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2020 AUTUMN

생활

연예토픽 멀티 페르소나의 시대

연예인들이 본래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뜻밖의 캐릭터를 만들어 내며 대중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방송가에 불고 있는 이른바‘부캐 열풍’이다. 과연 이 현상은 개인의 다양성에 눈떠 가고 있는 한국 사회의 변화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게임 유저들은 본래 캐릭터가 더 이상 플레이를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대비하거나 게임을 보다 전략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다른 캐릭터를 만들곤 한다. 이 2차 캐릭터를 가리키는 ‘부캐’는 오랫동안 게임계에서 사용되던 용어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TV 예능 프로그램에 부캐가 등장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 개념을 방송 프로그램에 처음으로 접목시킨 주인공은 20년 가까이 온갖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능수능란한 진행 솜씨를 발휘하며 이미 ‘국민 MC’로 불리고 있던 개그맨 유재석(劉在錫)이다.

TV 예능에 부캐 열풍을 몰고 온 이는 ‘국민 MC’로 불리는 개그맨 유재석(劉在錫)이다. 그는 트로트 가수, 하프 연주자 등 다양한 캐릭터로 성공적인 변신을 이루어 냈다. ⓒ MBC

새로운 트렌드
2019년 7월부터 방송되고 있는 MBC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를 연출하는 김태호(金泰浩) PD는 유재석을 출연시켜 드럼 연주, 하프 연주, 트로트 부르기 등 다양한 미션을 수행하게 했다. 유재석은 단 한 번도 쳐 본 적 없는 드럼을 무작정 배운 후 독주회를 열었고, 비틀즈의 링고 스타를 빗댄 ‘유고 스타’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프 연주도 잘 소화해 낸 그는 이번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와 자신의 이름을 합친 ‘유르페우스’라는 캐릭터로 불리게 되었다. 더 나아가 트로트 신곡을 취입해 정식 트로트 가수 ‘유산슬’로 데뷔하기까지 했다.

유재석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신을 다양한 캐릭터로 분화시키는 데 성공했고, 시청자들은 그의 여러 캐릭터들을 ‘부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비롯된 부캐 콘셉트는 곧바로 연예계에서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부캐 바람 속에 정상의 인기를 또 다시 확인하고 있는 연예인이 있다. 결혼과 함께 제주도에 정착해 ‘무소유의 삶’을 추구하며 살았던 가수 이효리(李孝利)다. 일찍이 1세대 걸그룹 멤버로 뜨거운 인기를 누렸던 그가 요즘 널리 알려진 소탈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캐릭터를 만들어 활동 중이다. 미국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다가 엄청난 재력가가 된 후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인물 ‘린다 G’로 변신한 것이다.

한편 개그맨 추대엽은 노래를 카피한다는 의미의 ‘카피추’라는 캐릭터로 인기를 끌고 있고, 개그우먼 김신영(金信英)은 ‘김다비’라는 캐릭터로 트로트 곡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1998년 데뷔한 걸그룹 핑클의 리더 이효리는 결혼과 함께 제주도에 정착해 소박한 삶을 추구하며 살았다. 최근에는 호화로운 일상을 영위하는 ‘린다 G’라는 캐릭터를 통해 색다른 모습을 보여 주며 다시 대중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 MBC

부캐 열풍은 개인의 정체성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관점에 변화가 일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한 사람이 한 가지의 일관된 모습으로 살아가던 시대에서 벗어나 이제는 한 사람 안에도 다양한 모습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시대로 넘어왔다는 뜻이다.

개그맨 추대엽은 ‘카피추’라는 캐릭터를 통해 B급 유머를 날리며 유튜브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 유튜브 캡처

개그우먼 김신영은 트로트곡 <주라 주라>를 발표하며 자신의 부캐릭터 ‘둘째 이모 김다비’를 데뷔시켜 화제를 모았다.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이처럼 유명 연예인들이 본래의 캐릭터보다 가상으로 만들어 낸 캐릭터로 더욱 인기를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한국 사회의 변화가 투영되어 있다. 그 첫 번째는 개인의 확장이다. 한국전쟁 이후 급격한 산업화를 겪은 한국 사회에서는 개인보다 가족 또는 공동체의 이익이 더 중요시됐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주의적 사고 방식은 1990년대 외환 위기에 이어 2000년대 세계적인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개인주의로 급격히 전환되었다. 학교를 마치고 입사한 직장에 은퇴할 때까지 평생을 바쳤던 이른바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지면서 이제 한국인들에게는 조직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자신이 더 중요해졌다. 성장주의 신화가 깨지면서 미래의 성공에 대한 기대는 사라졌고, 대신 그 자리를 현재의 확실한 행복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개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이다.

2020년 3월, 취업 지원 서비스 업체 잡코리아가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직장인 4명 중 3명은 직장에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이 평상시와 다르다고 대답했으며, 직장이 기대하는 모습에 맞추기 위해 가면을 쓰고 일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퇴근 후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고 대답했다. 일이 삶의 전부였던 과거 세대들에게는 그 일을 하는 하나의 캐릭터만이 존재했지만, 일 외에 다른 것들도 중요해진 요즘 젊은 세대는 그 다양하고 흥미로운 세계를 탐험할 부캐들이 필요해졌다. 이들은 퇴근 후 직장 업무와 전혀 관계없는 활동을 하며 즐거워하는 자신의 또다른 모습을 부캐로 인식한다.

때로는 부캐와 본래 캐릭터의 관계가 역전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취미로 시작한 활동으로 발생하는 수입이 직장에서 받는 연봉보다 더 높은 경우도 있다. 특히 유튜브 같은 디지털 공간이 부캐 활동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다.



다양한 정체성
부캐 열풍은 개인의 정체성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관점에 변화가 일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즉, 한 사람이 한 가지의 일관된 모습으로 살아가던 시대에서 벗어나 이제는 한 사람 안에도 다양한 모습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시대로 넘어왔다는 뜻이다. 2020년 한국 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트렌드 키워드 ‘멀티 페르소나’는 ‘가면을 바꿔 쓰듯이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다층적 자아’를 의미한다.

부캐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일부 연예인들이 소위 ‘멀티 플레이어’라는 개념으로 활동을 했다. 예를 들어 가수가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기도 하고,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입담을 과시하기도 한다. 연기자가 음반을 내는 사례도 종종 있어 왔다. 그런가 하면 연기에 도전하는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연기력 논란에 휘말리는 사례도 흔히 있어 왔다. 연예계뿐만 아니라 멀티태스킹이 현대 직업인의 생존 전략으로 떠오른 것도 이미 생소한 일은 아니다.

한편 최근의 부캐 열풍 현상이 보이는 특징 중의 하나는 전문성이 개입되는 ‘일’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취미나 유희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캐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얼마나 완벽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대중도 부캐가 얼마나 흥미롭고 색다른 시도를 하고 있는지를 더 눈여겨보는 듯하다. 한국 사회가 현재 ‘부캐 놀이’에 푹 빠져든 것은 그간 집단에 의해 억압되었던 개인들이 자신의 또 다른 면모들을 드러내고픈 욕망을 숨기고 살아왔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정덕현(Jung Duk-hyun 鄭德賢) 대중문화평론가

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