. 그가 만든 1/200 축소 신형 원자력 발전소 모형이 한국의 원자력 발전 기술력을 돋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온라인으로 3D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는 시대에 모형이 왜 필요할까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실제 건축물을 짓기 전 완공 뒤의 모습을 미리 살펴보고 주변 경관과도 잘 어울리는지 등을 예측하기 위해 반드시 모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그는 “설계 의도를 정확히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시공 도면대로 건물 하나를 짓는 과정을 똑같이 거쳐야 한다”고 했다. 전통 건축을 재현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먼저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골격을 만든 뒤 서까래, 지붕, 기와, 창호까지 세밀한 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는 “솜씨만 비슷하게 흉내를 내서는 절대 감동을 줄 수 없다”며 “모형은 정확함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통 건축물 모형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좋은 목재를 구하는 일인데, 모형이 완성된 후에 나무가 갈라지면 안 되니까 실제 한옥 건축에 사용되는 질 좋은 춘양목을 확보해 두었다가 써요. 그리고 접착제를 쓰지 않고 부품을 일일이 맞춰 조립합니다. 전통 건축의 미감을 그대로 살리는 게 중요하거든요.” 박물관 건립을 향한 그의 꿈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보관 중인 작품을 더 많이 전시하기 위해 새 전시관을 열 계획이다. 그는 기흥성뮤지엄 뒤편에 2관을 열고, 고향과 가까운 인천 송도와 덕적도 등지에 대규모 전시관을 세우고 싶다고 했다. “모형 제작은 사라져 가는 문화재를 복원하는 일이자, 미래에 일어날 다양한 문제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작업이기도 하지요. 50년 넘게 오로지 이 한길만 걸어온 제가 마지막까지 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막걸리의 변화를 이끌다

Guardians of Heritage 2020 WINTER

막걸리의 변화를 이끌다 서울 강남 중심가에 위치한 백곰막걸리는 여러모로 이제까지의 전통 주점과 많이 다르다. 수백 종류의 한국 전통주와 양조 시설까지 갖춘 이 주점의 이승훈(Lee Seung-hoon 李承勳) 대표는 막걸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자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승훈 대표는 지방 소도시에 위치한 한 전통주 전문 주점이 최근 문을 닫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며 말문을 열었다. “주인이 손님들한테 여러 번 멱살 잡히다가 결국 가게 문을 닫았다고 해요. 한 통에 2~3천 원이면 마실 수 있는 막걸리를 만 원에 팔았으니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거죠. 막걸리는 서민의 술이라 저렴하다는 인식과 정면으로 부딪친 겁니다.” 지금은 맥주와 소주에 밀려 주류 시장 점유율이 5~6%에 그치지만, 1980년대 중후반까지 막걸리는 가장 대중적인 술이었다. 퇴근길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은 비닐봉지 속 두부 한 모, 막걸리 한 통이 소박한 술상이 되어 하루의 고달픔을 풀어주던 시간들, 삼삼오오 모여 앉은 선술집에서 누런 양은주전자에 담긴 뽀얀 막걸리가 누군가의 근심과 함께 끝없이 차고 비던 시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게 착한 가격과 훈훈한 정서로 대표되는 술이었던 막걸리에 변화가 일고 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지역마다 대표적인 지역 막걸리가 시장을 차지하고 있어 소비자들에겐 선택권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저희 백곰막걸리에서 취급하는 막걸리가 60여 종이고, 가격도 예전보다 훨씬 높아져서 2만 5천 원에서 1만 오천 원 정도입니다. 이런 술들이 최근까지 하루 판매량을 제한해야 할 정도로 잘 팔렸어요.” 강남 압구정동 한복판에 위치한 백곰막걸리 주점은 코로나19가 창궐하던 지난 7월 한여름에도 매출 하락은커녕 신기록을 세웠다. 그의 가게가 무려 300여 종의 술을 갖춘 전국 최대 규모의 전통주 전문 주점이어서뿐만은 아니다. 소비자들의 입맛이 대기업 생산 일반 맥주에서 수제 맥주로 옮겨갔듯, 막걸리 소비에도 다품종 고급화 바람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다품종 고급화 탄산감이 가미된 ‘샴페인 막걸리’, 전통 쌀 막걸리에 과일과 요거트를 조합한 후 솜사탕을 얹은 ‘솜사탕 막걸리’, 양질의 원재료를 강조하는 ‘프리미엄 막걸리’ 등 소비되는 막걸리의 종류가 훨씬 다양해졌다. 또한 서울 메가 상권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고급 전통주 전문 주점이 군, 읍 등 지방으로 번지고 있는 것 역시 의미있는 변화이다. 이 대표는 그 변화의 바람 한가운데서 바람의 힘을 모으고 있는 주인공이다. 그는 “막걸리는 한국 식문화의 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막걸리는 찹쌀, 멥쌀, 보리, 밀가루 등을 찐 후 누룩과 물을 섞어 발효시킨 우리 고유의 곡물주로 보통 멥쌀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숙성된 후에 위로 뜬 맑은 술이 청주고, 술밑을 체에 밭아 버무려 걸러낸 탁한 술이 막걸리다. 중요한 것은 쌀이 주식인 우리에게 집집마다 쌀로 빚어내는 술은 생활을 담아내는 하나의 문화였다는 점이다. 우리 민족에게 막걸리는 술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얘기다. “일본의 사케는 에도시대부터 양조장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어요. 우리에게도 전문 양조장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김치나 장을 담가 먹듯이 집집마다 무언가 조금씩 다른 가양주를 빚어 마셨던 특징이 있죠.”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빚는 이의 솜씨와 가문의 비기에 따라 가정마다 고유의 향과 맛을 가진 술이 태어났다. 쌀과 누룩만으로 빚었지만 신기하게도 꽃이나 과일향 같은 깊은 향취가 나는 술도 적잖았다. 그런 술들이 제례나 혼례 같은 집안 대소사에 쓰였으며 대를 이어 전승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문화는 지속될 수 없었다. 20세기 들어 식민 통치를 거치며 허가받은 술도가만 주세를 내고 술을 빚어 팔 수 있게 되었다. 해방 이후엔 쌀이 많이 부족했던 까닭에 양곡보호령이 선포되어 전통 곡주 생산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1960년대 초반부터 30년 가까이 쌀뿐 아니라 국내에서 생산된 곡물로 술을 빚는 게 금지돼 있었어요. 수입 밀가루나 옥수수 전분 같은 걸로 술을 빚게 된 거죠. 한 세대 동안 우리 재료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가양주 문화와 솜씨가 소멸될 수밖에요.” 이후 쌀 생산량이 늘고 식생활의 변화에 따라 소비량은 줄면서 쌀이 남아돌자 그제야 쌀막걸리 제조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미 옛맛을 찾기는 어려워졌다. 1995년부터 일반 가정에서도 막걸리를 만들 수 있게 됐지만, 가양주 전통은 희미해졌고 몇몇 제조업체가 대량 생산한 막걸리만 유통될 뿐이었다. 수입산 쌀 70~80%에 아스파탐 등의 인공 감미료를 넣고, 누룩 대신 인공 배양 효모를 사용한 저가의 막걸리만 양산되었고 소비자들도 그 맛에 익숙해져 갔다. 그는 저가 막걸리 대여섯 병에 만취하고 끝날 우리들의 저녁을 다르게 바꿔 보고 싶단다. 예를 들어 가벼운 맛 뒤로 꽃향이 일고 화이트 와인의 깔끔함까지 더해지는 약주 한 병의 은근한 풍성함을 천천히 음미하거나, 또는… 전통주의 확산 2000년대 말 즈음에 막걸리 시장에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독과점 브랜드 일색이던 시장에서 지역 막걸리 브랜드들이 점유율을 높이기 시작했고, 일본인 관광객들을 중심으로 ‘막걸리 열풍’도 불었다. 잊혔던 막걸리의 맛과 가치를 재발견하는 분위기가 성숙되자, 크고 작은 가양주 교육 기관에서 막걸리를 직접 빚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퇴직자나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직접 술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중요한 점은 그 사람들이 자신이 집에서 마실 술을 빚고 즐기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가양주를 문화적으로 퍼뜨리게 되었다는 점이죠. 전통적인 양조 방법을 따르면서 사케나 와인과도 경쟁할 가능성이 생긴, 품질이 충분하다고는 볼 수 없어도 유의미한 술이 많이 생겼어요. 또 그 사람들 중 일부가 양조장이나 전통주 주점, 음식점 등을 개업하기도 했고요.” 달아오르던 열기가 폭발한 것이 2016년경이었고, 이 대표도 그해 백곰막걸리를 열었다. 2010년부터 양조장 400여 곳을 찾아다니며 오로지 전통주와 함께했던 시간의 결실이었다. 그는 ‘자신들이 얼마나 좋은 술을 만들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또 ‘그 술을 어떻게 팔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양조장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전국에서 구한 좋은 막걸리를 차에 싣고 다니며 여기저기 모임에 가져가서 소개하고, 다른 사람들의 가게를 빌려서 팝업 행사도 하면서 꿈을 꾸었죠. 양질의 막걸리를 상시 판매할 수 있는 매장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거죠.” 그는 자신의 가게를 기지 삼아 전통주의 확산과 발전에 기여할 방법을 찾고자 했다. 일단 다양한 술을 갖춰 고객들의 선택지를 넓혔다. 직접 빚은 술의 품평을 부탁하며 찾아온 이들과 수없이 마주 앉았고, 시판 예정인 브랜드와 뜻이 맞는 경우 자신의 인적 물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출시와 판매의 길을 터주기도 했다. “제 가게에서 팔 수 있는 술의 양에는 한도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스스로 홍보를 위한 안테나숍 역할을 맡은 거죠.” 그는 자신의 가게를 전통주 인력 양성 장소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곳의 직원들은 국가 대표 전통주 소믈리에 경기 대회에서 메달을 싹쓸이할 정도로 전문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많은 종류의 전통주와 다양한 손님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훈련되는 환경이 키운 실력이기도 하지만,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이 대표의 파격적인 지원 역시 한몫했다. 그는 자원하는 직원들에게 국내 대학과 학점은행제 강의 수강뿐 아니라 일본공인사케소믈리에 자격증 과정 등 해외 전문 코스 교육도 아낌없이 지원한다. 양조, 연구, 소믈리에, 창업 등 모든 단계의 전통주 관련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배출하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의 요구 이쯤에서 그가 꿈꾸는 ‘막걸리 맛’은 어떤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에 닿는 막걸리의 맛을 모조리 감별하고 분석해 봤을 그였지만, 답은 의외로 담백했다. “심오하거나 민감한 맛에 대한 얘기보다는 오히려 주점과 소비자의 접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제 시각보다는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다가설지를 먼저 생각해요. 대중성을 갖춘, 팔릴 수 있는 술인지를 봐야죠. 전문가의 패러독스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그는 고문헌에 나타난 전통주를 재현하는 작업에도 자신만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순전히 전통 방식으로 만들게 되면 지금의 기준에선 들쩍지근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요. 물론 그런 전통의 맛을 그대로 유지하는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우리 시대 시장에서 소비자가 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찾아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CJ프레시웨이에서 수산물, 축산물 MD로 전국 산지를 누비던 전직의 경험을 살려 술과 음식의 페어링에도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 예를 들어 ‘통영 욕지도산 고구마로 만든 소주와 통영 앞바다 명물 딱돔으로 만든 안주’처럼 가장 훌륭한 조합은 지역성을 맞춘 페어링이란 접근처럼 말이다. 최근에는 전통주 도매 유통으로 관심을 넓히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주점에서 이 술을 주력해서 팔면 저 술이 덜 팔리죠. 그런데 도매는 달라요. 내가 홍보하고 다니면서 어떤 술을 이 주점에도 제안해 보고, 한식당이나 양식 레스토랑에도 넣어 보고…. 노력하기에 따라서 살아남아야 할 양조장을 살릴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전국의 양조장들이 최소한 문을 닫지 않게 도울 수만 있어도 보람될 것 같아요.” 그는 저가 막걸리 대여섯 병에 만취하고 끝날 우리들의 저녁을 다르게 바꿔 보고 싶단다. 예를 들어 가벼운 맛 뒤로 꽃향이 일고 화이트 와인의 깔끔함까지 더해지는 약주 한 병의 은근한 풍성함을 천천히 음미하거나, 또는 조선 시대 주막에서 팔았던 막걸리와 가장 흡사할 듯한 간결하고 원시적인 단맛에 젖어 보는 저녁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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