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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동네 사랑방이 되어가는 약국

Lifestyle 2024 SUMMER

동네 사랑방이 되어가는 약국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 그늘처럼 아무 때나 잠시 쉬어가거나 이웃끼리 마음을 나누는 장소를 일컬어 한국인들은 ‘동네 사랑방’이라고 표현한다. 동네 사랑방은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오가며 안부를 묻고 정을 쌓아가기 때문이다. 정초롱(丁초롱 Jeong Cho-rong) 약사가 고향 영월에 차린 그녀의 약국은 도시화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영월에서 작은 약국을 운영하는 정초롱 약사. 그녀의 약국은 약을 구입하려는 손님뿐만 아니라 잠시 쉬어가는 할머니, 버스를 기다리는 승객, 짐을 맡겨놓는 사람들도 오가며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한다. 그녀의 하루는 단순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매우 바쁘다. 휴일인 주말을 제외하면 아침 9시에 출근해서 퇴근하는 오후 6시까지 약국에서 손님들을 만난다. 조금 한가할 때면 틈틈이 피로회복제 같은 상품 스티커나 약국에 붙일 포스터 디자인 작업을 한다. 오며 가며 쉬어가는 곳 약국 안에서 늘 정신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기 일쑤지만 그녀는 안에 있어도 사계절을 오롯이 느낀다. 약국 안 커다란 통유리 바깥으로 나무들이 철마다 옷을 갈아입기 때문이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는 건 자연만이 아니다. 이 약국에는 잠시 짐을 맡기고 가는 고객들이 꽤 있다. 근처 시장이며 마트에서 장 본 것을 이곳에 둔 뒤 병원, 은행, 군청 등에서 볼일을 보고 오는 단골손님들이다. 그들이 맡겨 둔 장바구니 안에는 지금의 계절을 알 수 있는 채소며 과일이 들어있다. “이것 좀 맡아달라고 말씀하실 때 어머님들 표정이 참 귀여우세요. 이 공간을 편하게 생각해 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한 마음이에요. 제가 꿈꿨던 모습이거든요.” 약국에는 손님들을 위한 휴식 테이블이 있다. 간식도 비치되어 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쌍화탕(雙和湯 피로 해소와 감기 완화에 좋은 한방 드링크제)과 약과(藥果 한국의 전통 과자), 비타민이나 자일리톨이 함유된 캔디 같은 것들이다. 약이 나올 때까지 잠시 앉아 기다리는 테이블이지만,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손님들도 많다. 근처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를 기다리기도 하고, 집으로 돌아갈 버스가 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亭子나무, 집 근처에 있는 큰 나무) 그늘처럼, 손님들이 아무 때나 쉬어가며 오가는 이들과 마음을 나눈다. 약사세요 악국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동네 ‘사랑방(舍廊房)’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복약 상담 “단골손님이 대부분이라 방문하시는 손님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 건강도 상담하기도 해요. 되도록 자세하게 설명해 드려서, 우리 약국을 이용하는 분과 그 가족이 좀 더 건강한 삶을 사시도록 돕고 싶어요.” 한국에선 약국과 약사의 역할이 크다. ‘약은 약사에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약국에서 약사의 설명을 듣고 약을 구매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병원이나 의원이 많지 않은 시골에선 당장 병원을 가야 할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약국의 역할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숙취 해소, 피로회복제 등 증상에 따라 필요한 약을 묶은 패키지에 직접 디자인한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정초롱 약사. 특히 이곳 영월군(寧越郡)에는 젊은이들보다 노인 인구가 많아 약사의 복약지도도 아주 중요하다. 정초롱 약사는 그 임무에 충실한 약사다. 평소 어떤 불편을 겪는지, 어떤 음식을 즐겨 먹고 어떤 약들을 복용 중인지 꼼꼼히 묻고 답한다. 손님이 잘못 알아들을까 봐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일이 그녀에겐 전혀 번거롭지 않다. 정확한 상담으로 환자의 건강 상태가 좋아질 때마다,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잊지 못할 일들이 많아요. 어느 날은 모자를 쓰고 오신 중년 여성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분이 항암 치료 중인 걸 알게 됐어요. 잘 이겨낼 수 있다는 용기를 드리고 싶어 손을 꼭 잡아 드렸는데 왈칵 눈물이 나더라고요. 당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거라곤 손을 잡아 드리는 것이 전부였는데도, 그분이 정말 고마워하셨던 기억이 나요. 지금은 완치하셔서 건강한 모습으로 약국을 찾아오시고 있어요. 뵐 때마다 애틋해요.” 치매 관련 영양제를 사러 왔던 중년의 여성분도 기억에 남는다. 약을 추천하기 위해 그녀가 이런저런 질문을 건넸더니, 손님의 어머니가 치매를 앓아 곧 요양원에 가신다고 했다. 그날도 그 손님과 같이 울었다. 건넬 수 있는 위로의 말이 없어 마음 아팠지만, 속상한 마음을 나누며 함께 울고 난 뒤 손님이 보여준 미소가 여태 기억에 남아 있다.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같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병을 치료할 순 없지만, 상대방이 다시 힘낼 수 있는 마음을 건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녀가 경청과 공감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이유다. 고향에서 누리는 행복 영월군은 그녀가 나고 자란 곳이다. 강원도 남부에 자리한 작은 도시로 산과 계곡, 강과 호수가 수려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 눈부신 땅에서 그는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도시의 약학대학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났다가, 2019년 4월 이곳에 약국 문을 열면서 다시 왔다. “대학 졸업 후엔 도시의 약국에서 근무 약사로 2년 반 정도 일했어요. 처방전을 받아 약을 짓는 게 주된 업무였는데, 재미가 없더라고요. 밀려드는 처방전을 처리하느라 바빠서 손님들께 약에 대한 설명조차 제대로 해드리지 못했거든요. 어느 날 문득 기계처럼 약을 짓는 것 말고 약 하나를 드리더라도 손님들과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만의 약국을 열기로 결심한 거죠.” 처음엔 일하고 있던 충주시(忠州市)에 약국을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땅한 자리가 나타나지 않았다. 고심이 깊어 가던 어느 날 영월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30년 넘게 옷 가게였던 지금의 약국 자리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이었다. 시골 약사로 지내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마음을 먹었다. 따뜻하게 소통하는 약국을 만들기에 고향처럼 적합한 곳은 없을 것 같았다. 그 예감은 적중했다. 어느 집 딸인지 잘 아는 손님들은 자식 같고 조카 같은 그녀를 진심으로 반겼다. “개업한 뒤 1년이 채 안 돼 코로나19로 난리였어요. 마스크 대란이나 진통제 품절 같은 일들을 차례로 겪으며 힘들었지만, 그 시간을 손님들과 함께 견뎌내면서 더 단단한 유대감이 생긴 것 같아요.” 일상으로 돌아온 요즘, 지난 몇 년과는 다르게 약국에서도 잘 팔리는 약이 달라졌다. 전에는 질병을 치료하는 약이 주로 팔렸다면, 요즘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약의 판매가 크게 늘었다. 면역력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커진 것이다. 그는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건강정보를 기억하고 고객별로 기록도 해둔다. 아는 만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옆집의 수저 개수도 안다’는 우리의 옛말처럼,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웃들의 정보가 쌓여간다. 웃음이 또 하나의 치료제가 되다 약사세요 약국에는 익살스러운 풍경이 곳곳에 있다. 뇌, 눈, 간, 위 등의 장기가 그려진 캐릭터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이 캐릭터는 도시에서 근무 약사로 일할 때 SNS(www.instagram.com/yaksaseyo_pharmacy)에 재미 삼아 연재하기 시작한 웹툰 속 주인공이다. 손님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방법을 고민하다, 단발머리 시절의 본인 모습을 캐릭터로 만들어 몸속 장기와 해당 약품을 벽면에 부착했다. 직접 디자인한 스티커도 퍽 재치 있다. 숙취해소제나 피로해소제 등에 손수 그린 캐릭터 스티커를 붙여 판매하니 손님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 그녀는 직접 만든 캐릭터로 SNS에 웹툰을 연재하고 있다. 약국을 열게 된 이야기부터 약국 손님 유형, 약의 사용법 등 다양한 스토리가 있다. © yaksaseyo “요즘은 한 달에 한 번 영월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에 만화를 연재하고 있어요. 약국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만화에 담고 있죠. 독자들이 제 만화를 보며 잠시라도 웃으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다. 손님들과 따뜻한 마음과 공간을 나누고, 그녀를 닮은 캐릭터로 위트를 전하며, 복약상담으로 건강을 책임진 그녀가 약국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 낮에 틈틈이 구상한 디자인 작업과 만화 작업 마무리를 하다 보면 어느새 영월의 하늘이 별빛으로 가득 차 그녀의 밤을 예쁘게 물들인다.

조화로운 도시 전주

Lifestyle 2024 SUMMER

조화로운 도시 전주 한국인에게 가장 전통이 잘 보존된 도시가 어디냐 물어본다면 전북 전주(全州)라 답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특유의 목조건물인 한옥(韓屋)이 유독 많은 도시가 전주다. 하지만 전주는 과거 전통에만 안주하는 도시가 아니다. 잘 보존한 과거 위에 다양한 문화와 혁신을 고루 섞어 비빔밥처럼 잘 비벼진 조화로운 도시다. ⓒ 셔터스톡 전주한옥마을 여행의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곳 중 하난 오목대(梧木臺)다.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평평한 대지 위에 정자가 자리 잡고 있다. 전주한옥마을을 한눈에 조망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아니 유일한 장소라 할 수 있다. 약 30만 제곱미터에 무려 700채가 넘는 한옥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전주가 국내 최대 규모의 전통 한옥마을로 손꼽히는 까닭이다. 촘촘히 박혀 있는 기와지붕들은 마치 검푸른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조선왕조의 시작 오목대가 전망대 구실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정자 안에 들어가면 현판들이 걸려 있는데, 그 중< 대풍가(大風歌) >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다. 大風起兮雲飛揚 큰바람 일자 구름이 흩날리네. 威加海內兮歸故鄉 온 천하에 위풍을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노라. 安得猛士兮守四方 어떻게 용사를 구해 천하를 지키랴! 오목대 < 대풍가 >의 주인공은 1392년 조선(朝鮮)을 건국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재위 1392∼1398)다. 고려(高麗) 말 장수였던 그가 왜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상경하는 길에 전주에 들러 불렀다는 것이다. 훗날 사람들이 이성계가 전주 오목대에 이르러 옛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새로 세울 조짐을 드러냈다고 평가하는 이유다. 즉 조선왕조의 시작점이 전주였다는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은 서울 북촌한옥마을과 함께 대표적인 한옥보존지구이다. 오목대에서 한옥마을을내려다보면 빼곡한 기와지붕이 마치 검푸른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모습이다. 조선왕조와 전주의 연결고리는 오목대만이 아니다. 한옥마을 남쪽 끝에는 경기전(慶基殿)이 있다. 이때 경기는 경사스러운(慶) 터전(基)이라는 뜻으로, ‘조선왕조가 시작된 곳’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조선 개국 직후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 재위 1400∼1418)이 전주이씨(全州李氏) 가문의 본향(本鄕)인 전주를 비롯해 평양(平壤)과 개성(開城), 경주(慶州), 영흥(永興) 등 주요 도시에 아버지의 어진(御眞)을 모시는 건물을 지었다. 그중 전주에 세운 것이 경기전이다. 한복을 입고 경기전(慶基殿)을 산책 관람 중인 시민들. 경기전은 경기는 경사스러운(慶) 터전(基)이라는 뜻으로, 조선 왕조의 뿌리를 재확인하는 기념 장소 역할을 했다. 공간은 크게 세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전(正殿)은 태조의 어진을 모셨던 곳으로, 경기전의 중심 영역이다. 현재 정전에 있는 어진은 모사본(模寫本)이고, 원본(原本)은 정전 뒤 어진박물관에 수장돼 있다. 정전 북쪽에 있는 조경묘(肇慶廟)는 태조의 22대조이자 가문의 시조인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를 봉안하려고 지은 건물이다. 그리고 그사이에 사고(史庫)가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라는, 조선 건국 이래 자그마치 472년 동안의 역사를 매일 같이 수록한 책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 중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에 걸쳐 작성된 기록물로서, 왕조 시절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세계 유일 사례다. 대한민국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언뜻 비장해 보이는 공간이지만, ‘하마비(下馬碑)’와 ‘드므(순우리말. ‘頭毛’라 음차하기도 한다)’에서는 옛사람들의 위트가 엿보인다. 하마비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기서부터는 하마, 즉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가라’라는 뜻에서 세운 비다. 경기전 정문 앞에 놓여 있는데, 비를 받치고 있는 두 마리의 사자(獅子) 또는 해치(獬豸) 모습에서 엄숙함보다 조선 석물 특유의 익살스러움이 묻어난다. 정전 뜰에 놓여있는 6개의 드므는 방화수를 담아뒀던 수조들이다. 행여 화마(火魔)가 건물 가까이 오더라도 물 표면에 반사된 자신의 흉측함에 놀라 도망가길 원하는 바람이 녹아 있다. 누구든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문구가 적혀있는 하마비 (下馬碑). 뿐만 아니라 500년에 가까운 조선왕조 내내 지금의 전북과 전남, 그리고 제주도 일대를 총괄하던 행정 관청이었던 전라감영(全羅監營), 전주부성(全州府城) 시설물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풍남문(豐南門) 등은 오목대와 경기전, 그리고 한옥마을과 함께 전주의 역사와 전통, 나아가 위상을 상징하는 문화유산들이다. 전통 속에 녹아있는 교류의 자취 전주에 오로지 수백 년 전의 옛것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포용력을 바탕으로 하는 변화의 증거들도 적지 않다. 경기전 바로 맞은편에 다소 이질적으로 보이는 건물이 우뚝 서있다. 전동성당(殿洞聖堂)이다. 한반도 최초의 순교(殉敎) 현장에 들어선 성당으로, 지난 1914년 완공되었다. 그런데 이 건물을 지은 주요 인부들은 조선인 혹은 한국인이 아니었다. 『전동성당 100년사』에 따르면, 성당 건축을 위해 중국인 목수 5명과 석공 100여 명이 가마를 설치해 65만 장의 벽돌을 찍어냈다고 한다. 그들을 이끈 인물은 강의관(姜義寬)이라는 이였는데, 쌍흥호(雙興號)라는 건축회사를 운영하며 다양한 천주교 관련 건물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주라고 하면 으레 조선왕조와 전통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곤 하지만, 알고 보면 오랜 교류의 자취도 숨어있다. 1914년 준공된 전주 전동성당(全州 殿洞聖堂)/ 로마네스크 양식이 돋보이는 건물로, 초기 천주교 성당중에서 그 규모가 크고 외관이 뛰어나게 아름답다. 전주 하면 중국과의 교류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인들이 전주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의 일이다. 1899년 전주에서 약 5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군산(群山)이 개항(開港)되며 ‘쿨리(苦力)’라 불렀던 인부를 비롯해 상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눈에 군산보다 상업과 문화, 행정 등 여러 방면에서 상위 도시였던 전주가 들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점차 정착하는 이들이 많아졌고, 그들은 지금의 다가동(多佳洞) 차이나 거리를 중심으로 화교(華僑) 공동체를 일구어 나갔다. 당시 화교들 중에는 해운업이나 농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60%에 달하는 이들은 요식업과 주단포목(紬緞布木)을 거래하는 상업에 종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랜 전통의 도시에 화교의 유입에 따른 문화적 접변(接變)은 특히 요식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화요리(中華料理)’라는 전에 없던 음식들이 한반도에 전래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화요리는 새 정착지의 식재료를 이용해 현지화되고, 이내 현지인의 입맛을 사로잡아 대중화의 길을 걷는 특성이 있다. 소스인 춘장(春醬)만 중국에서 왔을 뿐 지금은 한국식 중화요리의 대표주자가 된 ‘짜장면’이 대표적인 경우다. 전주 화교는 그 짜장면에 또 한 번 혁신을 가했다. ‘물짜장’이라는 새로운 음식으로 변주해 낸 것이다. 물짜장에는 춘장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기름기 많은 짜장면을 부담스러워하는 한국 손님을 위해 춘장 대신 간장을 주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즉 간장 베이스에 전분을 넣어 걸쭉한 소스를 만든 뒤, 삶은 해물과 밀가루 면 위에 얹은 것이다. 원래의 짜장면과는 전혀 다르게 해물잡탕면에 가까운, 또 하나의 한국식 중화요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대히트를 친 물짜장은 멈춰 있지 않았다. 또다시 ‘순한맛’과 한국인이 좋아하는 ‘매운맛’으로 분화되어 갔다. 그러고는 이내 군산시(群山市)와 익산시(益山市), 완주군(完州郡) 등 인근 도시로도 번져나갔다. 전주에서는 전주화교소학교(全州華僑小學校) 교장이기도 한 화교 류영백(劉永伯) 씨가 운영하는 진미반점(真味飯店), 역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보장(大寶莊) 등이 물짜장 명맥을 잇고 있는 식당으로 정평이 나 있다. 사실 화교의 유입은 전주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식문화를 진일보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불고기나 갈비탕, 잡채, 심지어 순대에까지 들어가는 당면(唐麵) 등 다양한 식재료들이 화교들을 통해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에 한국의 식재료와 요리법이 접목되면서 음식문화의 폭발적인 융성을 가져왔다. 그런 면에서 이제는 화교와 전주, 화교와 한국을 굳이 구분해 생각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문화에는 위아래도, 내 것 네 것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문명이든 다른 문명을 다각적으로 받아들여 융합하는 과정에서 그간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하며 발전을 도모해 왔을 뿐이다. 전주는 그와 같은 교류를 품어주는 품 너른 고장이었으며, 그런 교류의 결과가 곧 전주다. 혁신 끝에 탄생한 전주비빔밥 태초부터 당연한 것도 없었다. 비빔밥 역시 그러하다. 그중에서도 고급스러운 색과 맛, 그리고 고소한 풍미가 일품인 전주비빔밥을 궁중음식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전주비빔밥이 이토록 인기를 얻게 된 데에도 지치지 않는 혁신의 노력이 있었다. 전주 향토 음식인 전주비빔밥은 전주는 물론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다. 전주 비빔밥의 종류는 30여 가지로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현재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전주비빔밥 식당은 1951년 문을 연 ‘한국집’이다. 다만 당시에는 비빔밥이 아니라 ‘한국떡집’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떡과 정과(正果)를 판매했다고 한다. 그 뒤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식사 메뉴로 떡국을 팔기 시작했다. 문제는 당시에는 떡국이 주로 겨울에만 먹는 음식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이다. 그때 떠올린 것이 사철 장사가 가능한 ‘뱅뱅돌이’였다. 뱅뱅돌이는 전주지역에서 비빔밥을 일컬었던 말로, 주걱이나 숟가락으로 뱅뱅 돌려가며 밥을 비비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이름이다. 당시 시장에서는 대형 그릇에 온갖 나물을 넣어 한꺼번에 비빈 뒤, 손님 주문에 따라 1인분씩 덜어주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전주 역사에 조예가 깊은 한학자 고(故) 조병희(趙炳喜 1910~2003) 씨는 1988년에 전주문화원이 발간한 『전주풍물기 (全州風物記)』라는 책에 실은‘1920년대 남밖장’이라는 글에서 뱅뱅돌이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음식점에 들르게 되면 건장한 일꾼이 커다란 양푼을 손에 받쳐 들고 옥 쥔 숟가락 두어 개로 비빔밥을 비벼 대는데, 흥이 나면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빙빙 돌리던 양푼이 허공에 빙빙 돌다가 다시 손으로 받쳐 들고 비벼대는 솜씨는 남밖장만이 가지고 있는 정경이랄까?” 남밖장은 전주부성의 남문, 즉 풍남문 밖에 있는 시장을 가리키는 말로, 지금은 전주남문시장이라 불린다. 낮 시간대 시장도 인상적이지만 매일 밤 열리는 야시장 때문에라도 여행자들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아무튼 남밖장의 이런 뱅뱅돌이를 콩나물과 고사리, 애호박, 표고버섯 같은 채소에 쑥부쟁이와 꽃버섯 등의 계철 채소, 그리고 쇠고기 육회를 얹는 식으로 고급스럽게 재해석해 낸 것이 바로 한국집이었다. 현재 전주에 비빔밥 식당으로 한국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은행과 밤, 대추 등 영양식 재료를 넣은 비빔밥을 돌솥에 담아내는 하숙영 가마솥비빔밥(전 중앙회관), 밥을 미리 초벌 볶음을 해서 내는 성미당 등도 사랑을 받고 있다. 1950년대초 한국집이 비빔밥을 고급화한 이래 셀 수 없이 많은 비빔밥 식당이 자신만의 변주와 혁신을 이어가며 1960~1970년대부터 이미 ‘비빔밥 골목’을 형성하기 시작한 곳이 전주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전주 시민은 물론 전주를 찾는 거의 모든 여행자의 필수 방문지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심지어 2007년 이래 매년 가을이면 전주비빔밥축제도 열리고 있다. 지난 5월 영화의 거리를 비롯해 전주 곳곳에서 진행된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10일간 총 43개국 232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당연한 풍경 너머의 새로운 발견 전주에 가면 한국의 어제와 오늘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5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여러 모순을 극복하며 지탱해 온 조선왕조의 기반에서부터 인적 물적 교류를 통해 더욱 풍성한 문화를 살찌워온 역사, 그리고 전통에 기반을 두되 한순간도 안주하지 않고 변주에 변주,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며 발전해 온 한국 사회의 저변을 만날 수 있다. 2010년 인구 50만 이상의 대도시 가운데 세계 최초로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된 연유, 2012년 세계에서 4번째로 유네스코 음식창의도시로 선정된 비밀도 바로 거기에 숨어 있다. 다시 말하건대 전주는 역사와 전통을 단순히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성을 바탕으로 발전적으로 ‘계승’해야 하는 이유를 일깨워주는 여행지이다. 모든 사진 © 한국관광공사

한국 재료로 즐기는 파인 다이닝

Lifestyle 2024 SUMMER

한국 재료로 즐기는 파인 다이닝 셰프인 조셉 리저우드는 한국의 식재료를 사랑한다. 여러 상을 받은 그의 레스토랑은 한식 메뉴의 가능성을 재정의하며, 기억에 남는 경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식의 매력에 빠져 한국에 정착한 뒤 퓨전 한식 레스토랑 에빗을 운영 중인 조섭 리저우드(Joseph Lidgerwood). 그는 전국 각지를 돌며 재료를 채집하고, 새로운 식재료를 탐색하는 일에 진심이다. 14개월 가까이 안정적인 수입이나 일상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한 조셉 리저우드는 제주도 해변에 앉아 있었다. 산소통도 없이 해산물을 채취하는 제주 해녀들에게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제가 해녀에게 질문을 할 때마다 그녀는 제 입에 성게를 넣어 주셨어요. 그래서 그냥 거기에 앉아 먹기만 했죠. 해녀들이 물질을 끝내고 잠수복을 입은 채로 스쿠터에 올라타 휑하고 가버리는 장면은 제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라며 애정 어린 마음으로 당시를 회상했다. 호주 태즈매니아 섬에서 자란 리저우드는 집 안의 냉동실을 가득 채울 만큼 해산물을 잡을 수 있는 곳에서의 가족 여행을 즐겼다. 그렇지만 냉동실을 가득 채운 해산물과는 달리 그가 평소에 주로 먹는 음식은 고기와 삶은 야채 그리고 으깬 감자였다. “외식은 약 5~6달러를 내고 펍(Pub) 음식을 먹는 것이었고, 그것이 그 당시 저에게는 최고의 ‘파인 다이닝 경험’이었어요.” 햄버거 뒤집기부터 시작해 실력 있는 셰프가 되기까지 리저우드가 십대가 되었을 때, 그는 어머니를 도와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호주 정부에서는청소년들에게 진로 결정을 위한 교류 프로그램을 장려했는데, 그는 여느 친구들처럼 전기기사나 정비사가 되는 것보다 요리사가 되는 것이 멋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첫 직장은 강가에 있는 도시 프랭클린의 고급 카페였고, 그곳에서 햄버거를 굽는 일을했다. 그 후 그는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일했다. 주로 ‘중간에 블루치즈가 들어간 스테이크’ 같은 음식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이전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일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 직장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스테이크하우스의 셰프 중 한 명이 당시 막 영국에서 돌아왔는데 그에게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은 “지옥 같았지만 보람 있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리저우드가 영국으로 갈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런던에서 그의 첫 직장은 프랑스 요리를 다루는 곳이었고, 그 중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셰프 필립 하워드가 공동 소유한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인 더스퀘어(The Square)에서의 일이 포함되었다. 그 다음에는 하워드가 공동으로 소유한 또 다른 런던의 아이콘인 레드버리(Ledbury) 레스토랑에서도 일했다. “그 레스토랑의 주방 일은 완전 미쳤어요. 네 시간 자고 일하는 데 적응하느라 오래 걸렸어요. 어떤 사람들은 한달 만에 그만두기도 했어요. 그냥 레스토랑을 떠나는 게 아니라 아예 요리하는 걸 그만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36세인 리저우드는 여전히 당시 레스토랑에서의 경험이 그의 열정, 헌신, 집중력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엄청난 경험이긴 했지만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죠. 그때 사용한 레시피 중 어떤 것도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요. 다만 당시 배운 것 중 여전히 유효한 것은 어떻게 나의 하루를 더 잘 관리하느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깨끗하고, 체계적이고, 빠르고, 정확하게 일하는 실력 있는 셰프가 될 것인가 하는 거죠.” 원스타 하우스 파티 2016년, 리저우드는 색다른 프라이빗 다이닝 서비스 론칭 계획을 하고 있는 친구와 함께하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세계를 돌아다니며 팝업 다이닝 경험을 제공하는 ‘원스타 하우스 파티(One Star House Party)’를 만들었다. 비교적 간단한 요리, 보통 서너 가지의 요리만 제공했으며, 미식계의 최상층을 목표로 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던 이들만의 방식은 빠르게 열렬한 팬들 만들어냈다. 이벤트가 매번 매진될 정도였다. 이들이 시도한 독특한 지역 중에는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손님이 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승객들이 이층침대에서 네 가지 코스 요리를 먹었던 베트남의 야간열차도 있었다. 한국의 첫 방문 서울에서 열릴 원스타 하우스 파티를 앞두고 그는 제주도를 방문했다. 이는 그가 경험한 첫 한국이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해녀들과 함께 조개를 채취하고 싶었지만, 해녀들은 경험 없는 그들을 데려가면 작업이 느려질 것이라며 거절했다. 그래서 리저우드는 결국 해변에 앉아 곧 다가오는 다이닝 이벤트를 홍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으려고 했다. 그가 해녀들의 생활이나 한국 식재료에 관해 물어보려 할 때마다 해녀들은 그의 입에 성게를 넣어주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리저우드는 서울의 원스타 하우스 파티를 마치고 미국으로 갔다. 그런데 서울 행사에 참석했던 한 고객이 서울에 새로 지은 자신의 건물에 공간을 제공하겠다고 연락해왔다. 2019년에 아내 지니의 지지를 받아 리저우드는 레스토랑 에빗(EVETT)을 열게 되었다. 당시 한국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대부분은 푸아그라와 캐비어 같은 고급 재료에 의존하던 시기였는데, 에빗은 약간 색다른 것을 제시했다. 호주 출신 셰프가 한국 식재료를 중심으로 만든 메뉴를 선보인 것이었다. 한국 사람조차 잘 몰랐던 한국 식재료에 대한 탐구와 발효를 접목한 요리로 에빗은 오픈1년 만에 미쉐린 가이드 1스타에 이름을 올렸다. “저희 요리는 퓨전이 아닙니다. ‘혁신적인 한국 요리’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표현하려는 것은 놀라운 지역의 식재료의 가치입니다. 그 식재료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죠”라고 그는 설명한다. 리저우드 셰프는 한국 음식 중 발효의 역할에 경의를 표한다. 또 그는 정기적으로 즐기는 채집활동도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이 채집활동을 ‘산에서 훔치기’라고 표현한다. 그는 한국 고유의 식재료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며 좀 더 자세히 말했다. “재료가 사용되는 방식이나 음식이 요리되는 방식, 그리고 층층이 쌓이는 맛을 경험하는 것, 바로 이곳 한국에서만 가능하죠. 모든 것이 너무나 역동적이에요. 그리고 사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할 수 없어요. 간장게장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호주에서 식품법상으로 가능하지 않아요. 막걸리 역시 다른 곳에서 만들어지기 어렵죠. 미생물들은 한국에만 있는 것이어서 프랜차이즈를 내거나 과도하게 위생적으로 만들면 그 마법이 사라져 버려요. 기술적으로는 한국 음식일지 모르지만, 진짜 한국 음식은 아니게 되는 거죠.” 리저우드의 최근 요리 중에는 모과 동치미가 있는데, 일종의 물김치인 이 메뉴를 만들기 위해 그는 멍게, 제주 감귤, 염소젖, 그리고 당귀 뿌리를 사용했다. 그는 이것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맛의 조합 중 하나라고 말한다. 가족 같은 에빗 에빗에는 9개의 테이블이 있고 한 번에 약 25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다. 메뉴는 코스요리로만 제공되는데, 리저우드는 “몇 가지 시그너처 요리를 더해 완성도를 높였다”라고 설명한다. 레스토랑에서는 15명의 셰프가 테이블에서 요리에 대해 직접 설명하고 마무리한다. 리저우드는 복잡하고 정교하게 정제된 음식은 그의 팀이 끊임없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최고의 메뉴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쓴 결과를 보여준다고 믿는다. 그는 외국인이 한국 음식을 제공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웠지만, 오픈 이후 그의 레스토랑은 음식비평가와 고객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사람들이 우리가 한국의 식재료를 사랑하는 것을 아주 좋게 봤다는 것이었어요. 큰 동기부여가 되었죠. 저희 음식이 항상 멋지거나 놀랍지는 않지만, 고객들이 음식의 진가를 알아주죠.” 2020년 미쉐린 1스타를 비롯해 여러 가지 상과 찬사를 받은 레스토랑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한국의 파인 다이닝 요리 현장의 절정에 있다. 레스토랑을 리모델링하고, 최근에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으로 이전했는데. 올해 미쉐린 2스타를 받지 못한 것엔 실망했지만, 그는 레스토랑의 성공이 미슐랭 평가에 달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레스토랑의 현 상태와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합니다. 멋진 고객들을 모시고 있으며, 그들은 저희 음식을 정말 좋아합니다. 또 저는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식재료를 발견하고요.” 그의 수준 높은 한국 요리를 칭찬하는 긍정적인 리뷰가 넘쳐나지만, 가장 의미 있는 건 비평가들의 절제된 평가이다. 한 평론가는 에빗에서 식사하는 것이 가족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하기도 했다. 캐러맬라이즈 된 크림을 가득 채운 후 흑마늘 멸치와 수수떡을 올린 메주 도넛이다. 한국 발효의 핵심인 메주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요리로, EVETT의 요리를 대표하는 디쉬가 되었다. © 에빗 특별한 경험 10코스 이상의 메뉴와 전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한국의 술을 곁들여 제공하는 메뉴는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요리사들은 끊임없이 창작의 압박을 받는다. 어떻게 하면 고객에게 기억 남는 식사를 제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은 끊임없이 그들을 따라다닌다. 모든 테이블의 고객들은 특별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지만, 모든 고객이 각 요리와 그 재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리저우드 셰프는 고객들이 좋아하고 가치 있게 여길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각 테이블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가장 좋은 사례는 에빗에서 식사를 한 근처 치킨집 가게 주인 이야기일 것이다. 리저우드 셰프는 맥주 몇 병을 마시며 그에게 레스토랑의 철학을 설명했다. 치킨집 주인은 왜 호주 출신 셰프가 한국 식재료를 이용해 요리하길 원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후 치킨집 사장은 그의 아내와 에빗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음식이 “나쁘지 않네”라고 말했다. 리저우드에게 이 평가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 말은 제 마음에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는 말이었어요. 저희가 한국의 식재료가 얼마나 훌륭한지 보여주기 위한 원동력이 되어주는 말이었죠.”

농업의 미래를 이끄는 만나 CEA(Manna C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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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의 미래를 이끄는 만나 CEA(Manna CEA) 만나CEA는 기술로 농업의 미래를 이끈다. 환경제어시스템과 아쿠아포닉스 농법을 결합해 환경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농업의 불확실성을 보완하고, 나아가 기후위기로 인한 세계 식량 부족을 해결할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환경제어시스템과 아쿠아포닉스 농법 기술로 농업의 미래를 이끄는 만나 CEA의 전경 ⓒ MANNA CEA 만나CEA 전태병 대표는 충북 진천에서 40종의 작물을 재배하는 30대 젊은 농부다. 그러나 전 대표는 작물에 직접 물과 비료를 주지 않는다. 그가 귀농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교육하고,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제어시스템이 알아서 작물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또 농업용수 부족과 비룟값 인상, 인력 부족을 걱정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농부인 동시에 공학자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로운 기술의 탄생 전태병 대표는 창업 전까지 농사를 지어본 적 없었다. 그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졸업을 앞두고 로스쿨 진학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 대표는 우연히 적정기술을 알게 되었다. 적정기술이란, 기술이 사용되는 공동체의 정치‧문화‧환경적 측면을 고려해 만들어진 기술을 말한다. “적정기술에 대해 들었을 때, 평소 관심을 두었던 농업과 전공 분야인 시스템제어기술을 접목한다면, 세상에 이로운 기술이 탄생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기후 변화, 농촌 인구 고령화 등 농업 위기에 대한 우려가 계속되고 있었거든요. 재배 환경을 시스템으로 관리할 수 있다면, 농촌이 안고 있는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죠.” 전 대표는 먼저 대학교 창업보육센터에 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유기농법 전문가, 환경제어기술 전문가 등을 만나 농사 환경에 맞는 제어시스템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센서를 통해 온실 속 온도, 습도, 빛, 이산화탄소의 양과 암모니아, 칼륨, pH 농도 등 식물에 필요한 다량원소와 미량원소를 디지털 데이터로 수집‧관리하는 시스템이다. 그는 시스템 개발에 성공한다면, 세계 어느 지역에서든 최적화된 생장 환경을 구현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회사 이름도 지었다. 만나 CEA의 ‘만나’는 성경에 나오는 단어로 ‘하늘에서 내린 음식’을 뜻하며, CEA는 환경제어농법(Controlled Environment Agriculture)의 약자다. 하늘에서 음식을 내려주듯 농업기술을 발전시켜 전 세계에 굶은 사람이 없게 하겠다는 뜻이 담겼다. 친환경 농업의 미래, 아쿠아포닉스 시스템 시스템 개발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특히 작물에 공급하는 유기물 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화학비료를 사용하면 쉽지만, 그것은 만나 CEA가 지향하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기술’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던 중 전태병 대표는 아쿠아포닉스(Aquaponics) 농법을 알게 되었다. 아쿠아포닉스는 물고기 양식(Aquaculture)과 수경 재배(Hydroponics)를 결합한 합성어로, 물고기를 키우면서 식물을 재배할 수 있는 친환경 농법을 말한다. 아쿠아포닉스 시스템은 다음과 같다. 물고기가 수조 안에서 자라며 배설한다. 이 배설물은 미생물 발효를 거쳐 식물에 필요한 영양분 형태로 공급한다. 영양분과 함께 공급한 물이 농장 바닥에 모이면, 이 물은 정수 필터를 거쳐 다시 수조 안으로 들어간다. 쉽게 말해, 작물 재배와 물고기 양식에 필요한 물을 계속 순환해 사용하는 것이다. 아쿠아포닉스 농법의 장점은 첫째, 물을 절약할 수 있다. 토양 재배의 경우 물을 뿌리면 그대로 땅에 스며들어 재사용하기 어렵다. 하지만 아쿠아포닉스 시스템에서는 작물 재배와 물고기 양식에 사용한 물이 순환‧공급되기 때문에 물을 영구적으로 재사용할 수 있다. 실제로 만나 CEA는 2014년부터 10년간 농장을 운영하면서 물 한 방울 버린 적 없다. 또 자연 증발하는 만큼의 물만 추가하면 되기 때문에 일반 농가가 사용하는 물양의 5%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둘째, 유기농법이다. 일반적인 수경재배는 작물의 생육을 촉진하기 위해 화학비료를 사용한다. 그러나 만나 CEA에서는 농약과 합성 물질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물고기의 배설물에서 식물 배양액을 추출해 사용한다. 또 일반 수경재배 시 사용한 물은 화학비료가 녹아들어 재사용하기 어렵지만, 아쿠아포닉스 시스템에서는 물속 유기물 농도를 모니터링해 정화하여 재사용할 수 있다. 데이터 기반의 제어시스템으로 유기물 농도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 만나 CEA에서 재배되고 있는 딸기.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에 대비하여 환경 및 생육 데이터를 기반으로 환경을 제어하고 에너지 효율적인 방식을 이용해 사계절 내내 딸기를 생산하고 있다. ⓒ MANNA CEA 소비자도 농부다 환경제어시스템과 아쿠아포닉스 시스템을 실제 농장 안에 구현할 계획을 세웠을 때, 전태병 대표는 충북 진천에서 유리온실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무 연고도 없었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달려갔다. 젊은 농부의 새로운 꿈이 자라날 온실을 향해서 말이다. 만나 CEA의 제어시스템을 온실에 적용하자 작은 규모의 온실 속에서 많은 농산물이 생산됐다. 전태병 대표는 “이것이 만나 CEA가 제안하는 농법의 세 번째 장점”이라고 설명한다. “만나 CEA에서는 기존 노지재배와 비교해 일반 작물은 120%, 특정 작물은 1,500% 이상 많은 양의 농산물을 수확할 수 있습니다. 자연재해, 병충해 위험도 없고요. 배양액, 온‧습도 제어시스템과 광연시스템을 활용해 일정한 환경에서 작물을 재배하기 때문에 매년 일정한 생산량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아쿠아포닉스 농법으로 기른 물고기는 추가 수익원이 됩니다.” 누군가는 “그 많은 농산물을 어떻게 판매하느냐?”라고 물을 수도 있다. 소비자에게 신선한 농산물을 제공하기 위해 만나 CEA에서는 첫째, 체험농장을 운영한다. 일반 농가에서는 재배, 수확, 포장, 판매 등 과정에서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만나 CEA에서는 체험농장을 운영해 어린이들이 싱싱한 딸기를 직접 따먹도록 한다. 그럼 인력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체험농장 운영 수입을 추가로 얻을 수 있다. 둘째, 생산한 농산물을 샐러드로 만들어 친환경 패키지에 담아 판매한다. 만나 CEA 운영하는 뤁스퀘어에도 재료를 공급한다. 뤁스퀘어는 진천에 있는 미래 농업 복합문화공간으로 카페, 레스토랑 등 외식사업, 숙박업과 농업을 연결한 공간이다. 농업 교육도 이루어진다. 체험농장과 뤁스퀘어를 찾는 고객 수는 월평균 1만 명에 이른다. 팜스테이를 할 수 있는 숙박 시설을 비롯해 뤁스퀘어 내의 건축물들은 국제적인 건축 전람회 코리아 하우스 비전(Korea House Vision) 출품작이다. 하우스 비전은 집을 교통, 의료, 기술과 삶이 교차하는 새로운 가능성이 담긴 플랫폼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미래 생활을 제안하는 프로젝트다. 2022년 한국 진천에서 열린 하우스 비전은 ‘농(農)’이라는 주제로 일본의 유명 디자이너인 하라 켄야(はらけんや, 原研哉, Hara Kenya)가 총괄하고 만나 CEA가 공동주최한 가운데 뤁스퀘어에서 열렸다. 농촌의 미래 주거 플랫폼을 우리는 여전히 뤁스퀘어에서 만날 수 있다. 농업과 문화가 연결되는 공간인 뤁스퀘어 실내 모습. 농업과 기술, 문화가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으로, 실내 정원, 카페, 체험농장, 스테이, 스마트 팜 등 미래의 농촌을 볼 수 있는 다채로운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 김동규 친환경 산업이자 엔지니어링 산업인 농업 전태병 대표는 만나 CEA를 ‘농업인을 위한 농업 관련 시설과 보조 소프트웨어를 판매하는 회사’라고 정의한다. 농산물이 아니라, 미래 농업인을 위한 기술을 판매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뤁스퀘어에서 농촌의 미래 가능성을 발견하길 바란다. “귀농하고 싶어도 경험이 없어서 또는 인력, 자본 문제 등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농사 경험과 인력의 부족 문제는 환경제어시스템을 통해 극복할 수 있습니다. 판로 개척이 어렵다면, 사람들을 농장으로 끌어들이면 되고요. 자본이 없다면 농업에 동참하고 싶은 사람들을 투자자로 모집해 공동으로 농장을 운영하고, 수익을 공유해도 됩니다. 생각을 바꾸면, 농촌 안에서도 얼마든지 문제점 대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가 만나 CEA를 통해 농업의 미래 가능성을 엿보고 있다. 만나CEA가 구축한 기술은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카자흐스탄 등에 수출되고 있다. 아시아 최초 미국 농무부(USDA)로부터 오가닉 인증도 받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최초 식물 공장 건립을 완성하고 추가 수주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러나 전태병 대표의 목표는 더 높은 곳에 있다. “저의 목표는 만나 CEA를 최고의 솔루션 회사로 만들고, 농업을 친환경 산업이자 엔지니어링 산업으로 자리 잡게 하는 것입니다.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앞으로도 농촌 문제를 해결하고, 농업기술을 혁신하기 위해 계속 고민하고 연구하겠습니다.” 6,000년 전 농업혁명 발생 이래 인류는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제 만나 CEA로부터 새로운 혁명이 시작될 것이다. 모든 인류가 식량 걱정 없이 살게 되는 초록빛 혁명 말이다.

보물이 된 누군가의 쓰레기

Lifestyle 2024 SPRING

보물이 된 누군가의 쓰레기 우리의 일상은 이미 플라스틱을 배제하고는 살아갈 수 없다. 져스트 프로젝트는 폐플라스틱, 비닐 등의 쓰레기를 편애하고 수집하며, 이를 소재로 일상의 물건을 만든다. 쓰레기가 ‘애물’에서 ‘보물’로 자리매김하는 그날까지 진지하게 연구하고 디자인한다. 리사이클 플라스틱으로 제작한 블록 세트. 4개의 피스가 한 세트로 구성되어 장식품, 비누 등을 놓는 트레이나 티코스터 등으로 사용할 수 있다. ⓒ 져스트 프로젝트 지속적 팽창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를 연속시킨다. 이에 따라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가 만연해진 시대가 됐다. 생산과 유통, 소비와 폐기까지 이 모든 과정에는 탄소 배출이 수반된다. 기후 위기를 초래한 주요 원인으로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가 명백하게 지목된 이유다. 생산과 소비에 윤리적 관점 더하기 탄소 중립으로 향하기 위해 생산과 소비 과정에 윤리적 관점을 곁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생산 방식에 있어서는 버려지는 자원에 디자인을 더하거나 활용 방법을 바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는 업사이클 문화가 영향력 있는 움직임으로 자리 잡았다. 업사이클은 2002년 미국의 건축가 윌리엄 맥도너(William McDonough)와 독일의 화학자 미하엘 브라운 가르트(Michael Braungart)가 던진 화두다. 이들은 2003년 발간된 『요람에서 요람으로(cradle to cradle)』라는 책을 통해 생태계의 순환 과정을 제품 설계에 적용해 산업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자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 쓸 만하고 유용한 소재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생을 마감하지 않고 새로운 제품으로 재탄생할 수 있도록 기술과 디자인으로 자원순환 아이디어를 모색하고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한 편에서는 윤리적 생산이 이루어진다면 윤리적 소비가 수반되어야 한다. 져스트 프로젝트같은 브랜드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도 그 실천의 하나다. 리사이클 플라스틱으로 제작한 큐브형 홀더. 가운데 홈이 있어 명함, 사진, 인센스 스틱 등을 꽂아 사용할 수 있다. ⓒ 져스트 프로젝트 하고 싶은 일로 만드는 변화 자원순환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간추려 말하면 어떤 물건을 아껴 사용하고, 다시 사용하고, 재활용하는 방법이다. 이 모든 영역에서 활발하고 지속적인 실천이 이뤄져야 탄소중립에 유의미한 순환이 이뤄진다. 져스트 프로젝트는 올해로 12년 차인 기업으로 지속가능성에 대한 메시지를 꾸준히 전하고 있는 디자인 브랜드이다. 쓰레기를 소재와 자원으로 바라보고 수집하여 쓸모 있는 물건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그들의 주요 일이다. 이외에도 업사이클링에 관한 전시와 여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한다. 또한 매거진을 발행해 자원순환을 위한 생태계를 조망한다거나 다양한 워크숍을 통해 업사이클링 문화를 활성화하는 데 힘쓴다. 져스트 프로젝트의 움직임이 눈에 띄는 이유는 이영연(李永緣, Yi Young-yeun) 대표가 정의하는 브랜드 방향성에 있다. 져스트 프로젝트를 환경 운동의 하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들에게는 영감을 주거나, 소비자의 기호와 취향에 따라 필요한 제품을 제안하는 디자인 브랜드로 정의한 것이다. 지구를 지키겠다는 거창한 의무나 의욕이 아니라 정말 하고 싶은 일, 갖고 싶은 물건을 만드는 데 의미를 두는 것이다. 마치 ‘그냥(져스트)’이라는 이들의 이름처럼 말이다. 져스트 프로젝트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 쓰레기 > 는 쓰레기를 좋아하고 모으고 탐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잡지의 표지는 버려진 전단지나 인쇄물 등을 사용하여 같은 표지가 하나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 져스트 프로젝트 쓰레기의 변신 져스트 프로젝트가 선보이는 제품들은 어떤 쓰레기를 재활용해 만들었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그들이 디자인한 제품을 보면 어떤 쓰레기를 활용했는지가 제품명에서도 드러난다. ‘I was t-shirts’, ‘I was lavel’, ‘I was foil’, ‘I was straw’처럼 말이다. 버려진 티셔츠로 만든 러그, 버려진 라벨로 만든 가방, 버려진 과자봉지와 빨대로 만든 지갑과 파우치 등이다. 이들은 쓰레기가 영감의 소재이자 즐거움의 대상이라고 말할 정도로 쓰레기를 바라보는 관점이 남다르다. 우리가 흔히 먹고 버리는 과자 봉지만 봐도 그렇다. 과자 봉지는 삼중지 이상으로 다른 플라스틱 소재가 접합되어 있어 재활용이 어렵다. 그러나 져스트 프로젝트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과자 봉지는 튼튼하고 방수 기능까지 겸비한 질 좋은 소재다. 버려진 과자 봉지를 활짝 펴고 기름기를 깨끗이 닦아낸 후, 다양한 크기와 용도로 만들어낸 파우치는 생각보다 탄탄하고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여러 종류의 과자 봉지로 만들어진 만큼 결과물 역시 모두 다른 모습, 하나하나 살펴보며 취향에 따라 고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과자 봉지로 만든 파우치가 ‘I was foil’이라면 ‘I was t-shirts’는 러그다. 한눈에 봐도 탄탄함이 느껴지는 이 멋스러운 러그는 헌 티셔츠를 길게 자르고 손베틀로 직조한 뒤 손수 바느질해 마무리했다. 여기에 사용되는 티셔츠를 고를 때는 면 티셔츠만 선별하기 때문에 완성된 제품 역시 세탁기에 돌려 쉽게 세탁할 수 있고, 소재의 특성상 각기 다른 패턴이 만들어져 유니크한 디자인으로 완성된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손베틀로 촘촘하게 원단을 엮는 제작 방식 덕분에 쓰레기로 만든 러그라는 사실을 차치할 정도로 예쁘고 퀄리티 또한 우수하다. 져스트 프로젝트에게 쓰레기는 자원이고 보물이자, 아이디어의 출발이라는 설명에 수긍이 간다. 플라스틱의 가능성 져스트 프로젝트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단단하게 성장해 온 비결은 비단 쓰레기를 이용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해온 것 때문만은 아니다. 다양한 브랜드와 기업, 사회공헌 팀과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져스트 프로젝트가 가진 역량을 필요한 곳에 적극적으로 발휘해 온 궤적에서 그 비결을 알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2022년 서울 디자인페스티벌에서 노플라스틱선데이와 함께 기획한 플라스틱 전시가 손꼽힌다. 노플라스틱선데이는 플라스틱 쓰레기의 지속가능한 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힘쓰는 브랜드다. 져스트 프로젝트는 기획으로 참여해 국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가구/산업 디자이너를 집합시키고 재생 플라스틱을 주제로 각자의 디자인 언어를 반영한 가구를 만들도록 제안했다. 참여 디자이너는 저마다 익숙하게 사용하던 재료 대신 재생 플라스틱 판재를 이용해 아름답고 유용한 가구를 만들어냈다. 이 프로젝트는 참신한 디자인으로 재생 플라스틱에 대한 가능성을 활짝 연 이벤트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환경 기후 문제에서 늘 커다란 문제이자 화두로 다뤄진 폐플라스틱의 기능적이고 심미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다. 이외에도 NGO단체인 팀앤팀과 함께 만든 다이어리도 인상적이다. 다이어리 커버로 폐페트병을 100% 재활용한 리사이클 폴리에스터 소재를 사용하고 이후 파우치로도 재사용이 가능하도록 디자인한 것이 특징으로 제품의 탄생부터 폐기까지 생애주기를 고심한 결과다. 이렇게 만든 다이어리의 수익금은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한 동아프리카 주민들의 식수 자원을 위해 사용되어 더욱 뜻 깊은 프로젝트였다. ‘Plastics’는 져스트 프로젝트와 노플라스틱선데이가 기획한 프로젝트로, 2022년 10명의 아티스트와 함께 작업한 작품을 선보였다. ⓒ 져스트 프로젝트 좋은 물건의 재정의 날로 증가하는 어마어마한 쓰레기 문제는 환경 오염과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한 큰 화두라는 것뿐 아니라 생산과 소비 시스템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경각심을 갖게 한다. 모두가 탄소중립이라는 공통된 지향점을 향해 방향을 바로잡고 물건을 기획하는 단계, 소재를 고르고 디자인하는 과정, 물건의 쓰임을 다한 후 폐기되는 모든 물건의 여정을 고려하는 것을 기본으로 다양한 시도와 실험이 이뤄져야 할 때다. 져스트 프로젝트는 지난 10여년 간 좋은 물건, 제안하고 싶은 디자인을 정의하고 ‘그냥’ 밀고 나가는 방식으로 행보를 꾸준히 이어왔다. 이들의 방식은 재활용, 업사이클 문화를 더욱 전달력 있게 제시하는 사례로도 인상 깊지만, 소비자들에게 좋은 브랜드의 기준을 다시 생각해 보게끔 한다.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한 예술가의 런치박스‘쓰레기 뷔페’. 품질이 고르지 못해 선택받지 못한 식재료로 만든 식사와 유리, 패브릭, 플라스틱 등 다양한 쓰레기를 취향과 기호대로 고를 수 있도록 한 프로그램이다. ⓒ 져스트 프로젝트 유다미(Yoo Da-mi 劉多美) 라이터

수많은 작업이 집약된 푸드 스타일링 세계

Lifestyle 2024 SPRING

수많은 작업이 집약된 푸드 스타일링 세계 푸드 스타일리스트는 음식과 식기 등으로 테이블 공간을 연출하는 일을 한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음식의 질감, 맛, 향 그리고 매무새까지 전달해야 한다. 노력과 창의력을 동시에 갖추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모니터로 레퍼런스를 꼼꼼히 확인하며 준비한 음식을 세팅하고 있는 푸드스타일리스트 보선(金甫宣) 씨. 클라이언트의 컨펌은 음식을 준비하고 스타일링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작업이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 큰길에서 살짝 벗어난 골목 안쪽에 지은 지 오십여 년쯤 된 이층집이 있다. 대문은 없고 마당 한쪽에 커다란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근처 성미산에 사는 새들이 날아와 쉬어가는 곳이다. 감나무가 환히 내다보이는 통창 안쪽에는 새벽 세 시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스튜디오가 있다. 사람들과 온갖 물품이 분주히 드나들고, 환한 조명이 켜졌다가 꺼지고,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긴다. 호기심 많은 동네 강아지들과 고양이들이 기웃거리는 이곳은 푸드 스타일리스트 김보선 씨(金甫宣)의 작업실이다. 푸드 스타일리스트의 영역은 시대가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다. 음식을 직접 하는 것은 물론이고 소비자 시장을 조사하거나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메뉴도 개발한다. 일의 영역이 넓으니 일과도 바쁘게 돌아간다. 이십 년 넘게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살아온 김보선 씨의 하루하루도 다양한 일들로 촘촘하게 채워진다. 뭐든 잘해야 하는 직업 김보선 씨는 작업실 근처에 있는 집에서 걸어서 출근한다. 보통 아침 여덟 시에 일어나서 아홉 시에 작업실의 문을 여는데 외부 촬영이 있는 날은 예외다. 촬영 시작이 아홉 시라면 다섯 시부터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예전에는 잡지에 실릴 음식을 촬영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판도가 달라졌다. “잡지가 많이 없어지고 광고 시장도 대부분 디지털로 옮겨갔어요. 요즘 들어오는 일은 브랜드SNS 작업, 전시 세팅, 행사 세팅 등이 주를 이루고 주방가전 신제품이 나오면 그 제품을 테스트하고 메뉴를 개발하고 소책자를 만드는 일도 해요.” 이전에는 요리 따로, 스타일링 따로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의뢰인 대부분이 요리까지 다 할 줄 아는 스타일리스트를 찾는다. “요리를 알고 스타일링을 하느냐, 모르고 하느냐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달라져요. 요리가 받쳐 주지 않으면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어서 결국 요리를 배우게 되죠. 예를 들어 완성된 볶음요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기름칠을 할지 물엿을 바를지 결정해야 하는데, 그 판단을 하려면 요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해요. 또 고기 종류에 따라 가장 맛있어 보이는 온도가 몇 도인지도 알아야 하죠. 그래서 요리뿐만 아니라 식재료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해요.” 한식, 양식, 중식, 일식 등 요리의 장르도 다양하고 그에 따른 식재료도 무궁무진하다. 그중 특정한 분야만 잘해서는 일을 맡을 수가 없다. “어떤 일이 들어올지 모르니까요. 전반적으로 다 할 줄 알아야 하고 잘해야 해요.” 잘해야 하는 건 요리만이 아니다. 촬영에 필요한 각종 소품도 준비해야 한다. 음식을 돋보이게 하는 그릇부터 시작해 그와 어우러지는 테이블보, 냅킨, 수저, 양념통, 꽃 등…. “시안이 촬영 하루 전날 오는 경우도 많아서 뭘 사러 갈 시간도 없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평소 시간 날 때마다 준비해야죠.” 요리연구가, 플로리스트, 코디네이터, 디자이너를 모두 합한 직업이 푸드 스타일리스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최고의 바게트 전문가를 가리는 ‘르빵 바게트 챔피언십 2023’의 공간을 연출한 모습. 8m에 달하는 대형 테이블은 수십 여 종류의 바게트와 각종 오브제로 채웠다. ⓒ 김보선(金甫宣) 스물두 살에 찾은 꿈 대학교 3학년 때였다. 우연히 본 TV 프로그램을 통해 푸드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원래 요리에 관심이 많았어요. 요리 관련 일을 하고 싶었는데 식당에서 일을 하면 같은 요리만 하잖아요. 매번 새로운 요리를 하고 더 맛있어 보이게 연출하고 또 화보로 작업물을 만들어 내는 푸드 스타일링이라는 일이 재미있어 보였어요.” 결심이 선 이후 앞만 보고 달렸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한 다음 본격적으로 꿈을 좇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는 푸드 스타일링을 위한 학교도 아카데미도 없었다. “당시 요리연구가이자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던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하는 클래스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선생님 스케줄이 있으면 수업이 없어지거나 미뤄졌죠.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클래스였는데, 한 달에 겨우 한 번 할 때도 있었어요.” 푸드 스타일링을 배우다 보니 요리를 모르면 안 되겠다 싶어 신라호텔 조리 교육센터에 들어갔다. “거기서 양식을 배운 이후 푸드 스타일리스트의 어시스턴트로 들어가 일을 더 배우려고 했어요. 그런데 배우려는 사람은 많고 자리는 없으니까 조리 경력이 있으면 남들보다 유리하겠다 싶어 파스타 전문점에 들어가서 일을 했어요.” 그 경력을 발판으로 어시스턴트가 되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수업을 일주일에 하루로 몰고 나머지 시간 내내 일을 했다. 졸업 후 다음 단계를 고민하던 그녀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 요리 종류와 식재료가 다양했어요. 디저트, 와인 등 다루는 범위도 넓었고요. 견문을 넓힐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일본에서 생활비, 학비,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세 개를 하며 일을 배웠다. 2005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부모님이 계신 집 반지하에 조그마한 작업실을 차려 푸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독립생활을 시작했다. “일은 없었어요. 삼 개월에 하나 들어올까 말까 했죠. 멍하니 있으면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 도서관, 서점에 다니면서 공부를 계속했어요. 그러다 일이 하나라도 들어오면 연습을 엄청 많이 했어요.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여러 번 테스트하고, 한 컷을 찍는 촬영에도 플랜C까지 만들었어요. 한 번 일을 맡긴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고, 주위에 소개해 주고, 그럭저럭 자리를 잡기까지 5년 정도 걸렸어요.” 원물 자체가 싱싱하고 좋아야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늘 식재료 공수에 심혈을 기울인다. ⓒ 김보선(金甫宣) 먹는 것도 일, 쉬는 것도 일 반지하에서 작업실을 시작한 이후 서너 번을 옮겼고, 지금의 작업실은 8년 전에 이사한 곳이다. 촬영은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잡힌다. 촬영이 없는 날에는 촬영 준비로 분주하다. 시안을 파악하고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고 스태프들에게 할 일을 지시한다. ‘북유럽의 삭힌 청어요리’처럼 생소한 음식을 만들어야 할 때면 식재료를 준비와 레시피 연구, 그리고 테스트도 해야 한다. 그나마 여유가 있는 날에는 영수증과 세금계산서 등을 정리한다. 아침은 삶은 달걀이나 고구마로, 점심과 저녁은 거의 배달 음식으로 때운다. “냉장고에 좋은 식재료들이 많지만, 저를 위해 요리하거나 정리할 시간도 여유도 없어요. 거의 매일 새벽에 일이 끝나거든요. 집에선 잠만 자요. 하루 네 시간 정도 자나 봐요.” 가끔 시간이 날 때면 사람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김보선 씨에게는 일의 연장이다. 맛깔스러운 음식을 보면 자동으로 몸이 반응한다. 요리조리 보며 조리법을 탐색하고 또 언제가 같은 음식의 스타일링을 제안 받게 되면 직접 만들어봐야 하니까 말이다. “아이디어가 떠올라야 정리가 되고 실행할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한 일이에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일을 한다고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일을 분리하는 게 불가능해요. 좋아하지 않으면 못 하는 일이죠. 원래 뭐든 조금 하다 금방 포기하는 성격이었는데 이 일은 저한테 맞아요. 할수록 더 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당의 감나무로 날아드는 새들을 바라보는 일이 김보선 씨에겐 짧은 휴식이고 위로이다. 아니 어쩌면 그 역시 또 다른 아이디어의 온상일 것이다.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가(Photographer)

소셜미디어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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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미디어 인류학자 이야기와 스토리텔링을 좋아하는 큰 키의 바트 반 그늑튼(Bart van Genugten) 씨는 2014년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이후 그는 결혼하고 인기 많은 유튜브 채널 ‘아이고바트(iGoBart)’를 운영하고 있다. 채널에서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네덜란드 참전용사에 대해 알려주고 한국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들을 종종 소개한다. 유튜브 채널 아이고바트를 운영하는 바트 반 그늑튼 씨. 그는 유튜브 콘텐츠를 촬영할 때 주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며, 손에 쥐기 편한 작은 카메라를 가지고 다닌다. 바트 반 그늑튼 씨의 첫 한국 여행은 생각보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2014년 스페인 말라가(Malaga)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동안 그는 한국인 여학생과 데이트하고 있었고, 이를 계기로 서울의 성균관대학교 한국어학당에 등록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울에 사는 대신 인천의 부평구 서쪽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그곳의 공공 표지판은 외국인 방문객을 특별히 고려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인구 8,500여 명인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그레이브(Grave)에서 자란 그에겐 도시 탐색의 기술이 필요치 않았다. “출구가 아주 많은 지하철역은 익숙해지기 어려웠어요. 한국어를 읽을 수 없으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죠”라고 반 그늑튼 씨는 당시를 회상했다. “대도시의 젊은이가 되기 위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죠.” 그렇지만 한국은 지속해서 그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다. 다시 아시아로 석 달 후 반 그늑튼 씨는 네덜란드로 돌아갔고 일을 시작했다. 일 년이 지난 후 그는 자신이 직장 생활에 완전히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일을 그만두고 아시아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몇 주를 보낸 후 6개월 동안 중국, 대만, 미얀마, 베트남, 태국, 필리핀을 돌아보는 배낭여행을 했다. 하지만 그의 여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시아를 돌아보는 여행이 대체로 꽤 심심했어요. 늘 혼자 다녔죠. ‘이게 무슨 삶인가?’라고 자문했어요. 여전히 어딘가를 가고 싶었는데 한국이 가장 익숙했어요. 한국은 저에게 새롭고 완전히 낯설면서도 동시에 아주 편안한 느낌을 주는 묘한 곳이었어요. 서구와 아시아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룬 곳이죠. 모든 것을 알지 못해도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었어요.” 결혼과 문화 반 그늑튼 씨는 2017년 초 한국에 되돌아오게 된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첫째로, 그는 나중에 그와 결혼하게 될 여성인 김휘아(金輝妸 Kim Hwi-a) 씨를 만났다. “우리는 데이트 앱에서 만났어요. 그녀는 상수동에, 나는 합정동에 살고 있어서 거의 이웃이었죠. 우리는 서로 잘 맞았어요. 근데 그녀를 만났을 때가 네덜란드로 돌아가기 얼마 전이었어요. 그래서 한국에 좀 더 머물러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죠. 서로에 대한 모든 것을 좋아했기에 결혼을 안 할 이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혼했죠.” 2019년에 결혼을 한 후 반 그늑튼 씨와 그의 아내는 서울 마포구에 둥지를 틀었다. 그곳은 한강 옆으로 산책길과 자전거길이 있었고 주변에 여러 대학과 예쁜 가게들, 그리고 젊은이들이 밤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장소들이 있었다. 처음부터 한국의 급격한 변화는 반 그늑튼 씨에게 끊임없는 매력의 원천이었다. “일제강점기 억압과 한국전쟁을 겪은 나라가 경제적 성공과 민주화를 이루어낸 게 아주 흥미로웠어요. 그 후 아시아 경제위기를 맞고도 10년도 채 되지 않아 세계에 알려진 곳 중 하나가 된 것도요. 저는 인간과 환경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인문지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한국이 어떤 식으로든 더 커지게 될 거라고 느꼈어요.” 그는 한국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동네 고유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며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 귀 기울인다. 유튜브에 도전하다 2018년에 아내의 도움을 받아 반 그늑튼 씨는 ‘섹시그린(Sexy Green)’이라는 유튜브를 시작했다. 환경 이슈에 초점을 맞춰 원래는 친환경 물품을 파는 회사를 시작하는 게 목적이었고 채널의 콘텐츠를 통해 제품을 홍보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행과 다양한 문화에 대한 그의 열정과 관심이 곧 채널의 이름과 방향을 바꾸게 했다. 그렇게 해서 ‘아이고바트(iGoBart)’가 탄생했다. ‘아이고’는 새로운 곳을 방문하고 싶어 하는 반 그늑튼 씨의 욕구를 표현하는 동시에 언어유희이기도 하다. 한국어에서‘아이고’는 감탄사로 놀람과 공감 혹은 슬픔까지 표현한다. 300편이 넘는 유튜브 영상은 3,200만 뷰를 기록했다. 가장 인기 있는 영상 중에는 한국전쟁에서 싸운 네덜란드 참전용사의 인터뷰와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들이 있다. 이 시리즈는 그가 2018년에 북한을 방문한 후 만든 영상으로 시작한다. 그에게 이 시리즈는 네덜란드와 한국 사이의 가장 중요한 관계 중 하나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수천 명의 남자들이 이곳에 와서 싸웠고 그들 중 일부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이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생존하는 참전용사 대부분의 나이가 여든이거나 그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의 채널에 나왔던 이들 중 일부는 이후 돌아가셨다. 이제 살아 있는 네덜란드 참전용사가 100명이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마음은 다급하다. 이 시리즈는 그들에게 전쟁에 대한 기억을 끌어내는 것보다는 참전용사들에게 그들의 희생을 고맙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반 그늑튼 씨는 천생 이야기꾼이다. 혹자는 그를 인플루언서라고 부르지만, 그 자신은 스스로를 ‘기록자’, ‘영상 제작자’, 그리고 ‘유튜버’라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이들이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믿는다.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해요. 그것이 저에게 큰 영감을 줍니다. 제 아버지는 10형제 중 막내이고 이미 70세이세요. 아버지의 부모님은 15년 전에 97세로 돌아가셨어요. 그의 조부모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싸웠던 사람들을 알고 있었죠. 이제는 도달할 수 없는 역사죠.” 그가 작업 중인 ‘웰컴 투 마이 동(Welcome to my DONG)’은 서울의 467개 행정구역을 탐구하는 프로젝트다. 벽 한쪽에 그려놓은 지도에 다녀온 동네를 색칠하고 그가 느낀 동네의 특징을 적어놓는다. 발견의 2,000킬로미터 2021년, 반 그늑튼 씨는 번아웃이 왔다. 매주 콘텐츠를 올려야 하는 압박감에 시달렸고 결과물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의 영상들은 그가 만들고 싶어 하는 것들보다 뷰어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들을 반영했다. 그의 아내는 “인생이 당신에게 뭘 주는지 가봐!”라는 영감을 주는 말과 함께 자전거 여행을 제안했다. 2021년 7월부터 10월까지 그는 약 2,000킬로미터를 해변을 따라 한국을 자전거를 타고 돌았다. 그는 외딴 지역의 풍경과 해안의 경치를 즐겼고, 시간이 멈춘 듯한 곳들을 방문했다.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시골 지역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 여행은 자신의 삶과 자신이 선택한 제2의 고향에 대해 눈을 뜨게 만들었다. “제 아내가 최고라는 걸 배웠죠.” 반 그늑튼 씨는 또한 한국 문화에 대한 사랑을 더 깊이 깨닫는 경험을 했다. 어떤 것도 억지로 꾸며 말하거나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것에 대해 명쾌하게 표현하는 그는 한국 문화의 아름다움은 외부 세계에 판매되고 있는 ‘완벽한 이미지’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인종주의와 차별이 있었어요”라고 그는 솔직하게 얘기했다. “저를 집으로 초대한 아주 친절한 분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여기 내 마을에서 뭐 하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죠. 그러니까 모든 게 조금씩 다 있었어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하지만 그런 불완전함이 저를 매료시켜요.” 문화 차이 자신을 ‘시골 아이’라고 말하는 반 그늑튼 씨는 시골에서 자라서 이방인에게 인사하는 관습에 익숙했는데 한국의 대다수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저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걸 좋아해요. 젊은이들과 그렇게 하는 게 때때로 힘들지만, 나이 든 분들은 종종 시간을 내서 이야기를 나누죠”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네덜란드 사람들은 아주 솔직하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이라도 바로 친구가 되고 관계를 맺게 된다고 한다. 또 자신의 종교, 정치적 소속, 심지어 성생활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 네덜란드와 한국의 문화 차이가 특히나 강하다. “함께 저녁을 먹을 때 어느 순간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고, 대통령에 대해서 혹은 누구를 뽑을 것인지 묻고 싶어요. 네덜란드에서는 이런 이슈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어요. 아마도 격렬할 수는 있겠지만요. 서로 반대 입장이어도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여전히 친구로 남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게 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반면에 그가 네덜란드로 돌아갔을 때는 대화 하는 상대방을 배려하여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는 한국의 예절이 그에게 영향을 미친다. “제가 한국 사람이 된 느낌이에요. 사람들의 감정을 좀 더 배려하게 되었죠. 한국에 살면서 나 자신을 좀 더 인식하게 되었어요. 두 나라의 좋은 점들을 받아들인 것 같아요.” 그런데도 반 그늑튼 씨는 자신이 그저 “네덜란드 사람으로 이곳에 살면서 이 나라에 대해 배우고 있다”라고 말한다. 정말 한국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이 나라의 행복한 이방인이에요. 사람들이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이웃으로 환영하다 작년에 반 그늑튼 씨는 서울 서대문구 가좌동에 있는 전통 시장에 간 적이 있었다. 시장은 특별히 매력이 있거나 깨끗하진 않았지만 그를 끌어당겼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니!’하고 생각했어요. 덜 알려졌지만, 주목할 만한 장소들이 아주 많고 이곳들을 통해 한국에 대해 배울 기회가 많다고 느꼈어요.” 그의 가장 야심적인 유튜브 프로젝트가 뒤따랐다. 서울의 467개 행정 구역인 동에 대한 영상 시리즈가 그것이다. 이미 약 40개 동을 찍었다. “지역들이 모두 자기만의 이야기와 역사가 있어요. 각 지역을 흥미롭게 만드는 이 작은 조각들을 통해 한국에 대해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매력적이에요”라고 그는 말한다. 지금까지 만든 동 콘텐츠 중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뽑아 달라고 하자 반 그늑튼 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포구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곳은 한국에서의 제 고향입니다. 제가 자란 곳 같은 곳이죠. 길들을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잘 알아요. 그래서 고향 같고 그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아요.” 그는 궁극적으로는 전문가나 지역 주민들과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도 하며, 유튜브 시리즈를 보완해 책으로 내기를 바란다. 많은 한국 시청자가 댓글로 반 그늑튼 씨는 외국인이지만 한국에 대해 자신들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를 부인한다. “아마 그렇지 않을 거예요. 저는 그저 계속해서 배우고 있어요. 누군가에게 가르칠 수 있는 교수가 아니에요. 저는 그저 소셜미디어 인류학자라고나 할까요.” 반 그늑튼 씨는 자신의 열정과 배움의 여정을 공유하길 원한다. “저의 목표는 구독자를 모으는 것이었지만, 그건 아주 표면적인 것일 뿐이에요. 왜냐하면 그다음엔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세요?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에게 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지 묻지 않아요. 우리는 그저 시청하고 즐길 뿐이죠. 사람들이 제 채널에서도 그러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Daniel Bright 에디터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가(Photographer)

살기 좋은 마을의 비결

Lifestyle 2024 SPRING

살기 좋은 마을의 비결 경상북도 예천(醴泉)은 산악 오지인 동시에 낙동강이 휘돌아나가는 물의 고장이다. 또 조선시대 사회의 난리를 피해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거주 환경이 좋은 10여 곳의 피난처를 꼽은 ‘십승지지(十勝之地)’ 마을도 있다. 자연환경에서 비롯되는 풍요로움과 공동체 결속을 위한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예천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이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 한국관광공사 예천의 지리적 특징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가볼 곳이 있다. 회룡포(回龍浦) 전망대이다. 장안사(長安寺)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언덕길을 10분 정도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강인 낙동강(洛東江)의 지류, 내성천(乃城川)을 조망할 수 있다. 동쪽에서 흘러온 물길이 180도 휘어지더니 다시 180도를 돌아 나가는데, 유장하게 흘러가는 그 모습이 마치 비상하는 용의 몸짓을 닮았다. 회룡포라는 이름을 얻은 까닭이다. 강들이 만나는 물류망의 핵심   회룡포에서 직선거리로 2킬로미터 남짓한 곳에 삼강주막(三江酒幕)이 있다. 세 개의 물길, 즉 회룡포를 지나 흘러온 내성천과 북서쪽에서 내려온 금천(錦川), 그리고 동쪽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주막이다. 지금이야 고속도로와 철도, 항공로가 주요한 물류 루트지만, 지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물류는 주로 물길로 이어졌다. 수레나 등짐보다 평평한 나룻배나 뗏목을 이용하면 그 어떤 교통수단보다 많고 무거운 물량을 상대적으로 쉽게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룻배나 뗏목이 못 갈 정도로 얕다면 그때부터는 완만한 하천 주변 길을 이용하면 되었다. 실제로 한반도에서 역사가 깊은 도시들의 이름은 ‘주(州)’ 자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巛 또는 川)과 그 사이의 하중도(河中島)를 본뜬 상형자로서, 이후에는 마을을 거쳐 도시를 상징하는 어휘로 확장되었다. 여러 나라들이 그러했듯 한반도 역시 옛 도시들은 거의 모두 하천을 끼고 탄생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 예천도 마찬가지였다. 삼강주막이 그 상징이다. 지난 1900년까지만 하더라도 나룻배들이 하루에 서른 번 넘게 왕래했던 발 디딜 틈 없이 바쁜 물류의 중심이자 휴게소, 그리고 식당과 숙소였다. 다만 1934년 대홍수로 근방의 건물들이 모두 사라졌고, 지금은 삼강주막과 그 옆에 있는 수령 500여 년의 회나무 한 그루만이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다행히 그 시절 나그네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을 배추전과 막걸리를 옛 삼강주막 바로 옆에 새로 지은 주막에서 맛볼 수 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삼강주막. 과거 삼강나루를 왕래하는 사람들과 보부상, 사공에게 식사를 해주거나 숙식을 제공하던 건물이다. ⓒ 예천군 예천의 대표 축제로 자리잡은 삼강주막 나루터 축제에서 전통놀이를 즐기고 있는 모습 ⓒ 예천군   살기 좋은 마을 한국인의 전통적 이상향을 담아 살기 좋은 곳으로 꼽은 십승지지(十勝之地)는 대개 골 깊은 내륙 오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옥토가 펼쳐져 있고 물류망도 잘 갖춰져 있어 예부터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경상북도 예천에도 십승지지 중 한 마을이 있다. 삼강주막에서 자동차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금당실(金塘室)마을이 십승지지 중 한 곳이다. 마을 안팎에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산재해 있을 만큼 이미 오래전부터 거주지로서 주목을 받아온 금당실마을은 현재 수십 채의 고풍스러운 한옥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한옥들은 약 7킬로미터에 달하는 돌담길로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유유히 마을을 걷다 보면 이내 왜 이곳이 십승지지 중 한 곳으로 일컬어지는지 알 수 있다. 북쪽은 높은 소백산맥(小白山脈)으로 막혀 있고, 마을 주변에는 논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또한 물류의 이점을 활용할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면서도, 주요 도시 간의 이동로에서는 빗겨나 있어 군사상의 중요성은 작아 보이는 위치다. 순탄하고 풍요롭게 살아가기에 더없이 훌륭한 지리적 장점을 갖고 있다. 마을 북서쪽 끝에 있는 송림(松林)에서는 안전한 마을을 만들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도 엿볼 수 있다. 이 송림에는 900여 그루의 소나무가 800미터에 걸쳐 자라고 있다. 마을 앞을 흘러가는 금당천(金塘川)이 종종 범람하자, 주민들이 수해(水害) 방지를 위해 힘을 합쳐 조림한 숲이다. 수령이 100~200년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그 오랜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풍광도 뛰어나고 역사성도 있어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그리고 요즈음 같은 봄에는 송림도 송림이지만, 송림 근처 용문사(龍門寺)까지 7킬로미터 남짓한 구간을 수놓는 벚꽃길도 일품이다. 금당실마을에 들를 예정이라면 시간을 충분히 잡아야 하는 이유다. 한옥에서 숙박하며 송림 산책을 하고, 이어 벚꽃길도 걸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주민들이 이 마을에서 그저 안빈낙도(安貧樂道)에 안주하고 있지만은 않았다는 점이다. 송림의 경우에서처럼 범람과 같은 자연의 도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아가 십승지지 특유의 풍요로움을 바탕으로 문화도 발전시켜 왔다. 그 예를 살펴보기 위해 벚꽃길 중간쯤에 있는 초간정(草澗亭)으로 가보자. 조선시대 전통가옥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금당실마을. 청동기 시대 고인돌과 고택 각종 문화재가 산재해 있으며, 미로 같이 이어진 돌담길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송림도 마을의 볼거리다. ⓒ 예천군 풍요를 바탕으로 꽃피운 문화 초간정은 16세기 조선의 문신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 1534~ 1591)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심신 수양을 위해 세운 정자이다. 계곡 한쪽의 수직 암반 위에 지어 올렸는데, 그 모습이 원래부터 그곳에 있던 것처럼 모나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일교차가 큰 봄에 물안개까지 피어오르면 신비로움이 배가 되는데, 이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사는 십승지지를 넘어 마치 신선이 노니는 상상 속 이상향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초간정이 겉모습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이곳은 권문해가 한반도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일컬어지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편찬한 서재이기도 하다. 이 사전은 고대부터 15세기까지 한반도의 역사와 지리, 인물, 동식물, 설화 등을 총망라한 것으로, 모두 20권(卷) 20책(冊)으로 이뤄져 있다. 옛 책을 헤아릴 때 쓰는 단위 중 ‘권’은 내용 분류에 따른 장(章, chapter)의 개념이고, ‘책’은 오늘날 쓰는 낱개 수량을 뜻한다. 즉 『대동운부군옥』은 20가지의 주제를 20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말이다. 권문해의 아들 권별(權虌 1589~1671)이 『대동운부군옥』에서 벼슬을 지낸 이들의 이야기만을 선별해 만든 인물사전식 문헌설화집인 『해동잡록(海東雜錄)』을 저술한 곳도 초간정이었다. 19세기 중반에는 배상현(裴象鉉 1814~1884)이 형법과 논밭과 관련한 여러 제도와 지리 등을 정리한 『동국십지(東國十志)』를, 박주종(朴周鍾 1813~1887)은 조선의 전통문화를 14개의 유형으로 나누어 정리한 『동국통지(東國通志)』 등을 잇달아 편찬했다. 그런 면에서 예천은 백과사전의 보고(寶庫)와도 같다. 예천의 사대부들은 풍요로움을 향유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것을 바탕으로 지식과 노하우를 타인, 나아가 후세대에 전수하기 위해 애썼고, 실제 이루어냈다. 인공적으로 만든 원림과 조화를 이루며 조선시대 정자 문화를 잘 보여주는 초간정(草澗亭)의 모습. ⓒ 예천군 공동체의 결속을 위한 지혜 공동체의 안녕과 결속을 위한 절묘한 지혜들도 놀랍다. 예천에는 무려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나무가 두 그루나 있다. 퍼진 가지의 너비가 동서 23미터, 남북 30미터에 달하는 ‘석송령(石松靈)’이라는 거대한 소나무와 그에 준하는 ‘황목근(黃木根)’이라는 팽나무다. 수령 600년이 넘는 석송령이 한국 최초의 재산을 소유한 나무가 된 연유는 이렇다. 이수목(李秀睦)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에겐 자식이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1927년 본인의 토지 6,600㎡를 이 소나무에 상속 등기한 뒤, ‘영험한 소나무’라는 뜻에서 석송령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자식이 없어도 그렇지, 토지를 일가친척이나 친한 이웃 등에게 상속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비밀의 실마리는 나무가 소유한 토지를 임대해 사용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가 꼬박꼬박 임대료를 내고 있으며, 그 임대료로 마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이수목은 특정 개인에게 상속함으로써 마을에 분란의 소지를 만드는 것보다는 이웃들이 나무와 토지를 공동으로 관리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으로는 공공의 번영을 위해 쓰이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뜻이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주민들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석송령을 보살피느라 여념이 없다. 행여 아래로 쳐진 석송령의 가지가 부러지지 않게 돌로 가지를 받치고, 겨울이면 가지에 눈이 무겁게 쌓이기 전에 쓸어낸다. 벼락이라도 맞을까 봐 피뢰침도 설치해 두었다. 그동안 석송령의 장학금으로 학업을 마친 학생이 수십 명에 달하기 때문이며, 지금도 혜택을 받는 청소년들이 있어서이다. 석송령에서 자동차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황목근도 비슷한 경우다. 매년 5월이면 나무 전체에서 노란 꽃을 피워 황목근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팽나무는 보유 토지의 면적이 석송령의 두 배가 넘는 13,620㎡나 된다. 다만 특정 개인에 의한 상속의 결과는 아니다. 마을의 공동재산이던 토지를 1939년 황목근 앞으로 이전등기(移轉登記)하면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당연히 황목근 소유의 토지에서도 임대료가 발생하는데, 마을의 중학생들에게 매년 30만 원 정도씩 장학금으로 전달된다고 한다. 사실 황목근이 있는 금원(琴原) 마을에서는 이미 100여 년 전부터 각 가정마다 밥을 짓기 전에 쌀을 한 수저씩 떠 모아 공동 재산을 형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1903년의 ‘금원계안(琴原契案) 회의록’과 1925년의 ‘저축구조계안(貯蓄救助契案) 임원록’ 등이 그것이다. 마을 공동체 구성원 가운데 누구에게라도 어려운 일이 닥칠 때를 대비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주는 나무인 석송령. 나무의 키에 비해 가지의 길이가 무려 세 배에 달하는 기이한 모습이다. 옆으로 길게 뻗은 가지를 지탱하기 위해 돌기둥을 받쳐두었다. ⓒ 권기봉(權奇鳯) 진정한 십승지지의 요건 공동체의 결속과 평화를 위해 서로를 배려하는 지혜는 예천의 남쪽에서 절정에 달한다. 거기에 ‘말무덤(言塚)’이라는 것이 있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언덕 같아 보이지만, 인공적으로 바위와 흙을 돋워 마치 거대한 무덤처럼 만든 구조물이다. 오랜 옛날 주민들 사이에 크고 작은 다툼이 그치지 않자, 말(言)을 묻어 버리자며 무덤(塚)을 만든 것이다. 본디 모든 싸움의 씨앗은 말이기 때문이다. 고즈넉하면서도 들이 넓고 물류망이 잘 갖춰져 있어 예부터 십승지지로 이름 높았던 금당실마을과 예천의 곳곳…. 그러나 십승지지는 자연과 지리적 요건이 갖춰졌다고 해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공감,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관심과 배려가 있을 때라야 비로소 십승지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경북 예천을 여행하다 보면 비록 정답은 아닐지언정 그와 관련한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마을 주민들 간 싸움이 잦자 싸움의 시작이 되는 말(言)을 묻자는 것에서 시작된 말(言)무덤. 이곳에는 무덤과 함께 말조심을 표현하는 각종 문구가 돌에 새겨져 있다. ⓒ 신중식(申中植) ⓒ KOREA TOURISM ORGANIZATION ⓒ KOREA TOURISM ORGANIZATION ⓒ KOREA TOURISM ORGANIZATION ⓒ YecheonCountry 권기봉(KWON Ki-bong 權奇鳯) 작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문구 취향의 발견

Lifestyle 2023 WINTER

문구 취향의 발견 인간 문명의 역사 속에서 문구는 빼놓을 수 없는 도구다. 안료를 쓴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 무중력 상태 우주에서 기록 수단인 된 우주 볼펜…. 특히 한국은 예부터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쓰는 문구를 ‘문방사우(文房四友)’라 하여 친구로 표현하기도 했다. 역사를 거듭하며 발달해 온 문구는 오늘날 ‘취향의 도구’로 자리하고 있다. ⓒ 게티이미지코리아 연필은 누군가에겐 창작의 연료였고, 누군가에겐 추억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역사 속에서 연필을 비롯한 ‘문구’는 수많은 발명품 옆에 항상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종이와 펜 대신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찾는다. 메모장 애플리케이션을 켜서 기록하고, 사진을 찍거나, 녹음하기도 한다. 그림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 태블릿PC나 패드로 스케치는 물론 다양한 색과 질감으로 색칠까지 가능하니 훨씬 간편해졌다. 그렇다면 종이와 펜을 비롯한 문구는 미래에 사라질 것인가? 그 답은 ‘아니오’라 확신할 수 있다. ‘디깅(Digging)’ 트렌드와 결합된 문구 문구 마니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건 어쩌면 당연한 흐름이다. 모두가 똑같이 스마트폰을 들고, 키보드 자판을 치고 있는 천편일률(千篇一律)적인 디지털 사회에서 문구는 개인의 ‘취향의 도구’가 되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제품별로 다양한 탄생 일화가 있고, 사용자의 수많은 취향을 맞추기에 이만큼 풍성한 아이템이 있을까. 연필만 하더라도 주로 사용하는 손(오른손잡이, 왼손잡이), 무게, 색, 나무 종류, 촉감, 흑심 진하기 등 각종 조건에 따라 선택지는 무궁무진하다. 유통업계는 이렇게 자신에게 맞는 취향에 집중하고 파고드는 행위를 ‘디깅(Digging)’이란 단어로 표현한다. 한 해 소비 트렌드를 분석하는 도서< 트렌드 코리아 2023 > 에는 ‘디깅 모멘텀(Digging Momentum)’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이는 자신이 좋아하고 선호하는 분야에 더 깊게 파고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국내 최대 만년필 동호회 펜후드(PENHOOD)는 디깅 트렌드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만년필, 필기구, 손 글씨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이곳은 약 4만 6,000명에 달하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펜후드가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오프라인 행사인 펜쇼에서는 몇십 개의 부스에서 다양한 만년필 컬렉션을 선보인다. 다양한 아이템으로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표현하기 좋은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는 누구나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취미 활동으로 손꼽힌다. ⓒ 모나미 국내 대표 문구 브랜드인 모나미는 서울 성수동에 오프라인 매장인 모나미 팩토리를 오픈했다. 이곳에서는 물건 구매뿐만 아니라, 모나미의 역사와 제품 소개, 체험 등을 통해 브랜드 경험을 제공한다. ⓒ 모나미   팬데믹과 함께 커진 ‘다이어리 꾸미기’ 문구 시장 특히 최근의 문구 취향은 더욱 다양해지고 세분되고 있다. 이는 지난 2~3년 동안 이어진 팬데믹 기간의 트렌드 변화다. 사람들은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아날로그 활동에 대한 갈증을 풀기 위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취미 활동을 찾아갔다. 그 중에서도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는 특별한 기술이나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취미 활동으로 꼽힌다. 특히 다꾸는 큰돈이 드는 취미가 아니다. 500~3,000원 사이면 새로운 문구 아이템을 구매하기에 충분하다 보니 진입장벽 또한 낮다. 다양한 아이템으로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표현하는 데 익숙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다꾸 문화가 확산하면서 온〮오프라라인 매장에서 문구 아이템 역시 매출 효자 품목이 되었다. 그리고 스마트폰에 익숙한 세대에게 ‘다꾸’는 색다른 레트로 문화이기도 했다. 빈 노트에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손 글씨를 쓰며, 스티커와 각종 패턴이 인쇄된 마스킹 테이프, 종이 등을 붙이는 다이어리 꾸미기는 킬링타임용으로도 제격이었다.   문구 마니아들을 위한 이곳 작은연필가게 흑심은 추억의 도구로 전락한 연필의 가치에 대해 알리는 공간이다. 단종된 제품부터 컬렉션 제품까지 다양하고 아름다운 연필을 큐레이션하고 있다. ⓒ 이승연(李承姸) 동네 문방구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지난 7월 15일 방영된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 > 에서는 폐업을 앞둔 문방구의 정리를 돕고자, 일일 영업 사원으로 변신한 출연진들의 모습을 비춘 적 있다. 이는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동네의 오래된 문방구, 문구점 수는 점차 줄어가고, 이 자리를 생활용품점, 무인 문구점 등이 대체하고 있다. 사람들의 아쉬움 때문일까. 역으로 사람 냄새, 추억을 담은 문구 공간들은 주목받고 있다. ‘문구’라는 상품에 더욱 집중한 공간들로, 서울의 성수동, 홍대 입구, 종로구, 이태원 등 소위 핫플레이스에 위치해 눈길을 끈다. 국내 문구 기업 모나미(monami)의 오프라인 공간 ‘모나미 스토어’ 역시 젊은 세대들이 꼽는 핫플레이스다. 지난해 성수동에 오픈한 모나미 스토어 성수점은 1963년 출시된 국내 최초의 볼펜인 모나미 153이 만들어진 성수동 공장을 모티브로 하여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간이다. ‘모나미 팩토리(Monami Factory)’를 주제로 한 이곳에선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는 스토어뿐만이 아니라, 모나미의 역사와 제품을 통해 새로운 브랜드 경험을 제공한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체험형 특화 공간에서 내가 원하는 펜을 DIY 해서 만들어 볼 수 있다는 것. ‘DIY 153 시리즈’ 볼펜 만들기, 프러스펜 만들기부터 잉크 랩(Ink LAB) 공간에서는 다양한 색상의 잉크를 조합해 나만의 만년필 잉크 DIY 체험 등이 가능하다. 이 밖에도 다양한 수요를 가진 고객들을 겨냥한 문구 상품들이 즐비하다. 연남동 골목에 있는 ‘작은연필가게 흑심(Black Heart)’은 문구 마니아들에게 입소문 난 공간이다. 흑심은 오래된 연필과 그에 담긴 이야기를 수집하는 공간이다. 주인의 취향과 기준으로 직접 수집한 연필과 그에 관련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곳은 젊은 세대들뿐만 아니라 40~50대 손님들도 심심치 않게 만나볼 수 있다. 단종된 브랜드 또는 과거 디자인의 연필들도 있어 이용객들 역시 흥미로워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듯한 모양새다. 그 밖에도 성수동의 ‘포인트 오브 뷰 서울’, 홍대 ‘호미화방’, 종로 ‘파피어프로스트’ 등은 문구 마니아들이 좋아할만한 창작을 위한 도구를 판매한다.문구 탐험과 여행을 겸하고 싶은 문구 여행자들이라면, 강원도 동해시에 있는 연필뮤지엄(pencil museum)으로 향하는 것도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영국의 ‘더웬트 연필박물관’을 벤치마킹한 이곳은, 연필뮤지엄 대표가 30여 년간 100여 개 국가를 다니며 수집한 나라별 다양한 테마의 연필 3,000여 점을 전시한다. 각종 세계적인 브랜드의 연필과 함께 ‘흑연이 연필로 탄생하기까지의 제작 과정’, ‘역사에 남은 연필의 기록’ 등 연필 관련 역사와 오브제를 한눈에 살펴보기 충분하다.   문구, 스토리를 담다 문구는 없어지지 않겠지만, 해당 시장은 여전히 어렵다. 세대가 어려질수록 문구 소비 행태가 줄어든 것은 물론, 저가상품이 많아지며 경쟁이 심화됐기 때문이다. 시장엔 변화가 필요했다. 마치 전기·전구가 확산하면서 양초의 쓰임이 변화한 것처럼, 문구의 용도를 확대하고 디테일한 변화로 차별성을 주기 시작했다. 모나미는 자사의 상품에 스토리를 입히며 주목받았다. 지난해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가 에디션 제품 ‘153 ID 8.15’를 출시해 한국 광복군을 알리기도 하고 최근엔 탄생화, 탄생석, 별자리 3가지 의미를 담은 펜 등을 출시하기도 했다. 또한 일회용 폐플라스틱, 코코아 껍질 등을 활용해 친환경 제품을 출시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제품을 업사이클 굿즈로 제작하는 등 지속가능성 측면까지 고려하고 있다. 이처럼 문구는 변화를 거듭해 가며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역할,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채 소비자들의 오랜 ‘친구’로서 남아 있을 것이다.   이승연(Lee Seung-yeon) 매일경제 주간국 시티라이프

맨손으로 고치는 만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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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으로 고치는 만년필 손으로 글씨를 쓸 일이 도통 없는 이 시대에, 여러모로 불편한 만년필을 사랑하는 이들이 아직도 있다. 만년필 한 자루가 그들에겐 작은 행복이고 사치다. 만약 아끼는 만년필이 고장 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의 금이 간 행복을 고쳐줄, 만년필 수리를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여기 있다. 손으로 글씨 쓸 일이 별로 없는 요즘 시대에 만년필을 수리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김덕래(金德來) 씨. 그는 이 일이 단순히 펜을 수리하는 것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잇는 일이라고 말한다. ‘만년필의 미덕, 만년필의 고집을 절반이라도 지닌 사람은 우리 중에 없다’라고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말했다. ‘잉크가 샘물처럼 솟아난다’는 의미의 파운틴 펜을 우리나라에서는 만년필이라고 부른다. ‘천년만년’, 즉 영원히 사용할 수 있는 펜이라는 뜻이다. 물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만년필도 예외는 아니다. 펜촉은 마모되고 자칫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고장 난다. 오래 방치하면 잉크가 말라붙어 제 기능을 상실한다. 수리한 만년필로 쓰는 손 편지 그의 아지트이자 작업실은 방에 딸린 작은 드레스룸이다. 이곳에는 수리를 맡긴 고객들의 만년필, 수리 도구와 색색의 잉크, 그리고 고객들이 보내온 편지와 선물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그는 도구 대신 맨손과 손톱으로 만년필을 수리한다. 손끝만큼 예민하고 또 정밀한 도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년필을 구입하기는 쉽지만, 고장이 난 만년필을 수리하는 일은 불편하고 때론 어렵다. 국산 브랜드인 모나미를 제외한 대부분의 만년필은 수입품이다. 국내에서 구입한 수입 만년필이 고장 나면 구입처로 접수 가능하지만, 병행수입 제품을 구입했거나 해외에서 구입한 경우 등은 사실상 수리를 맡길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구입한 제품이라도 손상의 정도가 심각하면 애지중지 아껴온 펜일지라도 수리불가판정을 받을 수도 있다. 또 부모님의 유품이거나 오래된 빈티지 만년필 등이 손상된 경우는 더더욱 맡길 곳이 없다. 이 때문에 만년필 사용자들에게 김덕래(金德來) 씨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만년필 수리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이가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그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아니라 중학생과 고등학생인 두 아이를 둔 1974년생 아버지이다. 경기도 김포시의 아파트, 그 안에서도 방에 딸린 한 평 남짓한 드레스룸이 그의 작업실이다. 갖가지 만년필들과 색색의 잉크병들, 벽에 붙은 메모지들, 작업대와 컴퓨터, 앙증맞은 냉장고 등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한쪽 벽에 있는 창문으로 손바닥만 한 햇빛이 들어온다. 좁지만 아늑한 공간이다. 그의 하루는 아침 일곱 시 무렵 시작된다.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있으니 늦잠 잘 여유는 없다. “아내와 교대로 아이들 아침밥을 차려주거든요. 아이들을 깨워서 간단한 시리얼 등으로 아침을 챙기고 학교 보내고 나면 아홉 시쯤 되요. 그때부터 제 일과가 시작됩니다.” 그의 손에 맡겨지는 만년필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떨어뜨려 펜촉이 완전히 손상된 경우,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필기감이 이전과 달라진 경우, 실제로는 멀쩡한 상태지만 사용하는 사람이 ‘정상 컨디션인지 모르겠다’라고 느끼는 경우이다. 즉 심각, 경미, 정상, 세 가지로 나뉜다. ‘심각’으로 분류된 만년필의 대부분은 펜촉이 망가진 케이스다. 펜촉은 만년필의 심장이자 가장 비싸고 예민한 부품이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휘어진 부분을 펜촉보다 강한 도구로 펴면 되레 더 심하게 꺾이는 경우가 많아요. 수리할 때 손톱으로 조금씩 펴주는 게 저는 가장 좋더라고요” 도구 대신 맨손을 사용하는 이유이다. 손끝만큼 예민한 도구, 손톱만큼 정밀한 도구는 없다. 펜을 분해해서 펜촉을 반듯하게 잡고, 내부를 세척하고, 다시 결합하여 잉크를 주입하면 일이 끝나는 것 같지만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은 그 후부터다. 수리된만년필을 직접 사용하며 테스트해야 한다. “만년필을 반나절 눕혀두었다가 사용해 보고, 그다음 날엔 하루 동안 세워두었다가 사용해 보기도 해요. 뒤집어서 놔두기도 하고요. 어떤 경우에도 잘 쓰여야 하니까요.” ‘심각’의 경우보다 까다로운 것은 ‘경미’의 경우다. 사용하는 사람이 그만큼 예민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작업할 때도 예민해진다. 사용하다 생길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고 반복적으로 테스트하여 완벽한 상태로 만들지 않으면 안심할 수가 없다. 하루 안에 작업이 마무리될 때도 있지만 길게는 열흘쯤 걸리기도 한다. 작업이 끝나면 수리한 만년필로 손 편지를 쓴다. “펜을 다 수리하면 그 펜으로 편지를 써서 함께 보내요. 편지에는 ‘내가 의뢰한 펜이 이런 과정을 겪었구나’라고 이해하실 수 있는 내용들을 적어요. 왜 문제가 생겼는지, 어떤 조치를 했는지, 어떤 테스트를 거쳤는지 알려드리고 앞으로 사용할 때 도움이 될 내용도 적어요. 편지는 만년필이 이제 이렇게 잘 써진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고, 손 편지가 귀한 시대에 펜으로 쓴 편지를 받는 기쁨을 전하기 위함이기도 해요.” 그 시간에 펜 하나 더 수리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이도 있지만 김덕래 씨에게는 의미 있는 과정이다. 물건을 고치는 일이 마음과 마음을 잇는 일로 바뀐다.   새로운 선택 손상 정도에 따라 적절하게 수리하면 작업이 끝난 것 같지만, 본격 작업은 그 이후부터이다. 여러 가지 상황을 염두하고 수없이 테스트를 반복한 후에야 고객에게 보낸다.   강릉이 고향인 김덕래 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삼척산업대학교 토목학과에 입학했다.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 복무 후 복학해 학교를 다니던 중 길에서 우연히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가 굉장히 재미있다며, 너도 한 번 우리 학교에 대해 알아보라던 친구의 말이 이상하리만큼 마음에 남았다. 친구의 권유로 학교를 그만두고 그 해에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전공과 관련 없는 의류매장 운영, 사회복지사, 해외배송업체, 일식조리사, 자동차 정비, 레저용품 생산회사 등을 전전하다가 2012년 수입 필기구 유통회사에 들어갔다. 내세울 경력이 없는 자신에게 마음을 써주는 사장님에게 보답하려고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열심히 일을 익혔다. 고객관리가 주 업무였는데 ‘고객의 만년필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어느 날 들었다. 퇴근 후와 주말에 자신의 만년필을 일부러 고장 내고 고치면서 수리하는 방법을 스스로 익혔다. 고객들의 만년필을 고쳐주면서 만년필 사용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고, 지방의 한 대학교에서 강의해달라는 요청과 교내 웹진에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강의와 연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선택해야 할 시기가 왔어요. 안정된 직장에 다니느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느냐. 아내는 어처구니없어 했지만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죠. 그게 2020년이었어요.”   수입은 줄어도 행복은 는다 고객은 초등학생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다양하다. 직장에서 만난 사람, 연재한 글을 보고 연락한 사람, 고객의 소개를 받은 사람, 인터넷 검색으로 그를 찾아낸 사람들이 의뢰인이다. 전화, 이메일, SNS 등으로 먼저 상담한 후 일이 진행되는 방식을 알려주고 택배로 만년필을 받는다. “직접 해결할 수 있는 경우에는 방법을 알려드려요. 수리가 필요할 경우에는 비용이 얼마 정도 드는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안내한 후 잘 생각해 보시고 보내라고 해요. 여러 변수가 있으니 느긋하게 기다리실 수 있는 분의 의뢰만 받아요.” 적게는 4~5만 원, 많게는 40~5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발생하고 수리 기간은 3개월에서 5개월 정도 걸린다고 미리 설명한다. 한 달에 20~30자루 정도 수리하는데 지금 수리 중이거나 대기 중인 만년필은 40자루 정도이다. “한 달에 20일은 만년필을 수리하는 것에 집중해요. 나머지 10일 중 일주일 정도는 글을 쓰고요. 그리고 2~3일 정도 강릉에 계신 부모님을 만나러 가요. 한 달에 한 번 강릉 가는 것, 2주에 한 번 헌혈하러 가는 것, 그리고 가끔 산책하는 것 외에 외출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주말도 휴일도 없어요. 이 공간이 일터이자 휴식처예요. 창문이 없었다면 밤낮도 몰랐을걸요. 끼니 챙기는 것도 종종 잊어버릴 정도니까요.” 아침 아홉 시에 시작한 작업은 저녁 아홉 시, 열두 시, 때로는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지기도 한다.수리, 테스트, 상담, 작업 과정 기록, 손 편지 쓰기, 고객들과 안부 주고받기 등으로 하루가 빼곡하게 채워진다. “한 달에 열 자루도 못 고칠 때도 있어요. 언젠가부터 속도가 오히려 느려졌어요. 전에는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젠 만족이 안 되니까. 최상의 상태를 만들어 주는 게 저의 도리죠. 좁은 작업실에 있지만 전 세계의 펜을 만질 수 있는 직업이에요. 작업시간을 줄이면 수입이 나아질지 몰라도 저는 덜 행복할 것 같아요. 그리고 누구보다 진심으로 만년필을 대하는 수리공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는 고객들이 있어서 좋아요. 전 이렇게 사는 게 좋아요. 제가 선택한 인생이니까요.” 황경신(Hwang Kyung-shin 黃景信) 작가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 작가(Photographer)

빨리빨리 이면(裏面)의 한국, 무주

Lifestyle 2023 WINTER

빨리빨리 이면(裏面)의 한국, 무주 한국 하면 가장 먼저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는가? 오랜 기간 ‘빨리빨리’가 한국의 주요 이미지였던 적이 있었다. 사실 빨리빨리 문화는 한국전쟁 이후 새로운 도약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내재화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방편이었다. 이 겨울, 당신이 한반도 남쪽의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무주군(茂朱郡)을 여행한다면 단편적인 빨리빨리 이미지 너머에 존재하는 진짜 한국의 숨겨진 단면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한국관광공사 덕유산은 남한에서 내로라하는 명산이다. 특히 겨울이면 눈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상고대를 만드는데, 그 풍경이 장관을 이룬다. ⓒ 이재형(李在烱) 덕유산(德裕山)은 ‘덕(德)이 넉넉하다’는뜻을 품고 있다. 해발고도 1,614미터의 향적봉(香積峯)을 중심으로 장대한 능선이 남북 방향으로 30킬로미터 넘게 이어져 있다. 그 속에는 해발고도 1,300미터 안팎의 봉우리들만이 아니라 20여 개의 크고 작은 폭포, 13개의 이름난 대(臺), 수십 개에 달하는 못(潭)들이 안겨져 있다. 특히 물돌이가 9천 개에 이를 정도로 굽이굽이 흐른다고 하여 구천동(九千洞)이라 부르는 계곡은 경치가 빼어나 사시사철 여행자들을 불러 모은다. 그 중 인상적인 곳을 추려 ‘구천동 33경(景)’이라 한다. 한국 최고의 겨울 산 등산뿐만 아니라 스키장으로도 유명한 덕유산은 곤돌라를 이용하면 정상인 향적봉까지 20분이면 오를 수 있다. 겨울스포츠와 눈꽃 산행을 즐기려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곤돌라 예약은 필수다. ⓒ 한국관광공사   산의 매력은 두 발로 걸어야 제맛이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눈이 낮엔 햇빛에 살짝 녹는 듯하다가 기온이 내려가면 다시 얼어붙는데, 이렇게 녹았다 얼기를 반복하면 나뭇가지 전체가 마치 유리로 코팅한 듯 투명한 얼음으로 둘러싸이게 된다. ‘상고대’라 부르는 자연현상이다. 그런데 덕유산의 상고대는 다른 곳의 상고대와 달리 훨씬 두껍고 투명하다. 고도가 1,000미터 이상인 데다 습도와 풍량까지 알맞기 때문이다. 상고대가 뒤덮은 나무를 밀치며 걸을 때면 가지끼리 서로 맞부딪치며 소리를 내는데, 직접 들어보지 않고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덕유산은 한국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다. 평소 등산이 익숙하지 않아 산행이 힘들다면, 곤돌라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발고도 1,520미터 지점까지 단 20분 만에 오른다. 곤돌라를 타고 상부 승강장에서 내린 후 향적봉까지 가기 위해서는 완만한 계단 600미터만 걸으면 된다. 등산 채비가 되지 않았다면, 승강장 휴게소에서 아이젠과 스패츠, 등산 스틱 등의 겨울 산행용품을 대여할 수 있다. 덕유산을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스키가 있다. 한국 유일의 국립공원 내 스키장이자, 슬로프 면적이 가장 넓은 스키장인 동시에 제일 큰 표고 차를 보이는 스키장이다. 여러모로 압도적이다. 하이킹을 하든 스키를 타든 왜 덕유산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겨울 산이라 불리는지, 어렵지 않게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절경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자연환경도 어느 곳보다 청정한 곳이 덕유산, 나아가 무주다. 예컨대 무주에서는 1997년 이래 코로나19가 유행한 2020년과 2021년을 제외하면 매년 여름마다 무주반딧불축제가 열리고 있다. 반딧불이는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곳에서만 서식하기 때문에 환경지표종으로도 알려져 있다. 덕유산의 북쪽을 휘돌아 흐르는 남대천(南大川) 일대에 특히 반딧불이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무주 일원 반딧불이와 그 먹이 서식지는 1982년부터 천연기념물 322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빼어난 자연환경 반딧불이 탐사와 생태환경 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되는 무주반딧불축제는 청정환경지표인 반딧불이를 소재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삶의 가치를 공유하는 무주군의 대표 축제이다. ⓒ 한국관광공사 한반도에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화된 것은 지난 1960년대부터다. 1963년 재건국민운동본부는 정부에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을 건의했다. 이어 1964년 덕유산 남쪽에 있는 지리산(智異山) 근방 구례군민들이 지리산국립공원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십시일반 기금을 마련하는 등의 자발적 움직임 끝에 지리산은 1967년 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1975년, 덕유산 일대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한국의 10번째 국립공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덕유산 해발고도 1,300미터 지점에는 낯익은 나무가 보인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빼놓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트리로 사용되는 구상나무이다. 야외용 크리스마스트리로는 키가 큰 독일가문비나무나 전나무를 많이 사용하지만, 실내용으로는 아담한 구상나무를 사용한다. 크기도 크기지만, 가지 사이사이에 여백이 있어 장식물을 달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트리용 구상나무는 20세기 초반에 ‘한반도 고유종’으로서의 구상나무를 개량한 것으로, ‘한반도 고유종’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한반도가 원산지다. 그런데 이 친숙한 나무를 언젠가는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2013년 국제자연보전연맹에서 이 나무를 ‘위기종’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한반도 고유종’이라는 말은 한반도에서 사라지면 멸종된다는 뜻과도 같다. 자칫하다간 크리스마스트리의 원형이 멸종돼 지구상에서 영영 자취를 감출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구상나무의 멸종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응책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84년부터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라는 이름으로 산림조성 및 숲가꾸기 사업을 펼쳐오고 있는 (주)유한킴벌리(Yuhan-Kimberly, Ltd.)가 국립백두대간수목원과 함께 2021년부터 구상나무 보존 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실제로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온실에서 6,800여 본의 모종을 키우고 있으며, 그 수를 늘리기 위해 2022년에는 12만 개의 구상나무 씨앗을 수집했다. 덕유산을 비롯해 구상나무가 살기에 적합한 곳을 찾아 이식하기 위해서다. 마치 중요한 데이터를 잃지 않기 위해 백업 작업을 하듯 구상나무를 보존하기 위한 일종의 ‘노아의 방주’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무주 등나무운동장에서 열린 무주산골영화제. 등나무운동장은 등나무 넝쿨이 관중석 지붕에 올라타도록 500여 그루의 등나무를 심어 관중석에 나무 그늘이 만들어지도록 설계된 경기장이다. ⓒ 무주군 백업의 기원 그러고 보면 무주에는 실제 노아의 방주 역할을 해온 공간이 있다. 덕유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적상산(赤裳山)에 위치한 사고(史庫)가 그곳이다. 14세기 말~20세기 초 존재했던 조선왕조는 기록을 무척 소중히 여겼다. 기록을 남김으로써 절대 권력자인 왕의 전횡을 막고, 후대에는 노하우를 전수하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대표적인 기록물로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 있다. 건국 이래 자그마치 472년 동안의 역사를 매일 같이 수록한 책이다.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 중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에 걸쳐 작성된 기록물로 꼽힌다. 심지어 왕조 시절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세계 유일의 사례다. 이러한 점을 높이 사 1973년에는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되었다. 기록 당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전쟁과 화재, 그리고 무수한 천재지변에도 불구하고 잘 보존되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바로 ‘백업’ 덕분이다. 조선은 『조선왕조실록』을 항상 4~5질씩 만들어, 한 질은 수도에 두고 나머지는 여러 지방에 분산해 보관했다. 그냥 보관만 한 것이 아니었다. 3년마다 한 번씩 꺼내 ‘포쇄(曝曬)’라 부르는 작업, 즉 습기 때문에 곰팡이가 슬거나 좀이 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햇볕과 바람에 말리는 일을 반복했다. 절체절명(絕體絕命)의 순간도 있었다. 16세기 말에 벌어진 동아시아 3국 사이의 전쟁 도중이었다. 무주 남서쪽 약 50킬로미터 거리의 전주(全州) 사고에 있던 것을 제외한 모든 『조선왕조실록』이 불에 타 버린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이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그 유일한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백업하는 것이었다. 재차 5질로 복구해 전국에 분산 보관했는데, 그중 한 곳이 적상산 사고였다. 사고 주변이 절벽이다 보니 적군이 침입하기 어려웠고, 완만한 지대에는 이미 1,500여 년 전부터 있었던 적상산성(赤裳山城)을 고쳐 지어 보완했다. 다만 적상산 사고에 보관되어 온 조선왕조실록은 20세기 초에 서울로 옮겨졌는데, 한국전쟁 와중에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럼에도 총 1,893권 888책으로 구성된 방대한 양의 『조선왕조실록』은 오늘, 이 순간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익히 이야기한 백업 덕분이다. 태권도원은 경기, 체험, 수련, 교육, 연구, 교류 등 태권도에 관련된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 유일의 태권도 전문 공간이다. 또 일반인을 대상으로 태권도를 즐길 수 있는 태권스테이도 운영하고 있다. ⓒ 무주군 무주 여행을 해야 하는 까닭 무주는 관광을 넘어 한국 사회가 자연과의 공존을 위해 들이는 노력의 깊이와 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곳이다. 읍내 남쪽에는 ‘등나무운동장’이라는 곳이 있다. 500여 그루의 등나무 넝쿨이 철제 뼈대를 타고 올라가 여름에는 관중석에 그늘을 만들어 주고 겨울에는 내리는 눈을 막아줄 수 있도록 설계한 운동장이다. 한때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건축물을 지향했던 모더니즘 건축이 놓친 것이 있었다. 바로 인간과 자연의 교감이다. 사실 모더니즘 건축은 자연 위에 군림하려는 듯 왕왕 위압적인 모습을 보였고, 자연도 조경(造景)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낸 인공적인 자연이었다. 하지만 이 운동장을 설계한 건축가 정기용(鄭奇鎔, 1945-2011)의 생각은 달랐다. 자연을 인위적으로 변형해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주인처럼 설 수 있도록 자연을 대하는 시각을 바꾼 것이다. 자연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매년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어느 때보다 왕성하게 줄기를 뻗으며 잎이 돋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고, 겨울이 오면 앙상해진다. 건축가는 앙상한 가지조차 인상적인 등나무를 이용해 천연의 스타디움이 완성되도록 유도한 것이다. 관중석 가장 뒷줄에 올라서서 운동장 한 바퀴를 걸어본다면 세계에 단 하나뿐인 무주 등나무운동장의 매력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무주 여행은 한국의 겨울이 어떤 매력을 가졌는지 감탄하는 계기를 마련해줄지 모른다. 또 그 매력의 가장 큰 근원 가운데 하나인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여정이 될 것이다. 동시에 ‘빨리빨리’에 집중하느라 주변을 돌보지 못했을 것 같은 한국 사회가 자연과 어떤 방식으로 교감하고 공존해 왔는지를 발견하는 여행이 될 수 있다. 무주에 겨울이 왔다. 당신도 어서 무주에 와야 할 이유다.         권기봉(KWON Ki-bong 權奇鳯) 작가 이민희(Lee Min-hee 李民熙) 사진작가

삶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나누다

Lifestyle 2023 WINTER

삶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나누다 미국인 메건 문(Megan Moon) 씨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메건 문Megan Moon’을 통해 수십만 명의 구독자에게 한국을 소개하고 많은 이들이 자신의 꿈을 좇아갈 수 있도록 영감을 준다. 쌍둥이의 엄마이자 유튜버인 메건 모어(Megan Moore) 씨는 2012년 한국에 왔다. 다양한 인종이 섞인 미국에서 살다가 한민족으로 구성된 한국의 삶이 매우 흥미로웠다는 그녀는 한국 문화에 매료되어 계속 머물게 되었다. 메건 씨가 거실에 있는 넓은 감청색 소파에 앉아 있다. 거실 창가에는 아침 이슬이 반짝이는 잔디밭이 보인다. 파주에 있는 그녀의 집은 고요하고 편안하다. 그녀가 미국 남부에서 자랄 때의 환경도 이와 비슷했는데, 사슴이 가끔 정원에 들르곤 했었다. 지난 십 년 동안 서울에서 살다가 남편과 작년에 태어난 쌍둥이와 함께 이곳에 정착하는 중이다. 그녀의 남편은 한국의 유명 인사들을 위한 옷을 디자인하는 패턴 도안가이다. 이들의 삶은 메건 씨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유된다. 수십만 명 구독자들은 그들의 일상을 통해 한국 문화와 사회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는 미국 문화의 장점을 잃지 않으면서 한국 문화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데 열중했다. 이제 메건 씨는 문화적으로 자신이 “미국과 한국 그 중간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통 창구인 유튜브 메건 씨는 한국어 소리에 반해 한국어 공부에 푹 빠졌고, 이제는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그녀는 능숙한 한국어 실력이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 이는 그녀의 유튜브 영상의 영역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를 통해 그 나라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법의 구조가 정말로 어떻게 사물을 생각하는지를 결정하는 것 같아요.” 유튜브 채널에 올릴 콘텐츠의 기획과 촬영, 편집 등에는 시간도 많이 투입되고 이 모든 것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조율할 것도 많다. 그래서 전업이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90만 명의 구독자를 달성하여 유료 광고 수입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주로 브이로그 형태로 제작하며, 한국 사람들의 일상과 좋아하는 곳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가 한국이 낯선 이들에게 전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는 음식이다. 한국 음식을 먹는 다는 것은 한국 문화 경험의 깊이를 더하는 일이다. 메건 씨의 경우 처음에는 뜨거운 찌개나 국을 먹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그래서 식을 때까지 10분을 기다린 적도 있다. 이제 그녀는 주저하지 않는다. “그냥 바로 먹어요. 적응되었고, 아주 뜨거운 음식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지난번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식당의 음식들이 모두 너무 차가웠어요. 혼자‘온기가 어디로 간 거야?’라고 생각했죠.” 그녀가 또 한 가지 놀라웠던 것은 한국은 요리할 때 재료의 모든 부분을 사용해 아무것도 버리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에서는 식재료의 어떤 부분들이 그냥 버려지기 일쑤다. 예를 들면 고구마 줄기 같은 것이다. “고구마 줄기는 아주 맛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리고 마늘종도요. 미국에서 운전하고 있을 때였어요. 길가에 쑥이 있었어요. 하지만 미국인은 그걸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것들을 이용해 요리하죠.” 그녀의 유튜브 콘텐츠 중에서도 도전과 개인의 목표, 그리고 가족생활을 보여주는 콘텐츠에 구독자 코멘트가 더 많이 달린다. 그녀는 자신의 콘텐츠가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길을 걷다 외국인이 그녀에게 다가와 자신의 영상을 보고 한국에 왔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들은 ‘한국에 오는 게 꿈이었지만 겁이 났어요’라고 말해요.”라고 메건 씨는 말한다. 그래서 자신의 콘텐츠를 통해 사람들이 사람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고자 한다. “잘 안된 일들도 있어요. 예를 들어 온라인에서 옷을 파는 일 같은 거죠. 하지만 ‘좋아. 그건 나한테 맞지 않는 일이었어. 다른 걸로 해보자!’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죠. 인생은 너무 짧아요. 시도해 보지 않으면 잘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깊은 인상들 그녀는 아이들이 어느 하나에 본인의 역할을 국한하지 않는다. 아내이자 부모, 고양이의 보호자이자 유튜브 운영자, 그리고 자신만을 위한 시간도 꼼꼼히 챙긴다. 메건 씨가 어떻게 한국으로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에 다시 음식 이야기가 언급되었다. “미국에 있을 때 한국 음식점에 간 적이 있어요. 음식도 맛있고 반찬도 무료여서 대학 다니는 동안 자주 갔었죠”라며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한국어를 들었는데 소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레스토랑 직원들이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어요.” 대학을 졸업한 후 메건 씨는 2012년에 영어 강사로 2년간 일하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한국을 이제 ‘고향’이라고 부르는 많은 외국인에게 한국의 첫인상은 완전히 새로운 것의 시작이었다. 메건 씨는 처음으로 단일 인종으로 이루어진 곳에 있게 되었고 그것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한국인들에만 둘러싸여 있는 경험은 완전히 새로웠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는 미국에서 온 저에게는 이상했어요.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그저 한 종류의 사람들만 보는 것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그녀가 적응해야 했던 또 다른 경험은 사람과 쉽게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커뮤니티 특유의 여유로움 덕분에 서로 쉽게 친해지고 지속해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서울은 집중적인 생활 방식과 회사 생활의 비중이 높아 사람들과의 교제가 쉽지 않았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국 체류를 기약 없이 연장하기로 했다. “한국이 고향 같은 느낌을 받아서 계속 머물기로 결심했어요. 한국이라는 나라와 문화가 저랑 잘 맞는 것 같아요.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결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한국 사람들을 정말 좋아해요. 아주 친절하고 사람들을 잘 도와주죠.”   엄마가 되기 딸 루나와 아들 루빈이 태어난 이후 메건 씨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두 아이는 하루 종일 저를 필요로 하죠. 밥하고 청소하는 것이 다가 아니에요. 아이들이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는 데에 제 도움이 필요해요. 주의와 자극도 필요하고요. 또 아이들이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 해요. 작은 일 하나하나를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하죠.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저는 완벽주의자예요. 모든 일을 다 잘하고 싶어 해요. 그래서 그냥 여기 앉아서 만화나 영상 등만 보여주지 않으려고 해요.” 그녀의 주요 목표는 아이들이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도록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도전을 극복하는 데에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 성장 마인드를 갖기 바란다고 말할 수 있죠. 그렇게만 되면 잘 살아갈 거라고 생각해요. 그냥 편의점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고 해도 말이죠.” 유튜브 운영과 부모의 책임을 다하는 와중에 메건 씨는 자신만을 위한 시간도 잊지 않는다. 그 시간엔 주로 운동을 하는데, 이는 그녀가 정서적으로 충전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2021년에 비키니 모델 대회에 나가기 위해 도전한 적이 있다. 이와 관련된 영상을 유튜브 채널에 올렸고, 이것이 KBS 다큐 프로그램에 방영되기도 했다. 혼합된 유산과 정체성 그녀는 아이들이 미국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지며 클 수 있도록 노력한다. “Q&A 내가 흑인이라는 걸 알게 된 한국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제목으로 2013년에 업로드된 영상은 130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 영상에서 메건 씨는 자신이 “흑인이지만 아주 밝은 피부를 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부모 사진을 보여줬다. 그녀의 어머니는 백인, 흑인, 인디언 원주민이 혼합된 사람이고, 아버지는 흑인이다. 그녀가 크면서 흑인이지만 밝은 피부색을 가졌다는 이유로 다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피부색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예를 들면 자신의 개성과 행동 등이다. 그녀는 그녀의 아이들이 이질감을 느낄 수 있는 어떠한 ‘딱지’도 붙지 않기를 원한다. “우리는 그냥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로 살아가려고 해요. 너는 한국인이야. 너는 미국인이야. 너는 두 개의 언어를 할 수 있어. 우리는 크리스마스도 추석 명절도 축하하는 것처럼요.” 성인이 되었을 때 그녀는 다른 환경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저는 매우 추진력이 강하고 목표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도전하기를 좋아하고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그러한 태도가 아버지 덕분이라고 했다. 그녀가 여섯 살 때 치어리더를 하게 되었는데 축구장을 여러 번 도는 훈련을 해야 했다. 한 바퀴가 2.5킬로미터 정도였다. 그녀는 반복적인 그 훈련이 싫었고 그래서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기를 원했다. “아버지는 ‘안 돼, 그만둘 수 없어. 그걸 하면서 뭔가를 배울 수도 있잖아’라고 말했어요.” 그 후 메건 씨의 아버지는 그녀와 함께 매번 달리기를 완주했다. “그 일은 제게 아주 중요했어요.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죠. 아빠가 ‘그만두고 싶어? 그래, 그만둬’라고 말했다면 저는 지금 한국에 있지 않을 거예요. 아마도 삶에 대한 다른 태도와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아요.” 그녀의 다음 도전은 무엇일까?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이 길다고 말한다. 그중 하나는 특히 유별나고,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사실 저는 버스 운전 면허증을 따고 싶어요. 젊은 외국인 여자가 한국에서 버스 운전하는 것, 상상하실 수 있겠어요?” Daniel Bright 에디터 한정현(Han Jung-hyun 韓鼎鉉) 사진가(Photograp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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