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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SPRING

LIFE

길 위에서 지혜의 눈으로 보는 ‘보이지 않는 땅’

서울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여주는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다. 남한강이 가로지르고 있어 예로부터 수운(水運)을 이용한 미곡 집산지였으며, 지금도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은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또한 고려 후기부터 도자기 제조가 시작되어 지금도 국내 도자기 산업의 중심지이다.

경기도 여주 파사성에서 내려다본 한강과 주변 산들이 어우러진 풍경이다. 파사성은 둘레 약 950m, 높이 약 6.5m의 성곽으로 6세기 중엽 이후 신라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강을 따라 진입하는 적을 감시하고 견제하기에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미술사학자 유홍준(You Hong-june 兪弘濬)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한국 인문 도서 최초의 밀리언셀러로 1990년대 초반 전국적인 답사 열풍을 몰고 온 화제작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문화유산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즐길 수 있게 독자의 눈높이로 풀어준 유창한 얘기에 담긴 그의 견해는 적잖은 외국인들에게도 길잡이가 되곤 한다. 그는 이 시리즈 여덟 번째 권에서 외국인이 하루라는 제한된 시간에 한국의 자연과 문화유산을 둘러보고자 하는 경우 추천할 만한 곳으로 두 개의 코스를 꼽았는데, 그중 하나가 여주다.

그는 여주를 꼽은 이유로 “우리나라 절집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신륵사와 “폐사지의 역사적 정취”가 있는 고달사, “엄숙하면서도 품위 있는” 세종과 효종의 두 왕릉, 그리고 “남한강의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CNN도 아시아 정보 사이트인 ‘CNN GO’에서 2012년 ‘한국에서 가 봐야 할 아름다운 50곳’에 여주 신륵사를 포함시켰다.

그런데 이곳을 다녀간 외국인들의 감탄과는 달리 정작 한국인들의 반응은 심드렁하다. 유홍준이 추천한 볼거리와 미학적 설명이 한국인에게는 별다른 호기심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평범하고 익숙하다. 그는 왜 관광 안내서에 소개된 화려한 유적지나 명승지를 제쳐두고 소박하고 평범한 여주를 선택했을까. 이 글은 그의 권유에 혼란스러워 할 독자들에게 먼저 다녀간 한 여행자가 보내는 편지다. 과연 이 편지는 당도할 것인가.

홍천면 계신리 남한강가 바위 절벽에 새겨져 있는 높이 223㎝, 너비 46㎝의 이 마애불 입상은 화려한 옷 주름, 세련된 연꽃 대좌와 광배 등 통일신라(676~935)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한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수운의 안전을 위해 조성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드린다.


높이 약 9.4m의 신륵사 다층전탑은 10세기 무렵 중국으로부터 전래한 새로운 양식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개 사찰의 탑들이 중심 전각인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데 반해 이 전탑은 절의 동남편 바위 언덕 위에 세워져 한강을 굽어보고 있다. 보물 226호이다.

보이지 않는 땅
동양 의학을 처음 접하는 서양인 의사들이 놀라는 점 중 하나가 동양의 인체도에는 근육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근육질의 남성 이미지를 보며 해부학을 공부한 서양인들의 눈에는 평면의 형상 위에 눈에 보이지 않는 혈 자리와 기의 흐름만을 나타낸 이 기이한 인체도가 공상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 두 세계관의 차이를 멕시코 출신의 의사이자 작가인 곤살레스 크루시(Gonzalez Crussi)는 이렇게 정리한다. 서양인들이 근육이라는 의지를 나타내는 자발적인 도구를 통해 복잡한 인체의 체계를 드러내고자 했다면, 동양인들은 비자발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혈관과 심장의 맥박을 통해 육체를 움직이는 힘의 근원을 인식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홍준은 한국의 자연과 문화유산의 ‘근육’이 아닌 그 안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힘’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국인들에게는 ‘풍수지리’라는 땅을 보는 고유의 안목이 있다. 지리는 서양과 같은 개념이지만, 풍수는 설명하기가 좀 까다롭다. 풍수를 이해하려면 먼저 ‘기’라는 개념을 알아야 하는데, 서양에는 이를 대체할 만한 마땅한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기란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형태가 있는 모든 물질의 근원으로 정의하지만, 때론 다양한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모호하고 포괄적인 개념으로도 사용한다. 이를테면 땅속에는 살아 있는 기가 있고, 이 기에 힘입어 만물이 생겨난다는 것이 동양 사상의 오랜 뿌리다. 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보이지 않는 지기(地氣)를 살피는 것이 바로 동아시아의 전통적 지혜인 풍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땅(terra invisibilis)’이란 바다와 숲, 산 같은 ‘보이는 땅’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시간과 경계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

번성했던 강 마을
여주는 서울과 닮았다. 두 곳 모두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앙을 동서로 가르는 한강이라는 물길이 관통하며 주변 산들과 적당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강의 뱃길을 통하면 서울에서 여주까지는 하룻길이다. 최고의 풍미를 자랑하는 여주 쌀과 서해를 통해 들어온 소금과 젓갈은 물론 싱싱한 해산물까지 당일 배송으로 주고받을 수 있었던 꽤 오래된 일일 생활권이었다.

여주가 살기 좋은 곳으로 입소문에 오른 것은 왕권을 강화한 고려(918~1392)가 내륙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이나 특산물을 한강을 통해 배로 실어 나르기 시작하면서다. 여주가 장삿배와 세곡선의 중간 기착지가 되면서 눈 밝은 선비와 관리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조선(1392~1910)이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뒤로는 세도가의 고장으로 거듭났다. 그 시절에 도성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당일 입궐’이 가능한 지역이란 점은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조선 왕조의 왕비들 중 20%가 넘는 사람들이 여주 출신이란 점, 또한 수도권에서 건물이나 석탑 같은 국보와 보물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고장이란 점이 그 증거다.

강을 이용한 물류는 빠르고 편한 반면에 사고가 나면 재산은 물론이고 사람의 목숨까지 잃는 위험을 항상 안고 있다. 수운의 안전을 위한 풍습 중 하나가 부처님께 정성으로 기원하는 것이었다. 강가의 암벽에 새겨진 마애석불은 한반도에서는 유일하게 두 곳이 있는데 모두 한강변에 있다. 하나는 중부 지방인 충주 창동리의 옛 금천나루 옆에 있고, 또 하나는 여주 이포나루 바로 윗자리인 계신리 ‘부처울 습지’에 있다. 암석의 재질이나 상태는 물론 그 규모나 모양이 달라도 둘 다 통일신라(676~ 935)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시대의 작품이다. 지금은 댐이 들어선 탓에 수량이 늘어 물가에서 그리 높지 않지만, 그 시절에는 암벽에 새겨진 불상을 강 위의 배에서 올려다보며 무사안위를 빌었을 것이다.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 때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신륵사는 한국 전통 절집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곳으로 석등, 다층석탑, 극락보전 등 국가 지정 보물을 포함한 다수의 유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CNN이 ‘한국에서 가 봐야 할 아름다운 50곳’에 포함시키기도 한 이 절은 대부분의 사찰과 달리 강가에 위치해 있다.

신륵사 전탑과 고려청자
한국의 불교 사찰이 대개 산에 자리하고 있는 것과 달리 여주 신륵사는 드물게도 강과 관계가 깊다. 한강을 굽어보는 암석 위에 벽돌로 쌓은 전탑(塼塔)은 신륵사에 남은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지금은 가람의 중심을 법당에 두지만 초기에는 탑이 그 중심이자 전부였다.

한강은 한반도 남쪽에서는 가장 많은 수량을 가진 데다 강폭이 좁고 강수량도 여름철에 집중되다 보니 수해가 잦았다. 여주의 전탑이 한강을 굽어보는 강가에 들어선 것은 수해로부터 벗어나길 바라는 염원에서다. 특히 전탑이 서 있는 절벽 아래는 강물이 휘돌아나가는 곳이라 물살이 거세 배들이 전복되는 사고가 잦았다. 따라서 절벽 위에 높이 전탑을 세운 것은 강을 오가는 배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동시에 이 가파른 땅의 나쁜 기운을 제압하는 풍수지리의 비보(裨補)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비보란 약하거나 모자란 것을 도와서 보태거나 채운다는 뜻이다. 산과 바위가 근육이라면, 강은 땅의 핏줄이니 이 전탑을 세워 땅의 나쁜 기를 누름으로써 피를 순하고 맑게 정화하는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여느 절들의 탑들과 달리 한강을 굽어보는 암반 위에 탑을 세운 것도 바로 그 풍수지리의 영향이다. 지금은 그 처음의 의미를 잃고 강월헌(江月軒)이라는 정자에 가려 있다.

전탑은 한국에서 보기 드문 양식이다. 중국과 달리 벽돌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많은 승려들을 당에 보내 새로운 불교의 경향을 배우도록 독려하는 등 당의 제도와 문물을 크게 받아들였는데, 이 전탑은 그 교류의 유산으로 보인다. 신륵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중암리 고려 백자 가마터는 10세기 후반에 조성된 중국식 벽돌 가마로 그 운영 시기가 전탑의 건립 시기와 겹친다. 서해를 건너온 중국인 도공들이 전탑의 제작을 주도하고 이를 고려의 도공들이 돕는 그림이 그려진다. 전탑 벽돌에 새겨진 당초문이 바로 그 흔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중국에서 들여온 벽돌 가마가 『고려도경』(1123)을 쓴 송나라 서긍(徐兢)이 감탄한 고려의 비색 청자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주로 경기도 일대에 퍼진 중국의 벽돌 가마는 고려의 도공들에 의해 점토를 사용한 한국식 흙 가마로 서서히 바뀌면서 한 번에 고온으로 굽는 중국의 방식과 달리 초벌과 재벌로 나누어 굽는 기술이 널리 퍼졌다. 이런 기술적 진화로 한반도 어디서나 구하기 쉬운 흙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고려 청자가 절정기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도자기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지금도 여주에는 약 400개의 도자기 업체가 운영되고 있다.

면적이 약 6만㎡에 달하는 고달사 폐사지는 8세기 후반 창건되어 여러 세기에 걸쳐 번창했던 절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이곳에는 아름다운 2기의 승탑을 비롯해 훌륭한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고달사지부도는 높이 4.3m의 고려 시대 승탑으로 고달사지 뒤편 낮은 산 능선에 자리 잡고 있다. 국보 제4호로 지정된 이 승탑은 정제된 조형과 세련된 조각 수법이 돋보이는데, 특히 중대에 조각된 용과 거북의 형상이 매우 입체적이다.

살아 있는 땅, 고달사지
서울에서 여주를 오가는 육로는 크게 강북 방면 길과 강남 방면 길로 나뉜다. 어느 길을 택하든 잰 걸음으로 이틀은 걸렸을 길이다. 우선 강북 방면 길은 삼국 시대부터 남한강과 인접한 고을과 그 주변의 사찰들을 이으면서 뭍길의 교통을 연계하고 지원하던 옛길이다. 파사성(婆娑城)에서 내려다보는 한강의 풍광도 으뜸이다. 탁 트인 남쪽으로는 서쪽으로 길게 뻗은 강줄기 위에 걸린 이포대교를 내려다볼 수 있고, 북쪽으로는 멀리 장대한 태백산맥의 연봉과 마주한다. 이곳에 서면 왜 이곳에 성을 쌓고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줄기차게 싸움을 벌였을까 하는 궁금증은 절로 사라진다. 정변으로 쫓겨나 충주로 귀양 가던 고려의 목종(재위 997∼1009)과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으로 피신하던 공민왕(재위 1351~1374)이 쓸쓸히 지나간 길이기도 하다. 그 길목에 “폐사지의 역사적 정취”가 느껴진다는 고달사가 있다.

폐사지가 된 지금도 고달사의 광활한 빈터에 놀라게 되지만, 고려 때의 고달사는 사방 30리를 경내로 삼아 수백 명의 승려가 살았다고 하니 고려 왕실로부터 엄청난 우대와 경제적 지원을 받았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고달사의 폐사 이유를 찾는 학자도 있다. 14세기 말 유교 국가인 조선이 들어서면서 국가의 지원과 특혜가 사라지자 불교가 스스로 자립할 힘을 잃은 것이라는 해석이다.

고달사지에는 세련된 조각 기법의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를 비롯하여 승탑과 사탑 등 훌륭한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기품 있는 아름답고 화려한 조각도 볼거리지만, 이 사탑들은 이른바 비보사탑(裨補寺塔)으로 땅의 기운을 빌려 왕의 권위를 지키고 알리는 방편으로 삼아 민중들의 관심을 더 크게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 고달사지에 서서 아무리 좌우의 산세를 둘러봐도 대가람의 위엄을 찾아보긴 어렵다. 그저 찬 바람 소리를 들으며 절터 뒷산을 서성일 때 드는 마음만은 공허하다거나 흐트러지지 않고 온화하고 포근하다. 이것이 생기가 있는 살아 있는 땅의 느낌인가.

한국의 불교 사찰이 대개 산에 자리하고 있는 것과 달리 여주 신륵사는 드물게도 강과 관계가 깊다. 한강을 굽어보는 암석 위에 벽돌로 쌓은 전탑(塼塔)은 신륵사에 남은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효종(재위 1649~1659)의 능 바로 아래에 자리한 왕비 인선왕후의 능이 각종 석물에 둘러싸여 있다. 능서면 영녕릉 사적지에는 서쪽에 세종대왕(재위 1418~1450)과 왕비 소헌황후의 합장릉이, 동쪽에는 효종과 왕비 인선왕후의 쌍릉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능들은 엄숙하면서도 품위 있는 전형적인 조선 시대 왕릉의 모습을 보여 준다.

지혜의 눈
강남 방면 길은 조선 시대 도성에서 부산 동래에 이르는 주요 간선망과 연계되어 세종대왕이 외가인 여주로 강무(講武)를 갈 때 또는 역대 왕들이 이곳에 잠든 세종과 효종 두 왕릉을 참배할 때 다니던 길이다. 경기도 광주에 있던 세종대왕의 능을 나중에 여주로 다시 옮긴 것은 이곳이 한반도 최고의 명당이라는 풍수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본 조선의 왕릉은 모두 다 크고 아름답다.

한강의 풍광을 바라보는 최고의 전망대는 영릉에서 남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강변에 있는 영월루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남한강변 서쪽으로 들어선 여주 시가지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고, 고개를 들면 강 건너 북쪽으로 규모가 엇비슷한 산들이 멀리 혹은 가까이 그림처럼 늘어서 있다. 그중 어딘가에 고달사를 품 안에 안은 혜목산이 있을 것이다. 혜목(慧目)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5개의 눈 중 하나로 지혜의 눈을 뜻한다. 불교 경전 중 하나인 『원각경(圓覺經)』에는 “밝은 해를 일산(日傘)으로 가린다 해도 지혜의 눈은 맑고 순수하다(幻翳朗照 慧目清净).”는 구절이 나온다.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도 나의 몸과 마음은 이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청정한 지혜의 눈이 아직 먼 것인가.

1. 이포대교 2. 여주세계생활도자관 3. 황포돛배 나루터 4. 명성황후 생가

이창기(Lee Chang-guy 李昌起) 시인, 문학평론가 안홍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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