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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WINTER

이 시대의 모든 태일이에게

애니메이션 <태일이(CHUN TAE-IL)>(2021)는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Chun Tae-il 全泰壹 1948~1970) 열사의 이야기다. 50년도 더 된 과거의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지만, 관객에게 여전히 깊은 여운을 남기며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태일이(Chun Tae-il)> (2021)는 노동 환경 개선과 노동자 인권 개혁을 위해 스스로 불꽃이 된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 명필름(MYUNGFLMS)



1960~1970년대 당시 한국은 빈곤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봉제 산업처럼 값싼 노동력을 활용한 산업 분야에서 노동력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경제 성장을 추구해왔다. 근로기준법이 제정돼 있었지만, 경제 성장 논리에 법 준수는 뒷전이었다.
이러한 부당한 세상에 목소리를 내며 변화를 꿈꿨던 한 청년의 이야기를 담은 애니메이션 <태일이>가 2022년 제46회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Annecy International Animated Film Festival) 심사위원 특별상, 제26회 판타지아 국제 영화제(Fantasia International Film Festival)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 관객상(동상), 제18회 서울 인디애니페스트(Seoul Indie-AniFest) 대상을 수상하며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영화에서는 온종일 일해도 제대로 돈을 받지도 못하고 열악한 근무 환경에 몸이 아픈 것이 오히려 죄가 되는 동료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열사로서의 모습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이야기, 첫사랑을 꿈꾸는 청년의 모습 등 생애를 차곡차곡 쌓아 전태일이라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게 한다.
ⓒ 명필름

열악한 노동환경에 맞선 청년
1960년대 말 서울 청계천 일대에 위치한 평화시장에는 의류 제조업체가 밀집해있었다. 노동자들은 하루 14~15시간씩 일하며 화장실에 갈 시간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렸다. 작업 공간은 원단을 가공할 때 발생하는 먼지를 환기할 수 있는 시설조차 없었고 심지어 1층을 임의로 2개 층으로 분리해 허리를 펼 수도 없었다. 작업 환경이 이러하니, 노동자들은 폐 질환을 비롯한 각종 병에 시달리기 일쑤였지만, 병이 나 출근하지 못하면 곧바로 해고당하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특히 보조 인력 노동자 대부분은 13~17세의 어린 여성이었고 이들의 급여는 최소한의 끼니조차 해결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봉제 노동자였던 전태일 열사는 평소 보조 인력 노동자들을 여동생처럼 아꼈다. 자신의 차비를 털어 그들에게 풀빵(물에 밀가루를 풀어서 풀처럼 반죽을 만들어 구워 만든 빵)을 사주고는 자신은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일도 빈번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사는 동시에 동료들을 모아 노동자 단체를 결성하고 고용노동부나 시청 등 관계 당국에 끊임없이 노동 조건 개선과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했다.
종종 노동자 시위를 벌여봤지만, 경찰의 방해로 그때마다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던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또 한 차례 시위가 저지되자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 법전을 손에 쥐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자기 몸에 불을 붙여 노동자들의 현실을 세상에 온몸으로 알렸다. 전신 화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가 극도의 고통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라는 말을 남긴 다음 세상을 떠났다.

 

일상을 통해 섬세히 그려낸 이야기
영화는 전태일 열사를 평면적으로 영웅화하지 않고 한 청년으로서 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담으려 애쓴다. 특히 지금도 대부분 보존되어 있는 그의 일기장에 적힌 대로 1967년 당시 짝사랑에 빠졌던 감정까지도 애틋하게 묘사하고 있다. 중요한 점은 짝사랑 상대가 공장 사장의 처제였고, 그의 나이 19살에 사랑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점이다. 사장에게 밉보일 경우 철저한 계급 사회였던 봉제공장 생활에 지장을 줄 수 있었다는 점을 자각한 것이다. 이 같은 선택은 그의 실제 삶과 현실 속에서의 인식을 냉정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나아가 그가 계급 인식을 인지하고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단순한 개인사를 넘어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대목으로, 영화는 이 점을 놓치지 않고 공들여 포착하고 있다.
사장에게 신뢰를 얻어 그가 사장 집에 머무는 동안 그 집에서 사용하는 비누 향기가 평소 자신이 쓰던 비누의 향기와는 다르다는 점을 자각하는 장면처럼, 전태일 열사의 계급 인식이 생성되고 강화되는 경로를 그의 일상을 통해 섬세하게 그려낸 대목도 돋보인다. 냄새로 계급을 구분 짓는 현실 묘사는 봉준호(Bong Joon-ho 奉俊昊) 감독의 영화 <기생충(PARASITE 寄生虫)>(2019)에서도 주요하게 등장하는 모티프로, 극심한 불평등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 관객들이 마음속에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과거와 다를 것 없는 오늘
<태일이>는 50여 년 전 이야기를 과거에 머물게 하지 않고 오늘날에 지니는 의미를 전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당시 봉제공장에서 실제로 벌어진 임금 배분 갈등과 착취 구조를 노-사 갈등이라기보다 사측이 조장한 노-노 갈등의 측면에서 재조명한다.
당시 봉제 공장들은 재단사-재단 보조-미싱사-미싱 보조 순으로 철저한 계급 구조를 만들어놓고 계급 간 관리 책임을 각 직종의 상급자에게 맡김으로써 노-사 갈등의 책임을 떠넘겼다. 병으로 출근하지 못하는 노동자를 해고할 때 사장이 직접 하지 않고 재단사에게 떠맡긴다든지, 임금 배분을 재단사의 재량에 맡겨 적정한 임금을 전체 노동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고용주의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 같은 것들이 행해졌다.
21세기의 노동 문제 역시 책임과 권한이 있는 자가 다양한 방식을 이용해 중간 관리자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방식으로 사태의 본질을 숨기는 측면이 강하다. 예를 들면 최저임금 문제를 가맹점주와 아르바이트생의 갈등 관계라는 프레임 속에 가둠으로써, 가맹점 시스템을 운영하는 대기업은 책임을 지지 않고 약자들끼리의 갈등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초점을 흐리는 것처럼 밀이다.
<태일이>는 1960~1970년대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현재 우리 사회가 약자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측면에 두어 관객으로부터 보편적 공감대를 얻어내고 있다. 한국은 이제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 안팎의 선진국이지만, 2020년 기준 산업 현장에서의 노동자 사망자 수가 하루 평균 약 3명에 달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기까지 하청-재하청 구조는 물론 그 구조에서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플랫폼 노동자나 특수 고용직 노동자를 양산하는 경제 시스템이 작용하고 있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Dardenne brothers) 감독의 2015년 작 <내일을 위한 시간(Two Days One Night)>(2015), 켄 로치(Ken Loach) 감독의 2019년 작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2019), 올해 화제작 중 하나인 에리크 그라벨(Eric Gravel) 감독의 <풀타임(Full Time)>(2022)에 이르는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글로벌 자본주의의 새로운 고용 형태 혹은 노동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 국면이 이전에는 보지 못한 방식으로 전개되면서 강자는 책임을 피하고 약자는 한층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태일이>는 이들 걸작과 함께 거론될, 50년 전 이야기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노동의 복합적인 해결 과제를 어렵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수작이다.
영화의 종반부, 전태일 열사가 분신을 결행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주인공의 모습을 단 두 컷의 짧은 장면으로만 처리한다. 대신 놀란 눈으로 이 모습을 바라보는 동료들과 주변 시민들의 얼굴을 더 길게 보여준다.
이들의 표정은 다름 아닌 관객 자신의 얼굴이 되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바라보는 사회 갈등의 원인은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당신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사회의 불행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당신은 지금 어떤 재난을 지켜보고 어떤 행동을 하고 있나? 그 답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모습부터 좀 더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고 <태일이>는 말하고 있다.

 

송형국 (Song Hyeong-guk, 宋亨國)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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