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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SPRING

한국산 조명 브랜드의 신호탄

2019년 론칭한 조명 브랜드 아고(AGO)는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을 선보이며, 오리지널 디자인의 개념이 희박했던 국내 조명 산업의 타성을 흔들어 깨웠다. 소상공인과 디자이너들이 협업해 얻어낸 값진 성과였다. 그 밑바탕에는 을지로의 독특한 산업 생태계가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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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대림상가 3층에 자리 잡고 있는 아고 쇼룸 전경. 아고는 을지로에서 30년 동안 조명 유통에 종사한 이우복 대표와 스톡홀름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유화성 디자이너가 2019년 파리 메종&오브제를 통해 론칭했다.
스튜디오 플록(Studioflock) 제공, 사진 텍스처 온 텍스처(texture on texture)


서울시는 2013년부터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은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 중 미래 세대에게 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다. 을지로 조명 거리도 그중 하나이다. 을지로 3가와 4가 사이에는 약 200개의 조명 상점들이 밀집해 있는데, 이 중에는 30년이 넘은 오래된 가게들도 많다.

조명은 가구, 공구, 기계, 미싱, 인쇄, 조각, 타일 등과 함께 을지로 특화 산업의 한 부분을 이룬다. 이곳의 조명 산업은 1960년대 활성화되어 1970~80년대에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1990년대 초반에는 수도권 신도시 개발 붐으로 아파트와 다세대 주택 등 건물 신축이 급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조명 설비에 필요한 각종 제품의 수요가 늘면서 활기를 이어갔다. 1990년대 이후에는 인테리어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신의 취향에 따라 집을 꾸미려는 사람들이 을지로 일대로 나와 조명 용품을 구매하곤 했다. 국내 조명 산업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 아고는 이렇게 수십 년간 축적된 을지로의 산업 생태계 속에서 탄생했다.

위기의식

조명 업체 모던 라이팅의 이우복(Woobok Lee, 李雨福) 대표는 을지로에서 30년간 조명 유통에 종사한 베테랑이다. 그리고 스톡홀름에 위치한 디자인 스튜디오 바이마스(ByMars)의 유화성(Mars Hwasung Yoo, 柳和成)은 대범하면서도 꼼꼼한 실행력을 갖춘 디자이너이다. 두 사람은 2017년 ‘By 을지로 프로젝트’를 통해 인연을 맺었다.

“사실 나는 복제품이 버젓이 유통되는 을지로의 현실에 대해 비판하고, 관계자들과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었다. 그게 내가 By 을지로 프로젝트에 지원한 이유였다.”

을지로 조명 산업이 도심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유화성 디자이너의 말처럼 이곳에는 복제품 유통이라는 문제점도 내재해 있었다. 현재 을지로 조명 시장이 예전 같지 않은 데에는 인터넷을 통해 저가의 해외 상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된 이유도 있지만, 소비자들의 미적 기준이 높아지면서 복제품을 외면하게 된 현실도 있다. 위기를 느낀 상인들은 한국조명유통협동조합을 만들고 공동 브랜드 올룩스(ALLUX)를 개발하는 등 서비스와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자체 또한 조명 거리에 대한 자부심을 지키고 재도약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적극 나섰다. 그 출발은 서울 중구청과 서울디자인재단이 2015년부터 공동으로 개최한 < 을지로, 라이트웨이(Euljiro, Light Way) > 였다. 조명 전시와 공연, 을지로 투어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마련해 을지로 조명 산업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행사이다.

2017년, 중구청과 서울디자인재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을지로 조명 업체들과 디자이너들이 팀을 이루어 브랜드 상품을 개발하는 By 을지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당시 참여한 8팀 중 3팀의 제품은 이듬해 유럽 최대 규모의 인테리어 박람회 < 메종&오브제(Maison&Objet) > 에서도 전시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2018년과 2019년에도 이어져 각각 11팀, 10팀이 참가해 좋은 성과를 얻어 냈다.

이우복 대표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엿봤다. 그는 유화성 디자이너에게 을지로 조명 산업을 함께 쇄신해 보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의 의기투합으로 ‘옛 친구’라는 뜻을 담고 있는 단어 ‘아고(雅故)’에서 이름을 따온 조명 브랜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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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서울리빙디자인페어(Seoul Living Design Fair)에서 아고는 앨리(ALLEY), 벌룬(Balloon) 등 기존 라인들의 업그레이드 버전과 신제품을 선보이며 확고한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보여 주었다. 부스는 벽돌, 목재, 금속 등 재사용이 가능한 건축 재료들로 소박하게 꾸몄다.
ⓒ 아고

명료한 디자인

2019년 론칭한 아고는 국내 조명 브랜드로서는 드물게 조명 기기의 조형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등장했다. 과감한 형태와 색감, 유려한 곡선이 돋보이는 아고의 디자인은 국내 조명 시장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아고는 2019년 메종&오브제에서 첫선을 보인 후 2020년 스톡홀름 가구박람회(Stockholm Furniture Fair)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같은 해 서커스(Cirkus) 라인으로 월페이퍼 디자인 어워드 ‘Best Dinner Guests’ 부문에서 수상했다. 해외에서 먼저 디자인과 품질을 인정받은 것이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누른 찹쌀떡을 닮은 전등, 우주 비행선 같은 미래적 형태, 빛의 방향을 자유롭게 조절하는 펜던트 조명 등 아고의 모든 제품들은 조명이 단순히 공간을 밝히는 기능적 역할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디자인을 통해 알려줬다. 여기에는 아고의 아트디렉터를 맡은 유화성 디자이너의 공이 컸다. 그가 아고를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함께 만들어 갈 협업 디자이너들을 찾는 것이었다. 스위스 디자인 스튜디오 빅게임(BIG-GAME), 스웨덴의 요나스 바겔(Jonas Wagell), 독일의 세바스티안 허크너(Sebastian Herkner) 등 여러 나라의 디자이너들이 현재 아고와 함께하고 있다.

아고는 명료한 형태를 지향한다. 이를 기본 원칙으로 삼아 디자이너들과 의견을 나누며 작업을 진행한 끝에 2년 만에 13개의 제품이 완성됐다.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한 종류의 디자인이 생산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을지로의 산업 시스템이 한몫했다. 을지로에서는 빠르게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그것에 대해 디자이너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피드백을 반영해 다시 또 기민하게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할 수 있다. 각자 전문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산업 장인들이 한데 모여 있는 덕분이다. 이들은 때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디자이너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고가 글로벌 브랜드를 지향하는 만큼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을지로의 시스템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각종 소재와 기술을 사용해 여러 번 수정을 거듭해야 하는 조명 디자인의 특성을 고려해 처음부터 국내 생산을 고수한 이우복 대표는 수도권에 위치한 공장들과 협업해 작업에 필요한 부속들을 만들고, 경기도 파주의 공장에서 최종적으로 조립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그 과정에서 유화성 디자이너는 의도한 디자인을 완벽하게 구현하고자 기술자들과 끊임없이 소통했다. 그는 기술 장인들에게 시종일관 디테일을 강조하며 요구 사항을 끈질기게 관철시켰다. 처음에는 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사람들이 디테일이 만들어 낸 결과물을 눈으로 직접 보고 나서야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 그에게 ‘0.1mm’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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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 브랜드 아고는 전문 분야와 기술이 철저히 분업화된 을지로의 산업 시스템을 기반으로, 그동안 을지로 조명 업계에서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디자인을 전면에 내세우며 등장했다. 사진은 스웨덴 디자이너 요나스 바겔(Jonas Wagell)과 협업하여 론칭한 제품 앨리(ALLEY).
ⓒ 아고

 



산업 생태계의 변화

을지로에서 론칭한 조명 브랜드에 대해 처음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많았다. 복제품 유통의 벽을 쉽게 넘어서지 못할 거라는 염려도 있었다. 또한 풀옵션으로 세팅된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국내 소비자들에게 조명 전문 브랜드의 매력을 어필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아고는 한국산 조명 디자인의 우수성을 보여 주며 보란 듯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고의 과감한 디자인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인테리어에 관심이 높은 젊은 세대의 SNS에는 어김없이 아고 제품이 등장했다.

심지어 아고 제품을 모방한 복제품들도 만들어졌다. 이에 대해 유화성 디자이너는 “복제품을 구입하는 사람은 오리지널을 구매할 확률이 낮고, 오리지널을 사는 사람은 복제품에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복제품과 오리지널은 시장 자체가 아예 다르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고가 출시된 이후 을지로에는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익숙했던 관행을 버리고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난 것이다. 아고는 좋은 브랜드가 건강한 산업 생태계를 만든다는 것을 보여 주는 징표가 되었다. 이제 론칭 5년 차가 된 아고는 글로벌 조명 브랜드로 성장하기 위해 업종이 다른 브랜드들과도 협업하며 을지로에서 뿌리를 내려 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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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아고 쇼룸에서 열린 전시 < Optimistic Design > 중 일부. 아고의 프로브(Probe) 컬렉션을 디자인한 스위스 빅게임(BIG-GAME) 스튜디오의 대표 제품들을 볼 수 있었던 전시다. 2004년 설립된 빅게임 스튜디오는 단순하고 기능적이면서도 낙관적인 이미지의 작업물을 주로 선보인다.
ⓒ 아고

 





박은영(Park Eun-young, 朴恩英)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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