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는 일상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초현실적으로 그려내는 소설가이다. 속도감 있게 읽히는 그녀의 소설은 독자들에게 재미와 더불어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작가는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해 최근에는 고통을 없애주는 신약이 개발된 세상을 배경으로 한 네 번째 장편 『고통에 관하여』를 발간했다..
(왼쪽부터) 갈매나무의 장르 문학 전문 브랜드 퍼플레인이 2023년 발간한 신작 소설집 『한밤의 시간표』, 알곤킨 북스(Algonquin Books)가 2022년 펴낸 『저주토끼』 미국판, 지식 콘텐츠 기업 인플루엔셜의 문학 전문 브랜드 래빗홀에서 2023년 출간된 『저주토끼』 개정판, 다산책방에서 2023년 발행된 신작 장편소설 『고통에 관하여』, 2021년 혼포드 스타(Honford Star)가 발간한 『저주토끼』 영국판 표지.
ⓒ 갈매나무
ⓒ Algonquin Books
ⓒ 인플루엔셜
ⓒ 다산책방
ⓒ Honford Star Ltd.
2022년 5월 22일 런던 사우스뱅크센터 퀸엘리자베스홀에서 개최된 부커상 낭독회에 정보라 작가가 『저주토끼』의 번역가 안톤 허와 티셔츠를 맞춰 입고 참석했다.
ⓒ 셔터스톡, 사진 Andrew Fosker
2022년, 정보라의 소설집 『저주토끼(Cursed Bunny)』가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그런가 하면 올해는 미국판이 전미도서상 번역 부문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10편의 작품이 실린 이 소설집은 호러, 판타지, SF 같은 장르적 장치를 통해 일상에서 느끼는 공포와 압박을 오싹하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출간된 지 5년이 지난 이 책은 국내 서점가에서도 뒤늦게 베스트셀러가 되며 큰 화제를 일으켰다.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난 정보라는 연세대학교 졸업 후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러시아동유럽 지역학 석사 과정을 거쳤으며, 인디애나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과 폴란드 문학에 대한 논문을 써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에서 돌아온 이후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여러 편의 장편과 단편집들을 출간했다. 최근에는 대학 강의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활발히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독일 베를린국제문학축제에 초청되어 글로벌 작가들과 토론을 마치고 귀국하던 9월 어느 날, 서울 홍대 입구의 한 카페에서 작가를 만났다.
지난해 『저주토끼』가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라 집중 조명을 받았다. 이후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글로벌 독자들이 SNS를 통해 나에게 직접 감상을 얘기해 주었다. 어느 나라 독자들이나 모두 화장실 가기가 무섭다고 하더라. 수록작 중 하나인 「머리(The Head)」에 변기에서 머리가 나오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는 그다지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다만 소재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다.
당신의 소설에 나타나는 ‘환상성’을 글로벌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하다.
이번 베를린문학축제에서 호러와 마술적 리얼리즘, 두 세션에 참가했다. 둘 다 다른 작가들과 대담하는 세션이었는데, 나는 귀신 이야기를 많이 했다. 12~13세기에 편찬된 우리나라 역사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기이한 사건들과 신묘한 동물들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 사고방식은 비슷한 것 같다. 이런 이야기는 매우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시각이 확장되는 느낌이 든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행사에서도 귀신 얘기를 했는데 다들 열광했다. 그리고 질의응답 시간에 독자들이 아주 적극적이었다. 한국의 상황에 대해 관심도 많고 질문 수준도 높았다.
한국만의 독특한 환상성은 다른 나라와 무엇이 다른가?
소재나 내용이 다를 뿐이지 현실에서 초월적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전 세계가공통적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한국만의 색깔을 찾는다면 단지 배경이 한국이라는 점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글로벌 독자들이 내 소설에 공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외할머니, 그리고 귀신이 나오는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 > (1977~1989)을 보며 성장한 바탕이 작품에 영향을 끼쳤는가?
그렇다.< 전설의 고향 > 은 어딘가에서 기이한 일이 일어나고 귀신도 등장하는 드라마이다. 흥미진진해서 어렸을 때 즐겨 봤다. 올해 봄 출간한 소설 『호(狐)』는 여우에게 홀린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드라마처럼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상상 속 동물 구미호(九尾狐)가 등장하긴 하지만 현대를 배경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행동주의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쓰는 일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도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시위를 막 마쳤을 때 들었다. 나는 머릿속에 주저앉아 상상만 펼치는 삶을 경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편이다. 그리고 문학의 기능 중 하나가 독자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인데, 작가로서 욕심을 내본다면 그들이 내 작품을 읽고 복잡다기한 감정을 최대한 느꼈으면 좋겠다.
환상을 도구로 사용하지만, 사실주의 작가의 속성을 담고 있는 셈인가?
마술적 리얼리즘의 특징 중 하나가 기이한 사건에 대해서 굉장히 현실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거다. 사람에 대해서 쓰면 결국은 현실적인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에게 소설을 쓰는 행위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동안 러시아와 폴란드 작품들을 상당히 많이 번역했다. 번역 일이 소설 쓰는 데 도움이 되는가?
오랫동안 번역 일도 해 왔는데, 소설 쓰는 법을 많이 배웠다. 우선 문장을 한국어로 옮겨야 하니까 문장력 향상에 도움이 됐다. 또 이야기를 전개하거나 새로운 관점,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 같은 중요한 요소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특히 나는 모든 새로운 시도들이 각광받았던 시기의 슬라브 문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글로벌 독자들이 당신의 소설을 어떻게 읽기를 바라는가?
독자가 없으면 작가도 없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독자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작가가 되는 느낌이다. 무한히 감사드린다. 『저주토끼』가 많은 나라들에서 번역됐는데, 원작과의 차이점을 생각하지 말고 번역가를 전적으로 신뢰하면 좋겠다.
앞으로 어떤 작품들을 계획하고 있는가?
유토피아를 계속 추구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떻게 해야 모두가 더 행복한 사회를,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계속 쓸 예정이고, 또 행동할 것이다. 그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귀신 이야기도 계속 쓰려고 한다.
정보라의 2017년 작 『저주토끼』는 번역가 안톤 허의 제안으로 2021년 영국 혼포드 스타에서 영어로 번역, 발간되었으며 이듬해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정보라의 소설들은 대체로 기괴하고 비일상적이지만, 그 이야기들은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작가의 분노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