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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마을’ 대성동 이야기

  •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21.09.09

‘자유의 마을’이라는 별칭을 지닌 대성동(臺城洞)은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비무장지대(DMZ) 안의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이다. 행정구역 명칭은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 — 그러나 이곳은 지구촌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작은 마을이다. 대한민국 영토이지만 유엔군 사령부의 통제를 받는다. 마을 주민의 참정권이나 교육 받을 권리는 대한민국 법률에 따르지만 병역과 납세 의무는 면제된다. 마을 사람들은 외부로 드나들 때 유엔사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기라도 하면 출입이 더 엄격히 통제된다. 휴전 후 60여 년, ‘섬 아닌 섬’에서 고립되어 살아온 이곳 사람들이 마을 리모델링 사업으로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최고령 주민 박필선(朴必善 82) 씨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옆 마을 기정동에 친형님을 두고도 60년 넘게 만나지 못했다. 박 씨는 “왕래를 못 하니까 큰형님이 기정동에 아직도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알 수가 없다”면서 “늘 지척인 옆 마을에 산다고 생각하고 지낸다”고 말했다.



7월 23일 대성동 마을에서 ‘통일맞이 첫 마을 대성동 프로젝트’ 관계기관 협약식이 열렸다. 주민, 정부, 기업, 민간단체, 국민이 손을 맞잡고 마을 리모델링을 위한 첫걸음을 뗐다. 대성동 마을 주택들은 1970년대 정부가 지어 준 뒤 거의 손을 대지 못한 채 살고 있어 노후화가 심하다.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곳이라 집을 수리하거나 인터넷을 연결하는 등 크고 작은 일에도 허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을의 김동구(金東九 47) 이장은 “마을의 역사를 새로 쓰는 날이다. 주민의 숙원이 이루어지고, 자녀들에게도 더 나은 삶의 환경을 마련해 줄 수 있어 한없이 기쁘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대성동 마을은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을 마무리 짓는 정전협정을 체결할 당시 “남북 비무장지대에 민간인이 거주할 수 있는 마을을 각각 한 곳씩 둔다”는 규정에 따라 그해 8월 3일 북한 쪽 기정동(機井洞) 마을과 함께 생겨났다. ‘평화의 마을’로 불리는 기정동은 대성동 마을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1,800m 떨어진 군사분계선 바로 북쪽에 있다. 두 마을은 분단되기 전 ‘건넛마을’이었다. 기정동 마을은 북한군의 관할 아래 있지만, 유엔군의 통제는 받지 않는 게 대성동 마을과는 다르며 10여 년 전 탄생한 개성공단과는 불과 4㎞거리이다. 대성동 마을회관 옥상에 설치된 망원경으로 보면 북쪽 주민들의 움직이는 모습까지 또렷하게 보인다.

두 마을은 오랫동안 ‘국기 높이 달기’라는 체제 우월 경쟁을 해왔다. 휴전 직후인 1954년 말 기정동 마을에 30미터가 넘는 깃대가 세워졌다. 거기엔 대형 인공기(북한에서는 ‘공화국 국기’라고 부른다)가 걸렸다. 뿐만 아니라 국기 게양식과 하기식 때 국가를 연주하는 확성기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에 뒤질세라 대성동 마을에는 이듬해 그보다 18미터 더 높은 48미터짜리 깃대가 세워졌다. 2년 뒤 기정동에 80미터짜리 깃대가 섰고 그로부터 3년 후 대성동에는 높이 99.8미터의 깃대가 올라갔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국기 게양대다. 다시 4년 후 기정동에는 160미터짜리가 세워졌다. 북측은 이 깃대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자랑한다. 그곳에 게양된 인공기의 크기도 세계 최대인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 후 양쪽 게양대는 더 이상 높아지지 않았다. 김동구 이장은 “우리 측이 높이 경쟁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그만둔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양측 모두 국기 제작비와 관리비만 해도 연간 수천만 원이 든다. 두 개의 국기 게양대는 지금도 마주 보고 서 있다.

62년의 슬픈 역사를 지닌 대성동 주민들은 숱한 애환을 안고 살아간다. 2015년 7월 현재 모두 49가구, 207명인 이곳 주민들은 모두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한다. 대개 한국전쟁 이전부터 살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그 후손들이다. 강릉 김씨 집성촌인 이곳은 1년에 8개월 이상 마을에 거주해야만 주민의 자격이 유지된다. 초등학교 이외의 교육기관이 없기 때문에 마을을 떠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이 기준에서 제외된다. 남성은 외지인과 결혼할 경우 배우자와 함께 계속 거주할 수 있지만, 여성이 외지인과 결혼하면 마을을 떠나야 한다.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전통에 따라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정한 규칙이다. 마을에서 범죄사건이 일어나더라도 한국 경찰이 들어가서 곧바로 체포할 수 없다. 유엔사가 범죄자를 마을에서 추방한 뒤 DMZ 밖에서 체포해야 한다. 마을 거주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DMZ를 관리하는 유엔사 규정과 유엔·주민이 합의한 민사예규에 근거한다.

이 마을에서 생활하는 데는 숱한 제약이 따른다. 매일 밤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 통행이 금지된다. 매일 오후 7시부터 8시 사이에 집집마다 찾아온 군인들에게 인원점검을 받는다. 중무장한 1개 민정중대(civil administration company)가 24시간 마을을 지킨다. 논밭에 일하러 나갈 때도 2~3일 전 미리 유엔사에 보고해야 한다.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영농 활동을 할 때는 군인이 동행한다. 외부인의 마을 출입은 일주일 전에 신청을 한 후 신원 확인을 거쳐야 가능하다.

대중 교통수단은 하루 세 번 들어오는 버스 밖에 없다. 생활용품을 사려면 문산까지 나가야 하기 때문에 가구마다 자동차를 소유하게 됐다. 그것도 생활형편이 나아져서다. 마을이 생기고 나서 처음엔 마을 밖으로 외출할 수 있는 기회가 일주일에 단 한 번뿐이었다. 그래서 유엔군 트럭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에 들어와 생필품을 나눠주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가 1972년 마을버스를 기증해 버스 운행이 일주일에 세 번으로 늘었다. 1970년대 말부터 버스가 매일 한 번씩 다니다가 횟수가 늘어 지금은 하루 세 번 문산터미널까지 왕복한다. 대성동 주민들은 투표일에 모두 함께 마을 밖으로 외출한다. 그래서 대성동 마을 사람들의 투표율은 매번 거의 100%에 이른다. 투표권이 주어진 것도 1967년부터다. 초기 14년간은 참정권이 제한된 채 살아왔다.

교육시설은 유치원과 초등학교뿐이다. 전교생이 30명이지만, 이 가운데 대성동 아이들은 4명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문산·파주·일산 등지에서 다니는 외부 학생들이다. 학생 수가 적어서 1대 1 교육이 이뤄지는 데다 영어특성화학교로 지정돼 있어 해마다 외부 학생 신청자가 많다. 정원을 늘리지 않기 때문에 전학 희망자가 50여 명이나 밀려 있다고 한다. 2014년 11월 초고속 인터넷망을 구축한 대성동초등학교는 도시 학교가 부럽지 않다. 인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소속 미군들이 일주일에 2~3번씩 방문해 영어를 직접 가르치면서 인기가 높아졌다. 졸업생들은 학군 제한을 받지 않고 원하는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

대성동 마을은 정부의 각종 특별지원으로 생활수준이 높은 편에 속한다. 가구당 평균 경작면적이 약 8만 2500㎡이어서 연간 평균소득은 6000만 원에 이른다. 웬만한 도시 중산층보다 높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은 토지 소유권을 가질 수 없고 경작권만 허용된다.

이 마을에 조그마한 일이나 변화가 생겨도 뉴스가 된다. 초등학교 졸업식은 어김없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지난 5월 15일 대성동초등학교 전교생이 정종섭 행정자치부장관의 초청으로 서울 정부종합청사를 방문했을 때 대다수 언론이 이를 보도했다. 2013년 6월 이곳에 처음 상수도가 공급됐을 때도 그랬다. 2012년 인터넷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최신 영화관이 생겼을 때도 화제가 됐다. 1991년 독일 통일 직후 대성동초등학교 학생 7명이 베를린장벽을 견학했을 당시 한국인들에겐 애잔한 뉴스가 됐다.

2013년 8월2일에는 대성동마을 60주년을 맞아 마을회관에서 환갑잔치가 열렸다. 마을 환갑기념 축하 행사에는 경기도지사, 지역구 국회의원, 파주시장, 5개 참전국 대사관 관계자, 마을 민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이곳은 판문점 인근에 자리 잡고 있어서 외국의 주요 인사들이 휴전선 일대를 방문할 때마다 각별한 관심을 갖는 지역이기도 하다. 1993년 3월 통일 위업을 이룩한 헬무트 콜 독일 총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판문점과 대성동 마을을 둘러보고 감회에 젖었다. 2010년 7월 판문점을 방문한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은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와 대성동의 태극기를 가리키며 “지금도 양측이 깃발을 더 높이 달려고 애를 쓰고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곳 주민들은 남북 간 갈등이 높아질 때면 더욱 숨을 죽이고 산다. 2012년 10월에는 탈북자 단체의 대북선전 풍선 날리기를 핑계로 북한이 ‘임진각 군사적 타격’을 위협하는 바람에 마을의 모든 주민이 잠시 벙커 신세를 졌다. 1997년 도토리를 줍던 마을 주민이 북한군에게 끌려갔다가 5일 만에 풀려난 적도 있다. 1975년에도 마을 부근에서 북한군 2명이 농부를 강제로 납치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다는 김경래(金慶來 79) 씨는 “1960년대에 마을 주민 한 사람이 북한군에 의해 사살됐는데 어찌나 끔찍했던지, 그때는 정말 떠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난 최고령 주민 박필선(82) 씨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옆 마을 기정동에 친형님을 두고도 60년 넘게 만나지 못했다. 박 씨는 “왕래를 못 하니까 큰형님이 기정동에 아직도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알 수가 없다”면서 “늘 지척인 옆 마을에 산다고 생각하고 지낸다”고 말했다. 박 씨는 “통일이 돼서 집도 논도 없이 빈손으로 이 마을을 떠나게 된다 하더라도 나의 가장 큰 소망은 통일이다. 살아서 통일되는 것을 꼭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곳 주민들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누구보다 간절하게 기원하고 있다. ‘자유의 마을’이란 별칭 외에 ‘통일맞이 첫 마을’로 명명되는 것도 이런 소원이 담겼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매년 정월 보름이면 기정동 주민 초청 윷놀이대회, 노래자랑대회가 열릴 날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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